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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84화 (84/183)

공작이 회귀함 84화

제국 서부.

무수히 많은 이종족 중에서도 그 수와 세력이 강대한 7종족에 유래한 7왕국 연합의 수도 엘룬시아.

그곳에는 세계수가 있었다.

이 세상과 탄생을 함께 했다고 전해지는 이 거목은 사방으로 뿌리를 드넓게 뻗치고 있었는데, 일부 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그 뿌리가 대륙 서부를 뒤덮을 정도라고 하니 실로 서부 그 자체라 칭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 세계수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거목답게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양의 마나를 품고 있었다.

마나의 결집체나 다름없는 이 세계수는 쉼 없이 몸 안에 품은 마나를 뿜어내었고 덕분에 서부의 땅은 서대륙 그 어느 곳보다 비옥한 옥토를 자랑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세계수가 병들어 가고 있었다.

사시사철 푸른 잎이 무성하던 세계수의 가지에는 나뭇잎 하나 보이지 않는 무척이나 삭막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고목의 군데군데 물감을 칠한 듯 검은 반점이 번져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이 반점을 살펴보면 이것이 수많은 벌레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그리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세계수를 좀먹는 이 벌레들은 ‘마나 포식자’라 명명된 마계의 기생충이었다.

이 마나 포식자가 세계수의 마나를 먹어치우며 그 숫자를 빠른 속도로 불려 나가니 세계수는 점점 그 힘을 잃어갔다.

이에 세계수는 어떻게든 살고자 몸부림쳤고 서부 전역으로 드넓게 뻗친 뿌리로부터 주변 땅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이변은 빌 헬름 공작이 다스리는 서부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 * *

선제후 즉위식은 약식으로 진행되었다.

본래라면 제도의 시민들과 제국 각지의 귀족들을 한데 모아 성대하게 진행해야 했으나 황제의 죽음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성대하게 즉위식을 거행했다가는 좋지 않은 말들이 나올 것을 염려해서였다.

그렇게 조촐한 선제후 즉위식이 끝난 이후 대신들의 역모 이후의 처리 문제를 놓고 황궁에선 연일 회의가 벌어졌다.

서로 조금이라도 제 파벌의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고자 자비에고 주교와 아르세우스 황태자가 연일 정쟁을 벌였고 백중지세를 이루었다.

이에 아르세우스 황태자는 발타자르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자신의 손을 들어주기를 누차 요청하였지만, 발타자르는 황태자가 내어준 별장에서 두문불출하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간간이 그의 여동생인 아이린과 제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 외에는 일체의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 발타자르에게 아르세우스 황태자와 슈텔리앙 후작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지금의 세력 구도가 급변할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 *

제도의 어느 한 제과점.

발타자르는 아이린과 나들이를 나와 있었다.

별장에 칩거한 이후로 이렇게 아이린과 함께 제도의 거리를 구경하고 다니는 것이 일과가 되어버렸다.

“맛있니?”

발타자르가 뺨에 생크림을 묻혀가며 조각 케이크를 먹고 있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맛있어요. 오라버니는 안 드세요?”

기분이 좋은지 활짝 웃으며 답하는 아이린에게 발타자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뺨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내어 주었다.

“단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그리 말한 발타자르는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손수건으로 닦아내곤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또 가 보고 싶은 곳은 있니?”

“음…….”

상냥한 목소리로 발타자르가 묻자 아이린은 케이크를 먹다 말고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게 무슨 큰 고민이라고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발타자르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아이린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투명화한 상태로 가게 안을 구경하며 돌아다니던 비비안이 돌아와 아이린의 앞에 내려서더니 말했다.

“린. 광장에서 인형극을 한대요.”

인형극이라는 말에 아이린이 놀란 토끼 눈이 되더니 이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인형극이요? 언제요?”

“조금 이따가 광장에서 인형극을 한다고 구경 가자는 이야기를 저 사람들이 하더라고요.”

‘거기 가는 건 어때요?’하고 비비안이 말하자 아이린이 홱- 소리가 나게 고개를 치켜들곤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무척이나 간절한 목소리로 발타자르를 불렀다.

“오라버니.”

다 말하지 않아도 아이린이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를 알아챈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케이크를 다 먹는 대로 구경 가자꾸나.”

발타자르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이린이 남은 케이크를 한입에 욱여넣었다.

아이린의 가정교사가 이 모습을 본다면 품위 없는 행동이라며 기겁을 했겠지만, 발타자르에게는 한없이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다머으어요!”

뭐가 그리도 급한지 빵빵해진 두 볼을 씰룩거리며 말하는 아이린의 모습에 발타자르가 아이린의 빈 잔에 홍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차라도 좀 마시려무나. 그러다 체하겠다.”

인형극이 무척이나 보고 싶었던지 아이린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마셨다.

“어서 가요!”

발타자르가 그런 아이린을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꾸나.”

* * *

신이 나선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이린과 함께 광장에 도착하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인파의 가장 앞 열에는 이제 막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간이 무대가 보였고, 그 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 광대가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희 도네 유랑극단의 인형극을 관람하기 위해 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인형극은 이제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앞자리는 미리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북적였기에 발타자르와 아이린은 무대와 제법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앞에선 성인들로 인해 무대가 보이지 않던 아이린은 어떻게든 낑낑대며 무대를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제 부모와 인형극을 구경 온 아이들이 목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아이린은 그것이 무척이나 부럽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았다.

발타자르가 그런 아이린을 발견하고는 번쩍 안아 들어 목마를 태워 주었다.

“자, 이러면 잘 보이지?”

그러자 아이린이 방실방실 웃으며 발타자르의 머리를 한번 꼭 끌어 안아주고는 말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그러면서 ‘오라버니가 최고예요.’라고 속삭여 주니 철옹성 같은 발타자르의 입술도 씰룩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제 자리는 여기네요.”

비비안이 아이린의 어깨에 내려앉으며 자리를 잡았고 그것과 동시에 인형극이 시작되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도네 유랑극단의 인형극이 시작됩니다!]

[이번 인형극은요. 요즘 화제가 되는 인물이시죠? 여러분들도 아주 잘 알고 계신 분이 주인공이랍니다.]

광대의 말이 길어질수록 발타자르의 얼굴이 점점 떨떠름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연극의 주제가…….

[시작합니다! 발타자르 공작 각하를 주인공으로 한 일대기!]

[용과 기사의 노래!]

발타자르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쌀 수밖에 없었다.

* * *

인형극은 제법 흥미진진했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의 바이칸들과 흡사 실제 용을 축소시켜 놓은 것만 같은 인형들은 무척이나 사실적이었으며, 이야기를 진행하는 성우들의 열연은 절로 인형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한 가지.

발타자르의 몰입을 방해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라버니! 저기 오라버니예요!”

“알! 지금 알이 위험해요!”

무대에서 단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는 발타자르 인형 때문이었다.

인형극에 몰두한 아이린과 비비안은 무대 위의 발타자르 인형이 위험에 빠질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다.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날뛰는 발타자르 인형은 무척이나 멋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발타자르는 낯부끄러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평민으로 위장했기에 망정이지 귀족식 복장을 입고 나왔다면 단박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리라.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상상을 하던 발타자르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정말이지…….

평민으로 위장한 것은 현명하고 또 현명한 선택이었다.

“인형도 멋지지만 그래도 오라버니가 더 멋져요.”

인형극에 몰두하던 아이린이 그리 말하곤 다시 인형극에 빠져들었다.

그런 아이린을 힐끔 바라본 발타자르는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에 인형극을 보러 오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낯부끄러운 것은 여전했지만 말이다.

* * *

그렇게 인형극은 계속되었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이야기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이에 발타자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돌연 무대 위에서 발타자르 인형에게 쓰러지던 암살자 인형이 돌발 행동을 보였다.

암살자 인형은 손에 든 조그마한 구슬을 무대가 아닌 사람들을 향해 내던졌고 곧이어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꺄아아악!”

“뭐, 뭐야!”

“엄마아!”

갑작스레 연기가 광장을 뒤덮자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와! 연극이 정말 흥미진진하네요. 이것도 연출이죠?”

아이린의 머리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비비안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발타자르는 대답하는 대신 목마를 태우고 있던 아이린을 어깨 위에서 내리며 품에 안아 들었다.

동시에.

“죽어라! 발타자르!”

연기 속에서 암살자들이 튀어나오며 발타자르를 향해 비수를 날려 보냈다.

비수는 섬광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왔지만, 그 목적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날아드는 비수는 비비안이 재빠르게 펼친 물의 장막에 의해 막혔으며, 뒤이어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던 암살자들은 근처에서 대기하던 호위들에 의해 모조리 제압당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발타자르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신시아.”

발타자르가 부르기가 무섭게 신시아가 제 수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었다.

“죄송해요. 아저씨.”

“분명 잘 처리할 수 있다고 믿고 맡겨 달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발타자르의 질책에 신시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어요.”

그런 신시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래. 무엇이 문제였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신시아가 힐끔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일체 배제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신시아는 그가 무척이나 화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제 목숨처럼 아끼는 아이린이 함께 있는 가운데 암습을 받았으니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없을 테지.

“……검은 사월의 본단을 급습할 때만 해도 일은 순조롭게 풀렸어요. 수뇌부들을 비롯해서 주요 전력들이 아저씨의 손에 모두 죽었으니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괴상한 녀석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갔어요.”

“괴상한 녀석?”

“네. 정말 괴상하다는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녀석이었어요. 녀석은 칼에 찔려도, 화살에 머리가 꿰뚫려도 죽지 않고 움직이더라고요. 심지어 목을 베었는데도 이상한 촉수 같은 게 솟아나서는 곧장 재생하는데…….”

발타자르는 신시아가 말하는 괴상하다는 녀석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이 대륙에서 불사에 가까운 재생력을 가진 존재는 마왕 ‘불사왕’과 용사 ‘불멸자’뿐이었다.

불사왕은 남부 대수림에서 힘을 회복하고 있을 테니 신시아가 상대했다던 녀석은 불멸자가 분명했다.

도원경과 같은 세븐스타의 일인이며, 변절자 무리의 리더.

불멸자不滅者 지그문트.

그가 이 제도에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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