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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95화 (95/183)

공작이 회귀함 95화

레라지에.

그녀는 마왕 중에서 보기 드물게 인간에게 호의적인 마왕이었다.

회귀 전에는 빌 헬름 공작의 강력한 동맹이자 동시에 그의 연인이었으며, 인간의 편에서 마왕들과 대적한 마왕들의 입장에서는 용서하지 못할 배신자였다.

어디 마왕 중에 배신자가 그녀뿐이겠느냐마는.

여하튼 레라지에와 빌 헬름 공작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연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무척이나 유명했는데 오죽하면 음유시인들이 주점에서 단골 소재처럼 노래하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였다.

마계에서부터 앙숙 관계이던 서열 17위의 보티스와 서부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쟁에서 대패한 레라지에는 수하들을 모두 잃고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이후 우연히 근처 민가들을 시찰 하던 빌 헬름 공작과 만나게 되면서 그들의 첫 인연이 시작되게 된다.

여느 사랑 이야기처럼 수많은 역경과 고난 끝에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빌 헬름 공작의 지원 아래 세력을 수복한 그녀는 결국 보티스에게 원수를 갚고 서부의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며 빌 헬름 공작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주었다.

회귀 전에 발타자르가 접했던 이 이야기들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아직 빌 헬름 공작과 그녀가 만나기 전이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그녀를 회유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인간에게 호의적이던 그녀의 성향을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고 그녀가 발타자르의 손을 잡아준다면 든든한 우군이 생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어서 떠오르는 기억에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인간에게 호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마왕 중에서 비교적 유순한 성격이라고는 해도 마왕은 마왕이었다.

빌 헬름 공작을 만나기 전에는 웰링턴 호수 인근을 지나가는 인간들과 근처 민가들을 학살하며 제 세력을 불려 나가던 그녀였다.

(이 당시 서부는 세계수의 이변을 해결하지 못해 큰 혼란이 찾아왔던 시기였기에 빌 헬름 공작은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또한 그들이 겪은 수많은 우연 중 하나였다.)

그 말인즉 그녀가 인간에게 호의적인 성향으로 변한 것은 보티스에게 대패하고 빌 헬름 공작을 만나고 난 이후라는 뜻이었고 지금의 그녀는 여느 마왕들처럼 인간을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발타자르는 빌 헬름 공작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녀의 성향을 변화시킬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로 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발타자르에게는 그것을 감수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하여 발타자르는 그녀가 세력을 키우기 전인 지금.

그녀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발타자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아도 후에 보티스에게 대패할 그녀였다. 하지만 회귀 전에도 우연과 우연이 엮여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빌 헬름 공작과 연을 맺었듯 상황이 달라져도 혹여나 빌 헬름 공작과 만나게 된다면 회귀 전의 흐름대로 그의 강력한 지지자로 변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였지만 잠재적 불안요소를 굳이 방치할 필요는 없었다.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을 습격한 것이냐! 대답 여하에 따라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독이 바짝 오른 레라지에가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이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대기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고 수레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수레를 호수로 밀어 넣을 준비를 끝마쳤다.

다분히 적의가 가득한 그 행동에 레라지에가 황급히 보호 마법을 펼침과 동시에 제 수하들을 불러들였지만, 그보다 발타자르군의 행동이 한 발 더 빨랐다.

발타자르의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병사들이 수레를 호수에 밀어 넣었고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놓으며 화살을 쏘아 보냈다.

피비비빙─

하늘을 빼곡히 수놓으며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팅팅팅─

벌떼처럼 레라지에를 향해 달려들던 화살들은 그녀가 펼친 마법에 속절없이 막혔지만, 호수에 밀어 넣은 수레는 아니었다.

수레에는 강력한 독초들과 독극물들이 다량 실려 있었고 호수에 빠진 이 독초들과 독극물들이 호수를 녹색 빛으로 물들이며 빠르게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레라지에의 부름에 수면 위로 올라오던 마족들과 마물들은 이 퍼져오는 독을 발견하곤 황급히 도망쳤지만, 곧 호수의 바닥에 도착함과 동시에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독에 중독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몇몇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에게는 독이 별 힘을 쓰지 못했지만, 그 수가 몇 되지 않았다.

순식간에 대다수의 수하를 잃은 레라지에는 한 줌조차 되지 않는 수하들만으로 발타자르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감히……!”

레라지에의 머리칼이 물결치듯 나풀거리며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죽어라!”

레라지에가 발타자르를 향해 삼지창을 찌르자 미티어 스톰을 집어삼켰던 물의 용이 입을 쩍- 하고 벌린 채 쏘아져 나갔다.

이에 발타자르가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드는 물의 용을 베어버리려는 순간.

“안 그래도 자존심 상하던 차에 잘됐네. 어디 다시 한번 붙어보자.”

발타자르의 앞에 레티시아가 불쑥 나타나더니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그녀의 앞으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성되더니 물의 용을 향해 화염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쿠쿠쿠쿵─

족히 수백 발은 되어 보이는 화염구가 달려드는 물의 용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희뿌연 수증기와 함께 강렬한 충격파가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레라지에와 레티시아의 정면 대결이 시작되고 그녀들의 몸에서 마나가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옷자락이 펄럭이고 머리칼이 쉼 없이 휘날렸다. 이 대결에서 밀릴 경우 그대로 상대방의 마법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았다.

이잉─

정면 대결로는 레티시아의 폭격을 뚫을 수 없다고 판단한 레라지에가 삼지창을 쥔 손에 힘을 주자 삼지창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레라지에가 삼지창을 휘두르자 그 움직임에 따라 물의 용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레티시아의 약점을 노리기 위해 물결치듯 이리저리 몸을 틀어대었다.

그러나 결코 접근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레티시아의 폭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렬해져 갔다.

그녀들의 대결이 길어질수록 충격파는 더욱 커졌고 주변 일대는 수증기에 뒤덮여 한 치 앞을 바라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칫- 힘을 조금만 더 회복했더라면 순식간에 압살했을 텐데.’

인간 따위를 압살하지 못해 이리 지지부진한 대결을 벌이는 상황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레라지에가 속으로 혀를 차는데 문득 머리 위에서 강렬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레티시아와의 정면 대결에 정신이 팔린 사이 이루어진 기습이었다. 레라지에가 간신히 눈동자만 떼구르르 굴려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어느샌가 다가온 발타자르가 그녀를 향해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아, 안 돼!’

본능적으로 죽음을 직감한 레라지에가 몸을 피하려 했지만, 그보다 발타자르의 검이 한 발 더 빨랐다.

내려치는 검격.

섬광과도 같이 휘둘러진 발타자르의 검이 순식간에 레라지에의 몸을 갈랐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레라지에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레라지에가 사망하자 그녀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물의 용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고 졸지에 표적을 잃은 레티시아의 화염구가 발타자르를 향해 쏟아졌다.

수백 발의 화염구들이 순식간에 발타자르를 집어삼킬 듯이 다가오자 발타자르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오러블레이드와 레티시아의 마법이 격돌하는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무언가에 의해 떠밀린 것처럼 레티시아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 * *

혼절한 레티시아를 불의 마탑의 마법사들이 챙기는 모습을 확인한 발타자르가 시체 조각이 되어버린 레라지에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수하들은 그녀가 사망한 순간 강물을 따라 도망친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둘 뿐인가?’

서부에 자리를 잡은 마왕은 제법 수가 되지만 그중에서 위협이 될 만한 마왕은 딱 셋이었다.

그중 하나인 레라지에가 사망한 지금. 이제 서부에서 위협이 될 만한 마왕은 ‘태고의 뱀’ 보티스와 지금쯤 한참 세계수를 갉아먹고 있을 ‘벌레들의 왕’뿐이었다.

벌레들의 왕은 아직 쓸모가 많으니 굳이 이종족들의 땅으로 찾아가 제거할 필요는 없었고 보티스는 지금 시기의 행방을 모르니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머지 마왕들의 경우는 하나같이 제힘 하나만 믿고 날뛰는 것들이니 상대하기 어려울 것도 없는 놈들이었고 서부 정리가 끝난 이후 해결해도 될 문제들이었다.

‘이제는 온전히 빌 헬름 공작에게 신경을 집중할 수 있겠군.’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쉰 발타자르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 들어 펼쳐 보았다.

지도를 바라보며 최단기간에 빌 헬름 공작령까지 향하는 길을 고르던 발타자르는 문득 무척이나 낯이 익은 영지를 발견하곤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펜바흐 남작령이라…….”

발타자르는 속으로 오펜바흐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무척 낯이 익은데 그 이유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툭- 툭-

발타자르는 손가락으로 검집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발타자르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펜바흐 천둥새가 남작령에 있었던가?”

비옥한 서부를 지배하고 있음에도 다른 선제후들에 비해 비교적 세력이 약했던 빌 헬름 공작가를 칼 프란츠 대공의 세력과 비견될 정도로 성장시킨 불세출의 명사.

천둥새가 오펜바흐 남작령 출신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이때쯤이면 갓 성년이 되었을 것이니 아직 빌 헬름 공작에게 입관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어차피 가는 길에 있기도 하고 때마침 자비에고 주교가 오펜바흐 남작령을 점령했다고 했으니 한번 방문해 봐야겠군.’

안 그래도 슬슬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책사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만약 천둥새를 회유할 수만 있다면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위한 행보를 걷는 발타자르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결정을 내린 발타자르가 뗏목을 호수 위에 띄우도록 지시를 내리곤 비비안을 소환했다.

“비비안.”

낮게 비비안의 이름을 읊조리자 허공에서 뽀글뽀글 기포가 생겨나더니 이내 손바닥만 한 크기의 비비안이 발타자르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알!”

비비안이 냉큼 발타자르에게 쪼르르 날아와 그의 눈앞에 서더니 생긋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에요!”

사실 발타자르가 서부로 향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비비안은 몇 년 만에 재회하는 사람처럼 굴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가워요.”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생글생글 웃던 비비안이 돌연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이내 얼굴에서 웃는 낯을 지우곤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른 거예요? 저랑 계약한 이후로 한 번도 이렇게 소환한 적이 없었잖아요.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거예요?”

휙휙 돌변하는 비비안의 표정 변화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눌렀다.

“으아…… 왜 그래요.”

비비안이 바둥거리며 투정을 부렸지만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부탁이 하나 있네만.”

발타자르의 말에 일순간 비비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부탁이요? 알이 저한테요?”

계약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비비안은 몹시도 들떴다.

물론 발타자르가 일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항상 아이린을 지켜줄 것을 그녀에게 부탁하기는 했지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였다.

“뭔데요? 말 만해요. 제가 다 들어줄게요.”

비비안이 발타자르의 머리맡을 빙글빙글 맴돌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호수 위를 가득 메운 뗏목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당분간 저 뗏목들을 이끌어주었으면 하네만. 가능하겠는가?”

발타자르의 말에 비비안이 힐끔 호수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많기는 한데. 가능할 것 같아요. 언제부터 끌어주면 되나요?”

비비안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답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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