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91화
프락시온 제국의 황실은 가망이 없다.
하지만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프락시온 제국이 필요하다.
발타자르가 회귀 이후로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분열된 제국의 힘으로는 다가올 미래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북부의 바이칸.
남부의 몬스터.
동부의 해적.
서부의 이종족 연합.
이렇듯 제국 외부로는 위협들이 산재해 있고 내부로는 각 선제후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호시탐탐 자신의 야망을 펼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마왕들과 용사들이 쏟아진다면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는커녕 제국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었다.
실제로도 발타자르의 회귀 전에는 제국은 크게 한번 무너질 뻔했으며, 몰아치는 마왕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렇게 턱 끝까지 죽음이 드리우고 나서야 제국은, 아니, 대륙은 손을 잡고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그 결과 제국은 몰락하고, 마신의 강림은 확정되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암운이 깃든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직접 제국을 운영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자.
제국 내부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선제후들을 통제하여 내부의 안정을 꾀한다. 그 후 주변의 위협들을 종식시키고 나아가 대륙의 힘을 하나로 망라하여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자.
그렇게 결정한 발타자르는 회귀 전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선보이며 바이칸들의 침공을 막아내고 그들을 휘하로 받아들였으며, 제국 최대의 민란을 저지하고 제국 내전의 시발점이 되는 대신들의 역모를 종식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현재.
북부와 중앙의 최고 실권자로 떠오르며 단일 세력으로는 제국 최대의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족했다.
중앙과 북부의 힘만으로는 동부와 서부, 그리고 남부의 선제후들을 견제할 수 있을지언정 통제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발타자르는 제안한 것이었다.
서부를 집어삼키기로.
“빌 헬름 공작이 다스리는 서부는 제국 최대의 곡창지를 보유하고 있으며, 대부분 지형이 평지인지라 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자랑하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성장 가능성만 놓고 보면 가히 제국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옥한 옥토와 빌 헬름 공작의 선정이 맞물려 서부는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서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설령 남부와 동부가 손을 잡는다고 해도 감히 중앙의 결정을 무시하거나 거역할 수 없으리라.
따라서 동부와 남부가 각기 마왕과 몬스터들로 인해 정신이 없는 지금이 바로 적기였다.
“자네 뜻은 알겠네. 하지만 명분이 없지 않은가.”
자비에고 주교가 문제점을 지적하며 나섰다.
옳은 말이었다.
아무리 동부와 남부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상황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아무런 명분 없이 서부를 친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점이 많았다.
하지만 없던 명분도 만들어내 제 정적들을 쳐내던 자비에고 주교가 명분이 없다며 난색을 표하는 모습을 보이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명분이 왜 없는가.”
발타자르가 자비에고 주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자 자비에고 주교가 되물었다.
“그럼 있단 말인가?”
자비에고 주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회의장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최근 서부에는 유래없는 흉년이 시작되었다네. 빌 헬름 공작가에서는 이 흉년의 원인을 찾기 위해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였고 곧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지.”
회의장의 바닥에 그려진 대륙 전도의 중심.
제도가 위치한 곳에 서게 된 발타자르가 천천히 서쪽을 향해 걸어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제도가 그려진 중앙에서 시작하여 걸음을 시작한 발타자르가 서부의 빌 헬름 공작가를 거쳐 도착한 곳은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그려진 이종족들의 땅이었다.
“세계수의 이변.”
발타자르가 밟고 선 세계수의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아직 정보가 부족하지만 빌 헬름 공작이 세계수의 이변을 해결하기 위해 이종족 연합을 지원하기로 한 정황을 포착하였네.”
허리춤의 벨트에 고정된 검을 검집째로 뽑아 든 발타자르는 검집으로 서부와 이종족 연합의 경계를 가리켰다.
“서부에 파견한 정보원의 보고에 따르면 며칠 전 빌 헬름 공작의 수족들이 이 경계를 넘어 이종족들의 땅으로 진입했다더군. 이 자리에 모인 신료들께서도 다들 아시다시피 이종족 연합과 제국 간의 협정에 따라 중앙의 허가 없이 이종족들의 땅에 군을 파병한 것은…….”
팔짱을 끼고서 회의 내내 침묵을 고수하던 슈텔리앙 후작이 발타자르의 말을 이어갔다.
“이종족들과 내통하였다. 그리 판단해도 되겠지.”
슈텔리앙 후작의 말에 발타자르가 씨익 웃어 보이며 답했다.
“바로 그렇네.”
그러곤 쿵- 하고 검집으로 바닥을 내려찍었다.
“자, 이것으로 명분은 충분하고. 남은 것은 황태자 전하를 비롯하여 여기 계신 신료들의 결정뿐입니다만. 다들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발타자르의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 * *
발타자르를 섭정에 앉힐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를 총애하는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두말할 것도 없었고 슈텔리앙 후작과 자비에고 주교가 모두 발타자르의 손을 들어주었다.
회의 결과 만장일치로 서부를 치는 것에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군의 통솔권을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사실 발타자르가 나섰다면 군의 총사령관은 발타자르의 몫이 될 것이었지만 그가 총사령관직을 사양함으로써 벌어진 일이었다.
황제파와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은 서로 총사령관직을 차지하기 위해 열띤 언쟁을 벌였다.
남부와 동부가 저마다의 상황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북부와 중앙이 합심 한데다 마탑의 전력까지 투입되었으니 이번 전쟁에서 승리할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이 없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은 포화상태에 이르러 정체된 파벌의 세력을 확장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이 전쟁에서 어느 파벌이 더 많은 공을 세우느냐에 따라 향후 중앙의 권력 구도가 뒤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은 어느 파벌의 수장이 총사령관직을 맡느냐였기에 각 파벌은 정말 실제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언쟁을 벌였다.
서로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지지부진한 상황이 이어지는 그때, 발타자르가 군을 3개 군으로 나누는 제안을 꺼내었다.
다만, 찬성하는 조건으로 불의 마탑을 북부로 이전시키는 안건을 수락할 것을 요청하였고 자비에고 주교와 슈텔리앙 후작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발타자르의 세력권에 불의 마탑이 이전한다고 해도 언약으로 묶여 있는 마법사들은 황제와 제국의회의 승인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으리란 생각이었다.
오히려 불의 마탑이 발타자르의 세력권에 있음으로 만약의 상황에 발타자르를 견제할 수단이 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 때문에 수락하는 과정에서 잡음은 일절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중앙 최고 권력자들의 합의 하에 군을 3개 군으로 나뉘어 서부를 침공하기로 결정 내려졌다.
제1군에 발타자르가 이끄는 북부의 20만의 군세.
제2군에 슈텔리앙 후작이 이끄는 8만의 군세.
제3군에 자비에고 주교가 이끄는 15만의 군세.
도합 43만의 병력이 동원되었다.
결행 일은 열흘 후.
북부와 중앙 양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군하기로 합의하였다.
* * *
열흘 후.
서부 에버나스 평야 인근 경계초소.
“어우, 날씨 한번 스산하구먼.”
북부와 서부를 잇는 에버나스 평야 인근에 설치된 망루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 찰스는 이른 아침부터 짙은 안개로 뒤덮인 주변을 둘러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겨울이 다가와서인지 아니면 안개 탓인지 날씨가 몹시도 쌀쌀했다. 찰스는 망루 한쪽에 준비된 간이 화로에 바짝 붙어 불을 쬐기 시작했다.
“아이고, 따시다.”
모닥불을 쬐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찰스를 옆에 있던 동료 병사가 타박했다.
“이보게. 똑바로 경계 서게나. 지난번에도 감찰관에게 걸렸다가 크게 혼쭐이 나지 않은가.”
동료의 타박에 찰스가 너스레를 떨며 벽에 기대서서는 어깨너머를 엄지로 가리켰다.
“으흐흐. 어차피 전쟁이 날 것도 아니고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경계일 뿐인데 열심히 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정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전쟁이 난다고 쳐도 인근에 초소가 여기뿐인 것도 아니니 우리 하나쯤은 조금 느슨하게 경계를 서도 되지 않겠나.”
“그래도…….”
“아, 거참. 그리 걱정할 것 없데도 그러네. 지난번에 걸린 건 그 날 재수가 없었던 탓이고. 보게. 저기 뱅크 기사님도 대충 늘어져서 쉬고 계시지 않나. 그러니 자네도 좀 편하게 있게.”
한참을 안개 너머를 지그시 노려보던 동료 병사도 이내 ‘에라, 모르겠다.’하고 외치며 찰스처럼 벽에 기대고 서서는 쥐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모닥불에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쐐애액-
그 순간.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을 쬐고 있던 병사가 황급히 꾸벅꾸벅 졸고 있는 찰스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자네 무슨 소리…….”
퍼억-
병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터져 나가는 피륙음과 함께 병사의 머리에 한 자루의 도끼가 박혀 들었다. 부지불식간에 병사가 힘없이 쓰러졌다.
우당탕탕-
병사가 쓰러지며 간이 화로를 덮쳤고, 화로가 쓰러지면서 안에서 타고 있던 장작들이 바닥으로 흩어지며 불길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그 소란에 잠에서 깨어난 찰스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자 머리에 도끼가 꽂혀 즉사한 동료와 바닥을 불태우고 있는 불길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저, 적습이다!”
찰스가 황급히 창틀에 고개를 내밀고는 아래에서 대기 중이던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저, 저기 봐!”
아래쪽에서도 난리가 났다.
찰스의 외침에 황급히 안개 너머를 바라보자 거뭇거뭇한 인영과 함께 눈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대규모의 군세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디 군이야?”
“뭐 보이는 깃발 같은 거 없어?”
정체불명의 군세의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높게 솟아오른 망루보다도 컸으며, 덩치는 작은 동산을 보는 것처럼 거대했다.
네 발로 걷는 그것은 온몸이 적갈색의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코가 길쭉하고 입에서는 두 개의 송곳니가 산양의 뿔처럼 길게 솟아나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다.
놈을 본 순간 이곳 경계초소를 담당하고 있던 기사 뱅크는 문득 오래전 그가 수학했던 아카데미의 도서관에서 본 오래된 서적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로되.
그것은 백수의 왕이로다.
아로되.
그것은 대지의 모신이니라.
아로되.
그것은 멸망의 짐승일지니.
경배하라. 찬양하라. 두려워하라.
살고 싶다면.
도망쳐라.
놈이 자신의 기다란 코를 채찍처럼 휘둘러 순식간에 망루를 무너뜨리는 비현실적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뱅크는 탄식하듯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베히모스…….”
얼어붙은 동토를 배회하는 마수.
뱅크는 그제야 정체불명의 군세의 정체를 깨달았다.
어떻게 3군이 지키는 비프로스트 요새를 뚫고 내려온 것인지는 몰라도 야만족들이 침공한 것이 분명했다.
“아, 알려야 해…….”
황급히 정신을 차린 뱅크가 도망치기 위해 말을 찾았으나 그 많던 말들은 이미 병사들이 타고 도망쳐 버린 지 오래였다.
말을 타고 멀어져가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뱅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상관을 버리고 저들끼리만 도망치다니! 치사한 새끼들!”
쿵- 쿵-
그러는 와중에도 마수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뱅크는 이를 악물고 검을 뽑아 들었다. 비록 상대조차 되지 않겠지만 이대로 가만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빌어먹을. 와라. 와라! 내 이름은 뱅크 캐드너! 자랑스러운 프락시온 제국의 기사다!”
공포를 떨쳐내려는 듯이 소리친 뱅크가 코앞까지 도달한 베히모스를 향해 달려나가려던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웃기는 꼴통이네.”
깜짝 놀란 뱅크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일단의 기마대가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짐승 가죽을 뒤집어쓴 그들은 뱅크를 마치 동물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냐!”
뱅크가 소리치자 무리 중 유독 눈에 띄는 하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여인이 말을 몰아 뱅크의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나? 제1 기병대장. 트리스탄.”
“……뭐?”
정말로 대답해 줄 줄은 몰랐는지 뱅크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묻자 트리스탄이 피식 웃고는 말했다.
“포로는 이 녀석뿐이다. 나머지는 쫓아가서 사살해.”
트리스탄의 지시가 떨어지자 기병들이 괴상한 기합성을 내지르곤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체 무슨…….”
얼이 빠진 뱅크가 멍하니 트리스탄을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겁도 없이 베히모스에게 달려드는 그 꼴통 짓 때문에 산 줄 알아. 따라와.”
말하곤 그녀가 말을 몰아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뱅크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자.
퍼억-
그의 발 앞에 화살 한 발이 내리꽂혔다.
“안 따라올 거야?”
트리스탄이 뚱한 표정으로 묻자 뱅크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소리쳤다.
“가,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