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87화
“그래서. 이자는 대체 뭐 하는 자였어요?”
레티시아가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지그문트의 빈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용사.”
발타자르의 대답에 레티시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사? 그 동화 속에 나오는 용사요?”
“그렇네. 정확히는 타락한 용사 중 한 명이지.”
레티시아는 발타자르가 자신에게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있던 자가 용사라는 것도 황당한데, 타락한 용사 중 하나? 그렇다면 용사가 여럿 있다는 소린가요?”
발타자르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걸 믿으라고요?”
“믿고 안 믿고는 자네 자유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방금 전 레티시아가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불태워 버린 사내가 용사라는 것도 황당하고 그 용사가 한둘이 아니며, 타락까지 했다는 소리도 황당했지만 제일 황당한 것은 이 웃기지도 않는 농담을 진담처럼 이야기하는 발타자르였다.
“하. 그래요. 용사라고 쳐요. 그런데 그 용사를 왜 제거한 건데요?”
“말했잖나. 타락한 용사였다고.”
“……진담이에요? 농담이죠?”
레티시아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묻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진짜로? 정말 용사였다고요?”
발타자르는 레티시아가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해 하는 것을 이해했다.
“얼마 전 드리운 이변을 기억하는가?”
“사흘 동안 해가 사라졌던 그 이변요?”
“그렇네. 그 이전에 근래에 유례없던 유성우가 쏟아지던 것은?”
발타자르의 물음에 레티시아는 유성우가 쏟아지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에르제 황녀와 유성우를 구경했던 것도.
“기억나요.”
“그 유성우와 함께 용사들이 이 땅에 소환되었고, 사흘의 낮을 휘감은 어둠 속에서 마왕들이 강림하였네.”
“하지만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는데요?”
레티시아의 말에 발타자르가 비웃음을 한껏 담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하지. 타락한 사제들은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지 오래일세. 그런 그들이 이제 와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당신 말이 사실이라고 쳐요. 그런데 당신 말대로라면 용사가 이 땅에 소환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사이에 타락을 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자 발타자르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용사들은 이 세계의 존재들이지. 본래는 평범한 이들이었다네. 그러나 그들은 사후 천신과의 계약에 의해 마신의 강림을 막기 위해 이 땅을 찾아오게 되었다네. 하지만 생각해 보게. 천신이 어떤 대가를 내걸었는지는 몰라도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라는 계약을 받아들인 이가 정상적이라고 보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레티시아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평민이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다 죽었다고 치자.
그런데 그때 천신이라는 이가 나타나 어떤 대가.
가령 소원을 들어준다든가 하는 조건을 내걸며 이 세계로 가 마신의 강림을 저지해 달라는 제안을 내민다면 어찌 반응했을까? 하고 말이다.
“정상적이라고 보기는 힘들겠네요.”
“그렇지. 천신은 그런 이들을 용사랍시고 계약을 맺어 이 땅에 소환시키려 했네. 하지만 아무리 비범한 힘을 준다고 해도 일반인이 이 세계로 소환되었을 때 살아남을 확률은 극히 낮다고 판단한 천신은 튜토리얼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용사들을 이 땅에 소환시키기에 앞서 훈련 시켰다네.”
튜토리얼이라는 공간은 또 하나의 세계였다.
천신은 용사들에게 10년의 시간 동안 살아남을 것을 지시했고 용사들은 가혹한 세계에 내팽개쳐졌다.
아무리 계약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죽음이 만연한 세계에 자신들을 내팽개친 천신을 용사들이 곱게 볼 리가 없었고 그렇게 생겨난 것이 변절자 무리였다.
“말이 훈련이지 생명체가 살아가기에 무척이나 혹독한 세계에 무작정 던져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네. 그 가혹한 환경 속에서 용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10년에 걸쳐 죽이는 법을, 강해지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렇게 천신이 말한 10년의 시간이 지남과 동시에 용사들은 이 땅에 소환되게 되었지.”
튜토리얼이 끝나고 이 땅에 소환된 용사들은 튜토리얼에서 쌓아온 힘을 모두 잃었지만 그렇다고 10년이란 시간 동안 쌓아온 경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정상적인 이들이 혹독한 환경에서 10년을 살아남았네. 그리고 이전의 삶에선 경험해 보지 못한 강력한 힘을 손에 쥐어보았고, 휘둘러도 보았지. 한데 그런 이들이 순순히 천신의 뜻대로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는 것에만 힘을 쓸 것 같은가? 안 그래도 천신에 대한 인식이 나쁜 상황에서?”
회귀 전에도 용사들은 사고를 몰고 다녔으며, 그로 인해 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용사들이 전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사람을 살리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이도 있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강대한 힘이 이 땅의 주민들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결여된 인간이었고, 정상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발타자르는 품에 안으면 큰 힘을 안겨줄 용사의 존재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이런 정보는 대체 어디서, 아니, 제게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는 목적이 뭔가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레티시아가 침중한 표정으로 묻자 발타자르가 툭툭- 검집을 두드리며 말했다.
“조만간 북부에서 마왕이 모습을 드러낼 걸세. 고위 서열의 강력한 힘을 지닌 마왕이 말일세. 북부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지만, 고전을 면하기는 힘들 걸세. 그때 난 제국의회에서 마탑을 북부에 이전시키는 안건을 발의할 생각이라네.”
“그걸 다른 대신들이 가만히 두고 볼…….”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려던 레티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앞의 사내는 대신들의 역모를 종식시키고 황실을 구원한 일등공신이었다.
이후 어떠한 포상도 거절한 채 별장에서 칩거 중인 그는 자비에고 주교와 슈텔리앙 후작이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달 내는 인물이며 또한, 차기 황위에 오를 것이 유력한 아르세우스 황태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마탑이 제도를 벗어나 지방으로 이전한다는 것은 제국 역사에 유례가 없던 일이었지만 마냥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마왕이 준동할 것을 기정사실처럼 이야기하는 발타자르의 모습에서 그가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티시아는 태연하게 마왕의 준동과 마탑의 이전을 이야기하는 발타자르가 한없이 두렵게만 느껴졌다.
동시에 이토록 무서운 자가 자신의 편이라는 것에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북부로 마탑을 이전하게. 에르제 황녀와 함께 북부로 향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겠네.”
레티시아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발타자르의 제안을 승낙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는 떠올리지 못했다.
* * *
발타자르의 습격 소식이 황궁을 강타했다.
이 소식을 접한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크게 진노하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일의 배후를 색출하라며 슈텔리앙 후작에게 엄명을 내렸다.
대신들의 역모 이후 간신히 안정을 찾았던 제도는 다시 한번 혼란이 찾아왔고 슈텔리앙 후작을 위시한 그의 파벌들이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집집마다 들이닥치며 범인 색출에 열을 올렸다.
한편 자비에고 주교는 이 일이 자신에게 독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제도에 머무는 암살자 집단은 자비에고 주교가 알기로 검은 사월뿐이며, 지금은 그 끈이 끊어졌다고는 하지만 그 이전에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지만 달리 말하면 완전한 비밀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자칫 이것이 슈텔리앙 후작의 귀에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후…… 대체 어떤 놈이 감히……!”
자비에고 주교는 크게 분노했다.
발타자르의 습격 사건이 단순히 발타자르만을 노린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 보란 듯이 백주대낮에, 그것도 인파가 몰린 광장의 한복판에서 일을 벌인 것을 보면 혹시 자신을 노린 고도의 차도살인借刀殺人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으로 의심되는 이는 많았다.
당장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에 합류한 역모에서 살아남은 두 대신과 역모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사망한 세 대신의 파벌에 속해 있던 이들까지.
지금은 같은 편에 서 있다고는 하지만 하나같이 자비에고 주교의 자리를 노리는 승냥이들이었으며 정적들이었다.
“잠깐.”
불현듯 한가지 생각이 자비에고 주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이 가장 유력한 범인 후보들이 아니었던가.
‘이참에 내부 정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자비에고 주교는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단 심문관들을 소집해라!”
자비에고 주교의 노도와도 같은 외침에 사제들이 황급히 이단 심문관들을 소집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리고 반나절이 채 지나기 전에 악명 높은 슈미트라 교단의 이단 심문관들이 속속들이 신전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 * *
그날 밤.
자비에고 주교가 소수의 크루세이더만 대동한 채 은밀히 발타자르의 저택을 방문했다.
“공작. 몸은 좀 괜찮으신가?”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자비에고 주교가 묻자 그가 찾아온 목적을 짐작한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니 앉아서 얘기하세나. 주교.”
그러자 자비에고 주교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대체 어떤 무도한 놈들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이단 심문관들을 풀어 두었으니 금방 범인을 색출해 낼 수 있을 걸세.”
마치 자신이 습격을 받은 것처럼 성을 내며 말하는 자비에고 주교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조소를 금치 못했다.
“그거야 조사해 보면 알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어쩐 일로 이 야심한 시각에 내 저택을 방문한 것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자비에고 주교가 잠시 뜸을 들였다.
“공작. 우리는 칼리우스 전 군부대신의 야욕으로부터 제국의 황실을 지켜낸 동맹 관계이지 않은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잠시 손을 잡았던 관계가 언제 동맹 관계로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발타자르는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표정으로 자비에고 주교를 바라보았다.
“슈텔리앙 후작 측에서는 자네를 습격한 이들이 사망한 전 대신들의 사람들이거나 혹은 자네로 인해 권력을 잃은 것에 앙심을 품은 이들의 소행이 아닐까 짐작하고 있다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역모 사건이 끝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지금에서 그들이 섣불리 움직일 리는 없지 않겠는가?”
자비에고 주교는 이번 일을 벌인 것이 자신의 파벌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자비에고 주교가 직접 움직인 것은 아닐 것이었다.
“나도 개인적으로 내부 조사에 들어갔네만 몇몇 이들이 불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그것을 실천한 것은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네.”
그 말에 발타자르는 자비에고 주교가 내부 정리에 들어간 것이라 짐작했고 이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오늘 자비에고 주교는 발타자르의 습격 사건을 빌미로 제 파벌에 속한 이들의 저택을 급습하여 그들의 약점을 손에 쥐었고 이로써 제 파벌에 대한 통제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래서? 주교도 알다시피 난 서두가 긴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네.”
발타자르가 본론으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자 자비에고 주교가 흠흠- 하고 목을 다듬더니 그가 찾아온 진짜 목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말일세. 이번 일을 꾸민 범인은 제도가 아닌 제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잘 생각해 보게나. 이번 역모 건으로 많은 이들이 큰 손해를 입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이들이 누구이던가?”
두말할 것도 없이 역모를 주동했던 세 대신과 그들의 파벌들이었다. 하지만 자비에고 주교가 말하고 싶은 이들은 그들이 아니란 것쯤은 발타자르도 알고 있었다.
“빌 헬름 공작과 프리드리히 공작. 두 선제후를 말하는 것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자비에고 주교가 아이처럼 좋아하며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바로 맞췄네.”
그러곤 몸을 앞으로 수그리며 발타자르에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말을 이어갔다.
“호시탐탐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만 엿보던 그들에게 이번 일은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네. 한데 그것이 자네로 인해 무산되어버렸지. 심지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중앙 진출은 물론 중앙, 아니, 제국 최고의 권력자로 떠오른 자네의 존재가 그들에게 달갑게 보였을까?”
알 만했다.
자비에고 주교는 이번 습격 사건의 주모자로 두 선제후를 지목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질투심 때문에 그들이 이번 일을 벌였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거야 모를 일이지. 사람 속내를 내가 어찌 알겠는가. 어디까지나 가정일세. 그럴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가정 말일세. 하지만…….”
잠시 뜸을 들인 자비에고 주교가 눈을 빛내며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제대로 된 목격자도. 범인들에 대한 단서 하나 없는 지금. 일의 당사자인 자네라면 그 가정을 사실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자비에고 주교의 눈동자에 서린 탐욕을 엿본 발타자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변방의 선제후들을 찍어누를 좋은 기회가 아닌가.”
자비에고 주교.
이 탐욕스러운 놈.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의 탐욕이 발타자르에게 향할 이목을 대신 가져가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