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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83화 (83/183)

공작이 회귀함 83화

“어째서 그리 생각하십니까?”

물으며 발타자르는 힐끗- 황제의 뒤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황제의 발언 이후, 잔뜩 긴장한 눈빛의 드미트리가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대전 안에 남아 있는 황실 기사단원 모두가 드미트리와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래서야 지금 당장은 황제에게 손을 쓸 수 없겠군.’

발타자르가 속으로 쓰게 웃었다.

혹시 이런 상황을 황제가 유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어야 이 제국이 유지될 테니까.”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듯이 황제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네가 원하는 것일 테고.”

발타자르는 답하는 황제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황제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로마노프 공작가를 집어삼키고 더 나아가 북부의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이렇게 내무대신의 부름에 응답하여 달려온 것만 봐도 그렇지. 사실 제도의 상황이 어찌 되든 자네 입장에서야 다른 선제후들이 그랬듯이 북부에서 힘을 기르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해도 되지 않았나.”

“전 그저 폐하의 충실한 종으로서 맡은 바 책무를 다하기 위해 온 것뿐입니다.”

발타자르의 대답에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네에게 이 제국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네. 내가 자네라도 이런 무능한 황실에 충성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가지지 않았을 걸세.”

직설적인 황제의 언변에 발타자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회귀 전에 몇 번인가 보았던 레오노플 프락시온은 전형적인 무능한 황제의 표본이었다. 대신들에 의해 황위에서 끌어내려지는 순간까지도 그는 한없이 무능했다.

한데, 지금 모습을 보면 그 무능한 황제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정황만 놓고 보면 황제가 지금까지 무능함을 연기하고 있었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왜 이제 와서 무능함을 연기하는 것을 그만둔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이어지는 황제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황위에 올랐을 때. 제국은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눈먼 마차나 다름이 없었다네. 수대에 걸쳐 연달아 등장한 무능한 황제들. 그런 황제를 현혹하고 두 눈을 가리는 간신들. 지금 당장 무너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었지. 파국으로 치닫는 것만은 최대한 막아보고자 했지만, 이미 곯을 대로 곯아버린 황실에는 힘이 없었고 그런 황실에 실망한 권신들은 황실에 등을 돌리고 외면하기를 선택했네.”

발타자르는 가만히 황제의 말을 경청했다.

“그래도 황제라고 내 나름대로 제국을 건사해 보고자 애써왔지만, 나약한 황실과 이 병약한 몸으로는 그 한계가 명확했다네.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뀌는 것은 없었지.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지쳐 버렸었네. 이 제국에 희망이 없음을 직감한 것이지. 그래서 뒷방 늙은이 신세를 자처하며 간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었지. 어디까지 제국이 추락할 것인가 지켜나 보자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말일세.”

황제가 말을 멈추곤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자네가 등장했네.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바로 자네가.”

황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는 그 몸짓은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동시에 이상하리만치 굳건해 보였다.

“북부를 지켜야 할 책무를 등진 로마노프 공작가를 대신하여 아무런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바이칸들의 대침공을 저지하였고.”

터벅-

황제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제국에 유례없던 민란을 종식시켰으며.”

터벅-

몸을 휘청이면서도 황제는 오로지 발타자르만을 응시하며 그에게로 향하는 위태로운 걸음을 계속해 나갔다.

“오랜 세월 북부의 패자로 군림해온 로마노프 공작가의 견제를 짓누르는 것은 물론.”

터벅-

마침내 황제가 발타자르의 앞에 도착하고.

그 짧은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그것만으로도 지쳤는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들을 집어삼켰지.”

황제가 허리를 꼿꼿이 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전히 거친 숨을 몰아쉬는 황제였지만 발타자르는 그가 무척이나 크게만 느껴졌다.

병약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

그것은 이 거대한 제국의 황제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지배자의 기운이었다.

“북부의 패자가 되었음에도 힘을 불려 나가는 것을 계속하기보단 내무대신의 부름에 응하여 한달음에 달려온 자네의 행동에서 난 희망을 보았네.”

툭-

황제가 발타자르의 어깨를 굳게 움켜쥐었다.

“물론 자네는 자네의 이득을 위해 한 행동이겠지만. 그럼에도 다른 선제후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네.”

발타자르는 황제의 눈동자에 깃든 열망을 엿보았다.

그것은 희망에 대한 열망이었다.

대체 자신의 어떤 면을 보고 황제가 이리 생각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발타자르가 묻자 황제가 답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자네는 이 제국이 유지되기를 원한다는 것.”

황제가 발타자르의 어깨를 좀 더 강하게 움켜쥐며 말을 이어갔다.

“대신들의 역모를 종식시키고 중앙에까지 세력을 뻗쳐 힘을 키운다. 단순히 생각하기에는 제국 최고 권력자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한다면 중앙에 힘을 뻗치는 것이 도리어 다른 이들의 견제를 사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을 걸세.”

황제의 말대로 발타자르가 중앙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다른 선제후들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었다.

“자네가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다면 모를까. 세력의 균형추가 비등비등한 상황에서 다른 세력들의 견제는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일 걸세. 물론 제국이 건재했다면 그것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하겠지만, 이렇게나 쇠락한 제국의 상황에서 그러한 선택은 악수일 뿐이지.”

각자가 새로운 국가의 지배자가 되기를 갈망하는 선제후들은 중앙을 손에 넣은 발타자르를 눈엣가시처럼 여길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견제로 발타자르의 세력 기반이 되는 북부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방에서 협공을 당한다면 북부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지지기반을 잃게 되면 발타자르의 몰락은 순식간이었다.

“그럼에도 자네는 제도로 향했네. 그리고 대신들을 모두 쳐낼 수 있음에도 세 대신만 쳐내는 것을 선택했지.”

하여 발타자르는 이번 역모를 조장한 일곱 대신을 모두 쳐내기보다는 가장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세 대신만을 쳐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이는 자네가 아직 이 제국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뜻이라고 봐도 무방하네.”

힘이 약화되었다고 해도 중앙에 대신들이 건재하다면 선제후들은 쉽사리 경거망동하지 못할 테고,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듯 변방에서 숨죽이며 힘을 키워 나가는 일을 계속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발타자르가 힘을 키워 나갈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것은 물론 힘을 키워 나간 선제후들은 앞으로 다가올 환란을 막아낼 강력한 패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 제국은 유지되어야 했다.

“황실을 지켜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네. 그건 내 과욕이니까. 하지만.”

황제는 그런 발타자르의 의중을 꿰뚫었다.

“이 제국이 유지되기를 원하는 자네의 뜻이 확고하다면. 그렇다면 부디 이 제국을 지켜주게.”

황제가 발타자르의 몸을 잡아당겼다.

미약한 힘이었기에 저항할 수 있었지만, 발타자르는 그러지 않았다.

“이 제국을 위해서라면.”

이윽고 황제와 발타자르의 얼굴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맞닿았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이용해도 좋네.”

황제가 여전히 강한 열망이 담긴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것이 설령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말일세.”

* * *

황제가 사망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사한 것이 아니라 제도 대신들의 역모에 휩쓸려 사망했다는 소식이 공표되자 제국은 크게 뒤흔들렸다.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던 선제후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대규모 군사 이동을 실시했고 각 지방으로 흩어진 황족들을 앞세워 살아남은 대신들을 규탄했다.

제국에 큰 전운이 감돌았다.

언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는 과열되기 시작했고, 그 무렵 중앙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연달아 공표했다.

그 소식은 이번 역모 건에 빌 헬름 공작과 프리드리히 공작, 그리고 칼 프란츠 대공이 연관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로 중앙에서는 이번에 역모를 일으킨 대신들과 이들이 주고받은 밀서들을 내밀었다.

당연히 두 공작과 대공 측에서는 조작된 증거라며 이를 강하게 부정하였으나 사안이 너무 컸다.

역모의 주동자들인 세 대신이나 혹은 그 당사자인 황제.

이들 중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았다면 협상을 통해 일을 무마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 모두가 사망한 시점에서 두 공작과 대공이 달리 손을 쓸 방법은 전무했다.

그저 이것은 모함이며, 증거는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부정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덕분에 세 선제후는 중앙으로 향했던 군을 물리고 몸을 사리며 돌아가는 사태를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 선제후가 정신이 없는 가운데 로마노프 공작가와 군부대신 그리고 종교대신이 사망함으로써 공석이 된 선제후의 위에 각기 발타자르 공작, 외무대신, 내무대신이 오르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이후 이들은 황태자를 차기 황제로 지지한다는 선언을 공표하였으며, 메디치 공작가 역시 이 분위기에 편승하며 황태자를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하였다.

대세는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는 쪽으로 기울었고 세 선제후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황위를 노리고 각지에 흩어졌던 황족들은 닭 쫓던 개 꼴이 되어버렸다.

* * *

대신들의 역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제도는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받은 세 대신과 그들의 일파들은 보이는 족족 잡혀들어가 사형에 처해졌으며, 그들이 사망함으로써 공석이 된 자리는 자비에고 주교의 파벌과 황태자의 파벌에 속한 이들이 차지했다.

“발타자르 공작. 이것 보시게. 오늘도 제국 전역에서 이리도 많은 선물을 보냈다네.”

제국의 황태자이자, 차기 황제에 가장 유력한 후보인 아르세우스 프락시온이 산처럼 수북이 쌓인 선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시는군요.”

발타자르의 말에 아르세우스가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냥. 우습지 않은가. 내게 아무런 힘이 없을 때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이들이 지금은 조금이라도 내 눈에 띄고자 이리 안달 내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렇습니까?”

“그런 면에서 자네에게는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내가. 그리고 우리 황실이 힘들 때 한달음에 달려와 준 이가 아니던가. 이 빚은 꼭 갚겠네.”

발타자르의 손을 굳게 움켜쥐며 말하는 아르세우스의 눈동자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신하의 도리를 다했을 뿐입니다.”

발타자르가 답하자 아르세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눈을 곱게 휘며 웃어 보였다.

“제국의 신료들이 다 자네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하곤 한숨을 푹 내쉰 아르세우스가 말했다.

“그보다 이번에 내무대신이 제안한 군부대신 자리를 거절했다던데.”

얼마 전.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은 발타자르에게 군부대신의 자리를 권유했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자신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도 충분히 과한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하가 군주보다 강한 힘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태자 전하께서도 이번 일로 깨닫지 않으셨습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아르세우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아르세우스가 이내 고개를 들곤 말했다.

“내가 황위에 오르게 되면 선제후들과 대신들에게 위임한 권력들을 모두 회수할 걸세. 하여. 다시 이 제국을 찬란했던 그 시절로 되돌리고 말 걸세. 꼭 그리 만들고야 말겠어.”

아르세우스가 자신의 굳은 결심을 읊조렸다.

발타자르가 그런 아르세우스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가운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아르세우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드미트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힐끗- 복잡한 심정이 담긴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아르세우스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전하. 선제후 즉위식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드미트리의 말에 아르세우스가 발타자르의 팔을 툭툭- 두어 번 두드렸다.

“자, 가세. 주인공이 늦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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