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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89화 (89/183)

공작이 회귀함 89화

자비에고 주교와 그 일파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발타자르는 입궁 전에 그가 따로 지시한 임무를 끝마치고 나서야 뒤늦게 입궁한 가웨인을 발견했다.

발타자르는 자비에고 주교에게 양해를 구한 후 곧장 가웨인에게로 향했다.

훤칠한 키에 입가에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가 인상적인 가웨인이 등장하자 귀족 영애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 하나둘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들보다 발타자르의 움직임이 한 발 더 빨랐다.

발타자르와 마찬가지로 군복을 입고 있는 가웨인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이렇게 보니 신색이 훤하군.”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은 제 모습이 어색한지 손가락으로 제 목을 잠시 긁적였다.

“그렇습니까? 신시아 양이 연회에 참가하는데 조금이라도 꾸미고 가야 한다고 성화였던지라 붙잡혀서 이것저것 꾸며지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보기 좋다네. 그보다 지시한 것은?”

발타자르의 물음에 가웨인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답했다.

“시간에 늦지 않게 최대한 서두르라고 언질해 두었으니 제시간에 연락이 올 겁니다.”

“수고했네.”

“아닙니다. 한데 무슨 연유로 황태자 전하께서 연회를 개최한 것인지 짐작 가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가웨인이 묻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말했다.

“글쎄…… 자비에고 주교도 아는 것이 없는 눈치던데 딱히 짐작 가는 것은 없군.”

방금 전까지 자비에고 주교와 그 파벌원들에 둘러싸여 이야기를 나누고 왔지만 하나같이 시시껄렁한 잡담일 뿐이었다.

당장 제국에 큰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고, 공석이 된 관직에 대한 논의는 슬슬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 같았으니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소집한 것은 아닌 듯했다.

다만. 강제하다시피 발타자르를 이 연회에 초대한 것으로 보아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무언가 중대한 결심을 한 것이라는 정도만 짐작할 뿐이었다.

“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리에게 나쁘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걸세.”

마침 술이 가득 찬 잔을 쟁반 위에 들고 오가던 시종이 곁을 지나가자 발타자르가 그에게서 술잔 두 개를 받아 들고는 하나를 가웨인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든 가웨인이 발타자르와 잔을 맞부딪치며 말했다.

“일이 어찌 흘러가든 장군께서 잘 해결하시겠죠. 그보다 북부에는 언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힐끗 저 멀리 보이는 태양의 궁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세.”

채앵-

재차 잔과 잔이 부딪치고 술잔이 오갔다.

* * *

“철의 제국. 프락시온의 적법한 계승자. 아르세우스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귀빈들께서는 예를 갖추시길 바랍니다.”

연회의 분위기가 한껏 달아오를 무렵.

시종이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등장을 알리고,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선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등장을 바라보았다.

황실기사단장 드미트리와 이번에 새로이 법부대신의 자리에 오른 안티오플 슈텔리앙 후작을 위시한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윽고 단상 위에 선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자신을 주목하는 귀족들을 한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다들 연회는 잘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군.”

말하며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시종을 바라보자 시종이 눈치 빠르게 술이 가득 찬 술잔을 아르세우스 황태자에게 건네주었다.

“자, 연회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기 위해 건배하세.”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프락시온 제국에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선창하자 귀족들이 일제히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그랬듯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미리 말을 맞춰 놓았던 것처럼 한목소리로 외쳤다.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철의 제국이여 영원하라!]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 * *

연회의 시작을 알린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단상에서 내려오자 발타자르와 자비에고 주교가 차례로 아르세우스 황태자를 향해 다가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발타자르와 자비에고 주교가 일제히 아르세우스 황태자를 향해 인사를 올리자 황태자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반갑군. 특히 발타자르 공작은 오래간만에 봐서 그런지 신수가 훤하구먼.”

하하. 웃으며 말한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발타자르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얼굴 한번 보기 참 힘들구먼.”

“송구합니다.”

“아니, 아닐세. 자네가 날 위해 그런 것임을 모르지 않는데 송구스러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겠지.”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말하는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눈동자에는 호의가 가득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자비에고 주교가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두 분의 모습이 무척이나 보기 좋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발타자르 공작을 아끼시는 마음이 여기까지 전해지니 질투가 날 정도입니다.”

하하. 웃으며 말하는 자비에고 주교의 말에 아르세우스 황태자 샐쭉이 발타자르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러면 뭐하는가. 정작 당사자는 이리 시큰둥한데.”

그러자 발타자르가 슬쩍 시선을 돌리며 황태자의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피해내고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말을 꺼냈다.

“그보다. 절 부르신 이유에 대해서 들을 수 있겠습니까?”

발타자르가 묻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넨 여전하군. 좋네. 나 역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하니 말일세.”

말하곤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발타자르, 자비에고 주교 그리고 슈텔리앙 후작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갑작스레 연회를 개최한 것은 한가지 공표할 것이 있기 때문이라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비에고 주교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말했다.

“섭정직을 부활시킬 생각이라네.”

섭정.

다음 대 계승권자 혹은 황제가 정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거나, 병으로 정사를 돌보지 못할 때 황제를 대신해서 통치권을 받아 국가를 다스리는 자.

상황에 따라 황제와 동일시되는 직책으로, 천 년을 이어온 제국 역사에서도 이 섭정이 등장한 것은 몇 번 되지 않았다.

“섭정…… 말입니까?”

섭정직을 부활시키겠다는 그 말에 자비에고 주교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정황상 누가 섭정이 될지는 뻔했다.

선제후.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공작.

그를 섭정직에 올리려는 것이 분명했다.

이에 자비에고 주교가 이것에 대해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따지기 시작하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섭정직을 부활시키려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비록 현재 제국의회가 노력하여 국정을 잘 운영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까지 통치자를 공석으로 둘 수는 없는 노릇. 몇몇 선제후들의 견제로 다음 대 황제 선출이 미뤄졌으니 그 공백 기간 동안 제국을 통치할 이가 있어야지 않겠는가.”

“하오나 선제후들이 이를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만…….”

자비에고 주교가 문제점을 지적하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 치들이 감히 이것을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말하는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적대감이 가득했다.

‘이건…… 나쁘지 않군.’

자비에고 주교는 발타자르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발언에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황태자가 발타자르를 섭정직에 올리려는 이유를 제쳐 두고서라도 발타자르가 섭정직에 올랐을 때의 상황만을 놓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자비에고 주교가 나서서 발타자르가 섭정직에 오르는 것을 지지해야 할 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 이대로 발타자르가 섭정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각 지방의 선제후들은 본격적인 견제를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발타자르가 원하지 않더라도 선제후들을 찍어누르기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비에고 주교가 원하던 상황이었으니 발타자르가 섭정직에 오르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또한, 자신에게 향하던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적의를 선제후 측으로 돌릴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물론 발타자르에게 권력이 더 집중되는 것은 그 또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선제후들을 상대하는 동안 분명 틈이 생길 테니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굳게 결심하신듯하니 소신은 뜻에 따르겠습니다.”

손익계산을 끝마친 자비에고 주교가 찬성표를 던졌다.

슈텔리앙 후작과는 이미 사전에 말을 맞춰둔 상황이기에 이제 남은 것은 발타자르의 의사뿐이었다.

하지만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태도로 보건대 발타자르가 섭정직을 거절한다고 해도 강제로라도 일을 추진할 것처럼 보였다.

“주교가 저리 말하는데 공작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물음에 가만히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발타자르가 팔짱을 끼더니 검지로 툭툭- 제 팔뚝을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고민할 게 무엇인가? 어서 하겠다고 말씀드리게나.”

옆에서 자비에고 주교가 섭정직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현명한 선택 바라오.”

이어서 슈텔리앙 후작 역시 간접적으로 섭정직을 권했다.

“공작. 다들 이리 말하는데 뭘 그리 망설이는 것인가?”

아르세우스 황태자를 비롯하여 발타자르, 슈텔리앙 후작, 자비에고 주교까지.

이들은 실질적인 중앙의 통치자들이었다.

이들 중 발타자르를 제외한 모두가 그의 섭정직을 찬성하고 있는데 무엇을 이리 망설이는지 아르세우스 황태자로서는 답답하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는 듯 보이던 발타자르가 팔짱을 풀자 그가 결심을 내렸다고 판단한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발타자르의 입을 주목했다.

“알겠습니다. 다들 이리 말씀하시니…….”

발타자르가 막 섭정직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급보! 급보입니다!”

관료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오른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참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 관료를 향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호들갑이냐!”

덕분에 자연스레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관료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촌각을 다투는 일이기에…….”

관료가 변명하듯 말하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그런 관료에게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놈 말대로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큰 벌을 내릴 것이다.”

흠칫- 몸을 떤 관료가 힐끔- 황태자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마, 마왕…… 마왕이 등장했습니다. 북부의 올리오 지방에서 등장하여 현재 주변 일대를 휩쓸며 동부로 진격 중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 강림하여 한동안 힘을 회복하고 있던 마왕이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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