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94화
오펜바흐 남작령을 점령한 2군은 자비에고 주교의 승인 아래 대대적인 약탈을 시작했다.
남작성을 비롯하여 남작령에 소속된 마을 전체가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고 눈이 뒤집힌 병사들과 재산을 불릴 절호의 기회를 눈앞에 둔 귀족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약탈을 시작했다.
영지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사람들의 비명이 쉼 없이 울려 퍼졌다.
백주대낮부터 살인과 강간, 방화가 성행했다.
노인들은 눈에 띄는 족족 죽이고 젊은이들과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부리거나 팔기 위해 잡아들였으며 돈이 될 만한 것은 쌀 한 톨 남기지 않고 약탈했다.
약탈을 자행하는 이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것은 여성들이었다. 당장의 성욕도 풀 수 있고 노예 중에서 값이 가장 비싸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어느 마을에서는 여자 한 명을 두고 병사들끼리 칼부림이 나기도 할 정도였다.
* * *
첨탑에서 아비규환이 된 오펜바흐성을 내려다보던 자비에고 주교가 약탈이 자행되는 광경을 목격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천박하기는.”
군의 사기 유지를 위해 약탈을 허락하기는 했지만, 정도껏이란 단어를 모르는 듯 날뛰는 병사들과 귀족들의 모습은 자비에고 주교의 눈에는 한없이 한심해 보였다.
물론 저들이 더 미쳐 날뛸수록 자비에고 주교에게는 득이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광기에 전염되어 멋모르고 날뛰고 있지만 일이 다 끝난 후 정신을 차리고 나면 자신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게 될 테고, 그것이 약점이 되어 이후에는 자비에고 주교의 명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을 것이었다.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지. 클클.”
중얼거리며 자비에고 주교가 음충맞게 웃었다.
이 지옥도를 연 장본인이 바로 그였고 오벤바흐 남작의 재산을 남김없이 약탈하고 그의 처와 여식들을 제 수하들의 장난감으로 넘겨준 것 또한 그였다.
사제가.
그것도 한 교단을 이끄는 주교가 할 짓은 아니었지만, 사제들이 타락한 것이 어디 하루 이틀 일이었던가?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난 지옥에 떨어질 걸세. 아니 그런가?”
약탈이 벌어지는 풍경을 안주 삼아 와인을 마시던 자비에고 주교가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제에게 묻자 사제가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슈미트라 님과 교단의 번영을 위해서가 아닙니까. 교단과 슈미트라 님을 위해 한 몸 희생하시어 몸에 오물을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으시는 분이신데 지옥이라니요. 가당치도 않습니다.”
사제의 말에 자비에고 주교가 피식 웃었다.
“사람 참. 아부는.”
아부인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싱글싱글 웃던 자비에고 주교가 사제의 어깨를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고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발타자르 공작은 지금 어찌하고 있다더냐?”
자비에고 주교의 물음에 천장에서 뚝- 하고 사람 하나가 떨어져 내리더니 자비에고 주교의 앞에 바짝 엎드리며 답했다.
“현재 웰링턴 호수 인근에서 진을 치고 휴식 중이라는 보고를 방금 막 받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진군 속도로 볼 때 빌 헬름 공작령에 도착하기까지는 사흘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보원의 보고에 자비에고 주교가 미간을 찌푸렸다.
“알 수가 없군.”
이번 서부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바로 발타자르였다.
전쟁이 시작되면 군을 이끌고 곧장 빌 헬름 공작령까지 빠르게 치고 나갈 기세를 보이더니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미온적인 태도만 보이고 있었다. 자비에고 주교는 발타자르의 저의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발타자르. 무엇을 노리는 것이냐.”
처음에는 황권 강화나 대신들의 역모 이후 어수선해진 중앙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이 전쟁을 통해 내부 정리와 결속을 동시에 노리는 것이거나.
하지만 이 전제가 허용되려면 발타자르가 서부 전쟁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만 했다.
발타자르가 저리 방관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지금.
그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음은 확실해 보였다.
“대체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북부 변방의 무장이 단시간에 제국 최고의 권력자로 떠올랐다.
이는 단순히 운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동안의 그의 행적들과 정치적 수완으로 볼 때 무언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게 피해가 올 일만 아니면 좋겠군.”
발타자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건 간에 그것이 자신에게 피해가 되는 일만은 아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켈마르크 백작만 건재했더라도…….”
발타자르가 있을 북쪽을 바라보며 자비에고 주교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푸드득-
거친 날갯짓과 함께 매가 날아올랐다.
푸른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오르는 매를 바라보던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말을 걸어왔다.
“바이칸의 왕에게 보내는 전서입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세. 린에게 보내는 편지일세.”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피식 웃었다.
“참 지극정성이십니다. 이번 전쟁이 마무리되려면 적어도 몇 달은 서부에서 머무셔야 할 텐데 벌써부터 그리 애달프시면 남은 시간은 어떻게 버티시려고요?”
가웨인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어느샌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가는 매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이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최대한 곁에 있으면서 아이가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급변하는 정세에 발맞추어 발타자르 역시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고 그럴수록 아이린과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얼마나 자라 있을지. 기대되면서도 미안하기도 하다네.”
잠깐 한눈을 팔고 나면 부쩍 자라나는 아이린을 볼 때면 잘 자라주어 기특하기 그지없지만 동시에 자주 함께하지 못해 미안했다.
발타자르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고만 있자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이에 가웨인이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질문을 건넸다.
“그보다, 아가씨께는 뭐라고 적어 보내신 겁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그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조금은 밝아진 분위기로 답했다.
“보고 싶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그리 적어 보냈네.”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장군 지금 무척이나 느끼하신 것 알고 계십니까?”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헛소리는.”
그러자 가웨인이 억- 하고 앞으로 몸을 휘청거렸다.
“장군!”
* * *
그렇게 두 사내가 투닥거리는 사이에도 그들의 주변으로 병사들이 바쁘게 오고 갔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뒤로 병사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로 호수를 향해 병장기를 겨누고 있었다. 마치 호수 속에 적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대장! 준비 끝났어요.”
사전에 발타자르가 내린 지시를 끝마친 트리스탄이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는 발타자르와 가웨인에게 다가와 말했다.
“흠흠.”
트리스탄의 말에 정신을 차린 발타자르가 멋쩍은 표정으로 제 행색을 한번 다듬더니 말했다.
“마법사들은?”
“명령이 떨어지면 바로 마법을 발동할 수 있도록 지정된 위치에서 대기 중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된듯했다.
“수고했네. 이만 자리로 돌아가게.”
발타자르가 고생했다는 의미로 트리스탄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자 그녀가 발타자르를 향해 경례를 올리곤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수하들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다 깜빡 잊었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곤 발타자르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아 참! 대장. 의외로 귀여운 구석도 있으셨네요?”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고 이에 트리스탄은 꾸중을 들을까 싶어 헐레벌떡 도망쳤다.
* * *
웰링턴 호수는 서부에서 가장 거대한 호수로 이 웰링턴 호수에서 시작되는 강줄기는 빌 헬름 공작령을 지나 이종족들의 땅으로 뻗어 나갈 정도로 무척이나 길고 거대했다.
발타자르는 이 웰링턴 호수의 강줄기를 이용해 빌 헬름 공작령으로 직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물길을 타고 빌 헬름 공작령까지 이동할 발타자르군의 앞길을 막아설 존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시작하라.”
발타자르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준비하고 있던 마법사들이 호수 위로 마법을 발현시키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마법사가 일제히 마법을 발현시키자 붉은빛을 흩뿌리는 마법진들이 허공을 빽빽이 수놓으며 장관을 연출했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호수를 뒤덮을 만큼 거대한 크기의 마법진이었다.
일전에 듀락 후작성을 공략할 당시 일거에 성벽을 소거시켜 버린 화염계 최고위 마법.
미티어 스톰Meteor Storm이었다.
미티어 스톰이 발현되며 그 아래로 발현되었던 화염계 마법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하며 그 몸집을 부풀려 나갔다.
허공 위로 떠오른 레티시아가 춤을 추듯 유려하게 손을 휘저을수록 미티어 스톰이 뿜어내는 열기는 더욱더 강렬해졌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느껴지는 강렬한 열기와 빛 때문에 도저히 눈을 뜨고 그것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윽고 미티어 스톰이 한계치에 도달했을 때.
따악-
이번에도 여지없이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몸을 한껏 부풀린 미티어 스톰이 웰링턴 호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치이이이익─
미티어 스톰이 떨어져 내림과 동시에 호수가 비명을 내지르며 뿌연 수증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호수가 증발하며 생성된 희뿌연 수증기가 주변 일대를 순식간에 뒤덮었다.
호수의 수위는 빠른 속도로 낮아지기 시작하고 이 기세라면 순식간에 호수를 증발시켜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돌연 호수의 표면에서 손이 하나 불쑥 솟아오르더니 그 손을 중심으로 호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치이이익-
처절한 비명과 함께 거칠게 소용돌이치던 호수가 돌연 용의 머리를 닮은 형상을 이루어내더니 순식간에 하늘로 용솟음치며 떨어져 내리는 미티어 스톰을 집어삼켰다.
푸스스스─
물로 이루어진 용과 미티어 스톰이 맞부딪치며 좀 더 진한 수증기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접전이 이어진 끝에 승리한 것은 물로 이루어진 용이었다.
미티어 스톰을 집어삼킨 용은 빠르게 하늘로 치솟더니 이내 퍼엉- 하고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어떤 놈이냐.”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하고 동시에 맑은 미성이 울려 퍼지더니 주변 일대를 뒤덮은 수증기가 일거에 흩어져 사라졌다.
이후 인어 하나가 물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더니 이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인어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표독스러운 얼굴로 손에 쥔 뾰족한 삼지창을 발타자르군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역시.”
발타자르가 모습을 드러낸 인어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기 있었구나. 레라지에.”
서열 14위.
물의 마왕 레라지에를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