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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88화 (88/183)

공작이 회귀함 88화

황궁의 성문 앞에 소란이 일었다.

화려한 사두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다수의 병사와 기사들이 황궁의 성문 앞에 서 있고 그들과 대치하듯 창을 X자로 교차시키며 앞을 막아서는 근위대가 신경전을 벌였다.

근위대가 앞을 막아선 채 길을 열어줄 기미조차 내보이지 않자 호위를 책임지던 기사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어허! 네놈들이 지금 어떤 분의 앞을 막아서고 있는지 아느냐! 바로 학부대신 안탈레우스 비오르체 님이시다!”

기사의 말에 근위대 장교가 힐끗 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호위들을 대동하고 입궁하는 것을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따라서 무장을 해제하지 않는다면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단호한 근위대 장교의 말에 그에게 말을 걸었던 기사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융통성 없는 놈 같으니라고. 누구 지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시를 내린 이가 학부대신님 보다 높은 이일 것 같으냐!”

기사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얼마 전 벌어진 역모 사건으로 그 세가 위축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학부대신의 행렬이었다.

그런 행렬을 막아서는 근위대의 답답한 행태에 속으로 울화통이 터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함부로 근위대에게 손찌검을 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변해 있었다.

여기서 자칫 근위대에게 잘못 손을 대었다가는 학부대신이 자그마한 실수라도 벌이기를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는 황제파의 귀족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게 분명했다.

따라서 기사는 언성을 높이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드르륵-

“무슨 일이기에 걸음을 이리 지체하는 것이냐?”

그때, 마차의 창문이 열리며 학부대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근위대가 융통성 없이 앞을 막아서는지라.”

기사가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자 마차 안에서 얼굴을 내민 학부대신이 상당히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모를 리 없을 테고. 어서 길을 열지 못하겠느냐? 촌극을 다투는 아주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입궁하는 것이니 속히 성문을 열거라.”

“그렇게 말씀하신들 호위들을 대동하신 채로는 입궁하실 수 없습니다.”

근위대 장교가 단호히 답하자 기사가 노성과 함께 칼을 뽑아 들려는 기색을 보였다.

“네놈이 정녕 후환이 두렵지 않은 것이로구나!”

그 순간.

근위대 장교가 갑작스레 그에게서 한걸음 물러나더니 근위대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교차시켰던 창을 거두고는 양옆으로 물러났다.

이에 기사는 이제야 말귀를 알아먹는다며 흡족한 표정으로 성문을 향해 말을 몰았다.

“물러서십시오.”

한데, 길을 열어준 것이라 생각했던 근위대 장교가 검을 뽑아 들며 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서십시오.”

“뭐?”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었던 기사가 황당한 얼굴로 되묻자 근위대 장교가 재차 근위대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에 근위대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학부대신의 마차와 호위 병사들을 길옆으로 이동시켰다.

“이, 이놈들이! 단체로 실성을 한 것이냐!”

이 황당한 사태에 학부대신이 노성을 터뜨렸지만, 그에게 신경을 쓰는 근위대는 아무도 없었다.

척척척-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지는 군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할 무렵.

물경 수백에 달하는 호위 병력을 대동한 육두마차가 황궁 앞에 도달했다. 그러자 근위대 장교가 마차를 향해 주위가 떠나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경례를 올렸다.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제국에 영광을!]

근위대 장교를 비롯한 병사들이 일제히 마차를 향해 경례를 올리고 그 군기 가득한 절도 있는 모습은 흡사 황족을 대하는 듯 한없이 극진했다.

이윽고 아무런 제지도 없이 행렬이 입궁하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기사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버럭 소리 질렀다.

“저들은 뭔데 저리 많은 무장 호위를 대동해도 아무런 제지 없이 통과하는 것이냐!”

기사의 물음에 근위대 장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기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몰라서 물으십니까?”

말하며 근위대 장교는 이제 막 성문 안으로 들어서던 행렬의 선두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수가 들고 있는 포효하는 용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발타자르 공작 각하의 행렬입니다. 그분의 행렬은 어떠한 경우도 막아서지 말라는 황태자 전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만. 이게 불합리하다고 생각되신다면 황태자 전하 혹은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 직접 항의해 보시지요.”

근위대 장교의 말에 기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제도에 거주하는 귀족들에게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주최하는 연회의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이 초대에 불응하는 이는 없었다.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발타자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초대에 불응하려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지 않겠다면 직접 찾아가겠다는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전언에 발타자르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제도의 모든 귀족이 황궁으로 향했고 황궁은 찾아온 귀족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었다.

* * *

황궁의 성문에서 호위들을 대동하는 것을 제지당한 다른 귀족들과 달리 수백에 달하는 호위들을 대동한 채로 입궁한 발타자르의 행렬에 귀족들의 이목이 단박에 집중되었다.

“허허. 발타자르 공작의 위세가 대단하다고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그려.”

누군가 발타자르의 행렬을 바라보며 감탄을 터뜨리자 다른 누군가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듣기로는 황태자 전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더군요.”

“하긴. 지난번에 황제파의 귀족 하나가 멋모르고 황태자 전하의 부름에 불응하는 발타자르 공작 각하에게 벌을 내려야 한다는 말 한마디를 꺼냈다가 그대로 변방으로 좌천되었다지 않습니까.”

“그럴 만도 하지요. 역모를 저지시킨 일등공신인 데다 황태자 전하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권신이 아닙니까. 거기다 황태자 전하께 누가 될지도 모른다며 내무대신의 자리도 거절하고 저택에 칩거하고만 있으니 예뻐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겠지요.”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가운데 발타자르가 타고 있던 육두마차가 연회가 열리는 정원의 앞에 도착했다.

이윽고 기사 하나가 말에서 내리며 마차로 다가와 마차의 문이 열자 그 안에서 발타자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정하게 빚어 넘긴 연보랏빛 머리칼과 황금빛 눈동자.

화려하게 치장된 연회복을 입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군복을 입은 발타자르가 마차에서 내려 연회가 열리고 있는 정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귀족들은 태연하게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회를 즐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자세히 바라보면 시선은 발타자르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모든 시선이 발타자르에게로 향하는 가운데 발타자르는 그런 시선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천천히 정원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몇몇 이들이 그런 발타자르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발타자르에게 다가서는 순간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들의 몸을 짓누르며 발타자르에게로의 접근을 저지했다.

그때, 발타자르에게 접근하려 했던 이들이 느꼈던 기운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웃는 얼굴로 발타자르에게 접근하는 이가 있었다.

“발타자르 공작!”

반갑다는 듯이 웃으며 다가오는 이.

자비에고 주교가 다가오자 발타자르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주교.”

“여기서 이렇게 보게 되니 무척이나 반갑구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발타자르의 물음에 자비에고 주교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일세. 원래 주인공은 항상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아니겠는가?”

자비에고 주교가 짐짓 호탕한 웃음을 짓고는 발타자르를 제 파벌들이 있는 자리로 이끌었다.

“자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저리로 가세. 자넬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네.”

목적이 빤히 보이기는 했지만, 발타자르는 거절하지 않고 자비에고 주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 모습을 본 귀족들은 혹시 발타자르와 자비에고 주교가 손을 잡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며 머릿속으로 손익계산을 따지기 시작했다.

발타자르가 황제파와 대신파 중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중앙 정계의 권력 구도가 뒤바뀔 것이 분명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보다 지난번에 내가 한 제안은 생각해 보았는가?”

발타자르와 제 파벌이 자리 잡은 곳으로 향하던 자비에고 주교가 슬며시 운을 떼며 물었다.

“글쎄…….”

이에 발타자르는 확답 대신 의뭉스레 답하기를 피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이런 일은 속도가 중요하지 않은가? 쉽지 않은 결정이겠지만 가급적이면 최대한 빨리 결단을 내려주기 바라네.”

은근슬쩍 자비에고 주교가 답을 재촉하자 그의 조급함을 느낀 발타자르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어지간히도 급했나 보군.’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각 지방에서 왕으로 군림하는 선제후들은 대신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에도 그들의 통제에 따르지 않던 존재들이었다.

당연히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지만, 선제후들은 하나같이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고 대신들에게 쉽게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선제후들을 찍어누를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찾아왔으니 그로서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리라.

뭐, 정확히 말하자면 선제후들에게 가지고 있던 앙심을 갚는 것은 덤이고 본론은 이번 기회를 이용해 선제후들의 목줄을 쥐고 그들을 이용하려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자비에고 주교가 계획하는 그림에는 발타자르의 등에 검을 꽂아 넣는 것까지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었다.

“조만간 답을 주겠네.”

발타자르의 대답을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 자비에고 주교가 웃으며 말했다.

“좋은 대답 기다리겠네. 자, 도착했군.”

자리에 도착하자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원들이 하나둘씩 발타자르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곧 그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 * *

아르세우스의 거처 태양의 궁.

“태자 전하. 발타자르 공작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발타자르의 도착 소식을 수하에게 전해 들은 슈텔리앙 후작이 창가에 기대어 연회가 열리고 있는 정원을 바라보던 아르세우스 황태자에게 말을 전했다.

“그런가?”

그 말에 굳어 있던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표정이 펴지며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그 극적인 표정 변화에 슈텔리앙 후작이 속으로 걱정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들어 발타자르에 대한 황태자의 총애가 극심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이냐 하면, 한 몸 바쳐가며 오랜 세월 황태자에게 충성했던 한 귀족이 황태자의 부름에 불응하는 발타자르에게 벌을 줘야 한다고 의견을 내민 것만으로 변방으로 좌천시킬 정도였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대신들의 역모로부터 황실을 구원해 준 것도 발타자르였고, 긴 시간 동안 대신들에 억눌려 있던 황태자가 제 목소리를 온전히 낼 수 있게 만들어준 것도 발타자르였다.

그러니 저리 총애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심지어 며칠 전부터 거론하던 제안을 생각하면 맹목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하지만 말을 잘못 꺼냈다가는 황태자의 오른팔 격인 자신이라도 변방으로 좌천된 귀족 꼴이 날 수도 있기에 발타자르에 대한 총애를 조금 거두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을 섣불리 꺼낼 수가 없었다.

“한데 발타자르 공작이 현재 자비에고 주교와 그의 파벌원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합니다만…….”

“자비에고 주교가 일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것이겠지.”

슬쩍 황태자를 떠보는 말을 건네보았지만 역시나였다.

황제파와 대척점에 서는 자비에고 주교와 함께하고 있음에도 일말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그보다 발타자르 공작이 오늘 내가 할 공표를 듣는다면 깜짝 놀라겠지?”

흡사 어린아이가 장난치기 직전의 표정과 같은 얼굴로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묻자 슈텔리앙 후작이 망설이며 대답했다.

“저는 아직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만…….”

슈텔리앙 후작의 말에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그 소리인가? 그는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고 내 누차 말했지 않은가. 지난번 자네가 제의한 내무대신 건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발타자르 공작이 권력에 욕심이 있었다면 그 자리를 쉽게 거절했겠는가?”

“그렇다고는 해도 그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아닐는지 심히 걱정됩니다만.”

“자네 걱정은 알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게. 발타자르 공작은 충신 중의 충신이니까.”

여전히 탐탁잖아 하는 슈텔리앙 후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말했다.

“자, 가세. 어서 가서 새로운 섭정의 등장을 알려야지 않겠는가?”

그러곤 들뜬 기색으로 앞서 걸어 나가자 슈텔리앙 후작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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