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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82화 (82/183)

공작이 회귀함 82화

대신들이 갑작스러운 발타자르의 등장으로 인해 당혹스러워하는 가운데, 발타자르가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나 느긋한 걸음걸이로 황제를 향해 다가갔다.

또각- 또각-

묘한 정적이 감도는 대전 안에 군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타자르가 점점 다가감에 따라 대신들의 수하들이 발타자르를 향해 검을 겨누었으나 감히 휘두르는 자는 없었다.

되려 발타자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압도당하여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발타자르가 칼리우스의 옆에 나란히 서며 황제의 앞에 도착하자 힐끗- 칼리우스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이것 참.”

조용히 울려 퍼지는 발타자르의 목소리에 모두가 그를 주목하는 가운데.

“폐하가 계신 어전에서 칼을 뽑아 들다니.”

발타자르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대전을 짓눌렀다.

“죽고 싶으냐.”

마스터가 작정하고 뿜어낸 기운에 경지가 낮은 이들은 몸을 휘청거리거나 자리에 주저앉았으며, 그나마 경지에 도달한 이들 역시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오직 황제와 발타자르.

두 사람만이 평온한 얼굴이었다.

‘어떻게 이자가 벌써…….’

백지장처럼 창백한 안색의 칼리우스는 일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발타자르가 이곳에 몸을 드러내었다는 것은 황궁의 문이 뚫린 것은 물론, 검은 사월의 암살자들의 암습이 실패했다는 것을 뜻했다.

진작에 황제의 신병을 확보했다면 모를까.

너무 여유를 부린 탓에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기 전에 발타자르가 도착한 지금.

이 대전 안에서 발타자르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고 있는 대신들과 그들의 수하들의 모습을 확인한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폐하의 앞에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러자 황제가 가볍게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용서하노라.”

이에 발타자르가 숙였던 고개를 들며 황제를 바라보자 황제가 인자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그를 응시했다.

격전을 치르고 왔을 것이 분명함에도 입고 있는 예복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잘 정돈된 보랏빛 머리칼과 속내를 알 수 없는 황금빛 눈동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심유했다.

대신들과 그들의 일파라면 모를까.

충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서 황제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고 곧 그것이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라는 것을 직감했다.

일순간.

발타자르가 형언할 수 없는 아득한 공포를 휘감은 것처럼 보였다.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죽음의 향기에 황제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끝이 보이는구나.’

하지만 황제는 그것을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황제는.

간신들로 인해 서서히 기우는 제국을 간신히 형태나마 유지시켜왔던 이 거인은 한없이 인자한 얼굴로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은 누차 들어보았으나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로군.”

“신의 불충입니다.”

“아니, 아닐세. 북부를 지키느라 공사다망한 와중에도 이리 짐을 구하기 위해 찾아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네.”

황제의 말에 칼리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제의 말 속에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감지해 냈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서서 그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지금은 잠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할 때였다.

‘최악의 상황이 온다고 해도 황제는 쉬이 우리들을 벌하지 못할 것이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치달은 지금. 황제가 대신들을 적대하고 그들을 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황제가 쉽사리 대신들에게 손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칼리우스에게는 있었다.

제국 정계 곳곳에 대신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만약 대신들과 그 일파들을 모두 쳐내게 되면 제국의 국정은 마비된다.

그렇게 되면 제국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지금도 변방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선제후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일의 주동자들만 쳐낸다는 선택지도 있으나 대신들이 마냥 당하고만 있을 정도로 멍청하지도 않고, 대신들에게 선을 대고 있는 이들 역시 자신들이 손에 쥔 이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일의 주동자들만 쳐낸다는 형편 좋은 이야기는 통용되지 않았다.

모두 쳐내든가.

아니면 어느 정도 이득을 챙기고 이 일을 덮든가.

칼리우스는 자신이 있었다.

아직 돌이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은 아닌 상황에서 제국을 제 손으로 무너뜨리려는 생각이 있지 않고서야 황제가 내릴 결론은 하나였으니까.

일이 틀어졌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약간의 손해는 보겠지만 감수할 수 있었다.

하나. 진짜 문제는.

“폐하의 신하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발타자르였다.

황제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발타자르가 작정하고 칼부림을 한다면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들이 어째서 폐하의 어전 앞에 칼을 빼 들고 있는지가 의문입니다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를 리도 없을 텐데 의뭉스레 대신들과 그 일파들을 바라보며 말하는 발타자르의 행동에 칼리우스는 발타자르가 여기서 더 일을 키우지 않으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칼리우스는 황제보다 한발 앞서 나서며 발타자르의 물음에 답하였다.

“어떤 간악한 이들이 검은 사월이라는 암살자들을 매수 하여 황제 폐하를 노리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네. 검은 사월은 제국 최고의 암살 단체. 근위대와 황실 기사단만으로 황제 폐하를 지키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했다네. 하여 황제 폐하의 신병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우리는 폐하를 지키고자 이리 군을 일으키고 황궁을 찾아온 걸세.”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변명 같지도 않은 변명이었지만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것이 맞다고 결론지으면 그뿐인 이야기였다.

물론 거기에는 충분한 협의가 오고 가야겠지만 말이다.

“군부대신. 자네에게 물은 것이 아니네만.”

발타자르가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이에 칼리우스의 얼굴이 치욕으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어느샌가 목을 조여오는 강렬한 기운 때문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팔짱을 끼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것뿐이었다.

“국정을 논할 때는 무서운 것 하나 없이 당차던 군부대신이 이리 눈치를 보고 있으니 제법 우습구만.”

황제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칼리우스의 얼굴이 더욱 붉어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어떤가 공작. 내 슬하에 어여쁜 아이들이 많다네. 듣기로는 아직 혼인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만나는 이가 없다면 혹 내 여식들과 만나볼 생각은 없는가?”

갑작스러운 제의였지만 발타자르는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고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송구하옵게도. 소신은 아직 혼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황실이 건재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현 제국의 황실은 썩은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괜히 엮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물론 황족과의 혼인은 정치적으로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였고 앞으로 벌어질 내전을 생각한다면 발타자르에게 가장 강력한 명분을 손에 쥐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제도에서 발을 뺄 생각을 하고 있는 발타자르에게 황제의 이 제안은 썩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내전이 벌어지면 명분은 무의미해지고 만약 황족이라는 명분이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걱정은 없었다.

발타자르가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기 위해 안달 낼 황족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런가.”

발타자르의 단호한 거절에 황제가 무척이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역시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고 제안한 것은 아닌 듯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시답잖은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공작은 이 일을 어찌 정리하려 하는가?”

황제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며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발타자르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황제가 그런 발타자르를 지긋이 응시하며 말했다.

“알지 않나. 대신들의 이번 역모 건에 대해서 묻고 있다는 것을.”

황제의 입에서 역모가 거론되자 순간 칼리우스를 비롯하여 대신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물론 이 상황이 역모임은 두말할 것도 없으나 그것이 황제의 입으로 거론되느냐 마느냐에 따라 대신들의 처우가 결정되는 상황이었다.

한데 이렇게 대놓고 역모를 거론하는 것을 보니 칼리우스의 생각과 달리 황제는 대신들을 쳐낼 생각으로 보였다.

“흐음…….”

황제의 말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검집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단박에 대신들의 이목이 발타자르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황제가 발타자르에게 대신들에 대한 처우에 대한 권한을 일임한 것을.

그들의 목숨은 이제 발타자르의 손에 달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다급해진 법부대신 채드윅 골드하먼이 나서며 말했다.

“여기서 우리들을 쳐낸다면 남은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일세.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제국도 끝일세.”

채드윅이 나서자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던 종교대신 벤지아노 주교 역시 한 손을 거들었다.

“그렇네. 우리가 있으므로 선제후들은 쉽게 제도를 넘보지 못했지. 하지만 만약 우리를 쳐낸다면 우리들의 파벌에 속한 이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그렇게 되면 중앙의 혼란을 노리고 변방의 선제후들이 곧장 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걸세. 그렇게 되면 이 제국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어지겠지. 자네의 선택에 따라 이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니 신중하게나.”

자신들을 죽인다면 제국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협박하는 것이었다.

같잖은 협박이었다.

이들의 말대로 이 자리에서 대신들을 모두 축출한다면 제국의 정세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지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국의 몰락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대신들은 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 이렇게 하세나.”

한참 뜸을 들인 발타자르가 대신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평소 자신을 적대하는 황태자의 행태에 격분한 군부대신이 참지 못하고 역모를 조장했고, 종교대신과 법부대신이 가담하였다. 주동자는 이들 셋이 전부이며. 이들은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역모 도중 사망하였다.”

발타자르의 말에 일순간 대신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벤지아노 주교가 멍하니 묻자 발타자르가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머금으며 사형선고를 선언했다.

“무슨 소리긴. 이 자리에서 자네들의 목을 치겠단 소리라네.”

말과 동시에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졌다.

붉은 오러블레이드에 휩싸인 검이 순식간에 대신들과 그 일파를 휩쓸었다.

피하거나 막아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발타자르가 검을 휘둘렀다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그들의 목이 달아났다.

목이 잘린 시체들과 그 시체들이 뿜어낸 혈흔이 대전의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휙-

발타자르는 검을 한번 가볍게 휘둘러 검신에 묻은 혈액을 털어내고는 검을 납검했다. 그런 발타자르에게 황제가 말했다.

“하나 정도는 살려둘 줄 알았건만.”

황제의 말에 발타자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셋을 쳐냈지만, 아직 넷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이에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긴 하지.”

그러더니 이내 깜빡 잊었다는 듯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아 참. 그리고 자네의 이야기 중에 정정할 것이 하나 있네.”

순간 발타자르는 황제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지만 달리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무엇입니까?”

발타자르가 묻자 황제가 답했다.

“군부대신을 비롯한 세 대신의 역모는 성공하였고. 황제는 사망하였다.”

태연한 얼굴로 제 죽음을 거론하는 황제로 인해 발타자르가 처음으로 얼굴에 감정을 드러내며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황제가 미소 짓고는 발타자르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자네도 그것을 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그런가? 발타자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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