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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90화 (90/183)

공작이 회귀함 90화

동부 페르시모 요새.

“어구구…… 허리야…….”

초소 위에서 경계 근무를 서던 선임병 덱은 제 허리를 두드리며 신음성을 내었다. 이에 후임병 젤로가 그런 덱을 걱정스레 바라보며 물었다.

“허리가 많이 안 좋으세요? 어제 집에 가셔서 뭘 하셨길래 이렇게 끙끙 앓으세요?”

젤로의 물음에 덱이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인마. 너도 결혼해 봐. 아주 그냥 밤마다. 어휴…… 어마어마하다?”

덱의 말에 젤로의 얼굴이 일순간 잘 익은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아니…… 그…….”

할 말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젤로의 모습에 덱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으며 젤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콕콕- 찔렀다.

“하하하. 뭘 그런 거로 부끄러워하냐.”

“놀리지마세…… 응?”

그렇게 덱과 투닥거리던 젤로는 문득 지평선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비가 오려는 건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레 오한이 들기 시작하며 이유 모를 찜찜함이 밀려오자 젤로는 저도 모르게 먹구름이 밀려오는 지평선 너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덱 역시 젤로가 자신의 장난을 받아주지 않고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자 이상함을 깨닫곤 마찬가지로 젤로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지평선 너머로 밀려오는 먹구름과 그 아래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스멀스멀 밀려오는 것이 보였다.

척 보기에도 수상해 보이는 검은 연기는 불길한 기운과 함께 빠르게 밀려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 연기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윽고 검은 연기가 눈으로 또렷하게 보일 정도까지 다가왔을 때 연기 속에서 꿈틀거리던 것의 정체를 깨달은 덱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억!”

덱의 눈이 부릅떠지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는 우인족을 필두로, 생전 처음 보는 온갖 해괴한 괴물들이 검은 연기 속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콰당-

어림잡아도 족히 수천은 훌쩍 넘어 보이는 괴물들의 군세에 다리에 힘이 풀린 젤로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덱 선임병님…….”

젤로가 떨리는 목소리로 덱을 부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덱이 그런 젤로를 내려다보았다.

일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고.

“저, 적습!”

“적습이다아아아!”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울려 퍼졌다.

* * *

댕댕댕-

긴급 상황을 알리는 종소리가 쉼 없이 울리고 페르시모 요새에 주둔 중이던 병사들이 재빠르게 성벽 위로 올라갔다.

요새를 지키는 사령관 옴닉스 백작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무슨 상황인지조차 듣지 못하고 제 수하들과 함께 황급히 성벽 위로 향했다.

그리고 성벽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한탄과도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허어…….”

지평선을 가득 메운 괴물들.

살아생전 처음 보는 온갖 해괴한 것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는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괴물이 있었다.

선두에서 달려오는 거대한 몸집의 우인족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그 괴물은 하체는 산양, 상체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이마에는 길쭉한 산양의 뿔이 자라난 이종족의 모습이었으며 몸집은 가히 산을 하나 그대로 옮겨 놓은 것만 같이 거대했다.

검은 연기를 휘감듯 그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괴물이 성벽 위에 선 병사들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인간들이여.]

괴물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쩌렁쩌렁하게 주변 일대에 울려 퍼졌다.

[이 몸은 바르바토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몇몇 이들은 제 귀를 막고 얼굴을 한껏 찌푸릴 정도였다.

[옥죄어오는 절망의 지배자이니라.]

압도적인 존재감을 내뿜는 바르바토스의 모습에 페르시모 요새의 병사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바르바토스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즐기듯 내려다보던 바르바토스가 돌연 박쥐의 그것을 닮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치더니 허공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스멀스멀 검은 연기가 내뻗은 바르바토스의 손을 휘감고 이내 거대한 낫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바르바토스는 그 거대한 낫을 손으로 움켜쥐더니 쿵- 하고 땅을 내리찍었다.

땅이 흔들리고 병사들이 공포로 물든 비명을 내질렀다.

[약속의 시간이 다가왔다. 심연의 종주께서 도래하실 날이 다가왔노라.]

괴물.

바르바토스가 검은 연기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고했다.

[이 땅의 피조물들이여.]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바르바토스가 거대한 낫을 손에 쥔 채로 허리를 한껏 뒤로 비틀었다.

[죽음으로 심연의 종주를 맞이하라.]

동시에.

바르바토스의 일격이 페르시모 요새의 성벽을 강타했다.

꽈아아앙─

* * *

“자세히 설명해 보거라. 마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갑작스러운 마왕의 등장을 믿지 못하겠는지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물었다. 그러자 관료는 떠듬떠듬 말을 더듬으며 자신이 들었던 전보를 그대로 전했다.

“자, 자세한 것은 저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다, 다만 북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왕이 심연의 종주를 언급하며 동부로 진격 중이며 북부 1개 영지, 동부 1개, 요새 2개 영지를 휩쓸고 있으니 속히 지원을 바란다는 전보만 왔을 뿐입니다.”

관료의 말이 끝나자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초조한 얼굴로 발타자르와 슈텔리앙 후작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볼 뿐이었다.

그동안의 자신만만한 모습은 오간 데 없는 한심한 모습이었지만 이것이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본 모습이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내보이는 황태자를 바라보던 슈텔리앙 후작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발타자르가 그보다 한발 먼저 나서며 말했다.

“여기서 이야기할 사안은 아닌 듯합니다. 마침 신료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속히 회의장으로 향하시어 대책 회의를 논의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정신을 차린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자네 말이 옳네. 슈텔리앙 후작! 내가 직접 회의를 주관하겠다. 지금 즉시 신료들을 소집하라.”

황태자의 명에 슈텔리앙 후작은 힐끔 발타자르를 바라보더니 이내 아르세우스 황태자를 향해 고개 숙이며 답했다.

“바로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그러곤 신료들을 소집하기 위해 연회를 즐기고 있던 귀족들을 향해 떠나갔다.

* * *

북부에서 발호한 바르바토스는 동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해 나갔고 동부의 영지들은 바르바토스의 군세에 맞서 격렬히 저항했지만 큰 소득 없이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황궁에는 연신 동부 영주들의 패전 소식이 날아들었고 황태자의 주도하에 모인 여러 관료와 대신들은 일에 대한 대책을 내놓기보다는 서로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다.

“다들 들었다시피 마왕이 등장했네. 동부는 연패를 거듭 중이고 현재 중앙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이지. 어찌하면 좋겠는가? 기탄없이 의견들을 말해보게.”

눈치만 보는 신료들의 모습이 답답했는지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말했다. 그럼에도 신료들은 눈치만 볼 뿐 선뜻 의견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었다.

“허어. 다들 아무 생각도 없단 말인가? 지난번 회의 때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왜 지금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것인가?”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질책에도 신료들은 고개를 숙일 뿐 말을 꺼내는 이는 없었다.

“학부대신. 자네가 말해보게.”

결국, 참다못한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학부대신 안탈레우스 비오르체를 콕 집어 거론하자 안탈레우스가 몸을 흠칫거리더니 말을 더듬거렸다.

“어…… 음. 제 생각으로는…….”

그때, 자비에고 주교가 나서며 말했다.

“전하. 소신이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자비에고 주교의 등장에 안탈레우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지그시 자비에고 주교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발언을 수락했다.

“말하게.”

“감사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선 잠시 상황을 지켜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상황을 지켜본다?”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물음에 자비에고 주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어갔다.

“그렇습니다. 마왕이 발호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사실 현재 동부에서 날뛰는 존재가 정말 마왕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것보다는 프리드리히 공작의 행보를 지켜본 이후 움직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사료 되옵니다.”

“그러다 그 존재가 정말 마왕이라면? 그렇다면 어찌할 생각인가?”

황태자가 묻자 자비에고 주교가 그것이 무슨 문제냐는 듯이 답했다.

“설령 동부에서 난동을 부리는 존재가 정말 마왕이라고 한들 그동안 동부에서 충분히 힘을 기른 프리드리히 공작가라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만약 막아내지 못한다면 이는 제국이 총력을 기울여야 할 사안이니 지금 당장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라 사료 되옵니다.”

자비에고 주교의 대답에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그러니까. 주교의 말은 우선 프리드리히 공작으로 마왕의 전력을 파악해 보자 이 말인가?”

황태자의 물음에도 자비에고 주교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공작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에 황태자가 이번에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태자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잠시 자비에고 주교를 바라보았다.

순간 자비에고 주교와 발타자르의 시선이 교차하자 자비에고 주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하군.’

발타자르는 자비에고 주교의 속내가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아마 그는 동부에서 날뛰는 바르바토스가 정말로 마왕이기를 속으로 간절하게 기도 중일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번 발타자르의 암습 건으로 선제후들을 압박할 것을 요청했던 그이니만큼 이번 일은 절호의 기회로 보일 것이었다.

짐작하건대 동부가 바르바토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도래할 경우, 자비에고 주교는 지원을 핑계로 프리드리히 공작가 혹은 동부의 영주들에게 하나둘씩 목줄을 채울 심산일 것이었다.

“제 생각도 외무대신의 의견과 일치합니다.”

발타자르가 자비에고 주교의 손을 들어주는 발언을 하자 자비에고 주교를 비롯한 그의 파벌원들은 화색이 되었고 슈텔리앙 후작을 비롯한 황제파의 귀족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감히 말을 꺼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할 수 있을 리가.

황태자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데다 그 세력 또한 막강한 발타자르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가? 그렇다면…….”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잠시 사태를 지켜보는 것으로 결정지으려던 순간. 발타자르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황태자의 말을 끊어내었다.

“다만.”

자신의 말을 끊어냈음에도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기분 상한 기색 하나 없이 발타자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뜬금없는 발타자르의 말에 황태자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좋은 기회라? 그게 무슨 뜻인가.”

황태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주변의 신료들을 둘러보며 천천히 원을 그리듯 신료들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동안 선제후들은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왔습니다. 그 결과.”

가볍게 한 바퀴를 돈 끝에 발타자르가 재차 황태자의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중앙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불온한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황제파, 대신파 할 것 없이 신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세우스 황태자까지도 말이다.

“심지어 황실의 위기에도 침묵하였지요.”

발타자르의 발언에 자비에고 주교를 비롯한 그의 파벌원들이 불편해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발타자르는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현재 동부는 마왕으로 추정되는 존재의 준동으로. 그리고 남부는 대수림의 몬스터들이 대이동을 시작하며 쉬이 군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눈치 빠른 신료들은 슬슬 발타자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깨닫고는 경악한 표정으로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따라서.”

발타자르가 황태자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황태자 전하를 비롯하여 이 자리에 모인 신료들께 제안하는 바입니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가운데 발타자르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부디 서부를 평정하시고 무너져내린 황실의 위엄을 바로 세우심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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