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80화
검은 사월의 암살자들은 일반적인 암살자들과는 달리 암살에 아주 긴 준비 시간을 소모한다.
목표한 대상의 성향, 버릇, 취향, 주변 인간관계, 행적 등 철저한 사전 조사를 거치고 조사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예행 연습까지 끝마치고 나서야 암살은 시행된다.
이것은 검은 사월의 수장 시카리오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노하우를 바탕으로 시행된 검은 사월만의 철칙이었다.
이 철칙을 지켜왔기에 시카리오는 로열랭크의 경지로, 마스터 암살이라는 일견 불가능해 보이는 업적을 이룩해 냄으로써 검은 사월을 제국 최고의 암살 단체로 발돋움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시카리오는 이 철칙을 내세운 이후로는 결단코 단 한 번도 암살을 행하는 데 있어 이 철칙을 어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철칙을 어긴 암살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에게 닥쳐왔다.
“그러니까. 저 막강한 호위들을 뚫고 발타자르 공작을 암살하라?”
제도의 어느 한 술집.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한적한 술집의 카운터에서 술잔을 닦고 있는 시카리오의 앞에 한 사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군부대신 칼리우스의 수족인 사내는 칼리우스의 밀명을 받아 검은 사월에게 발타자르의 암살 의뢰를 맡기기 위해 시카리오를 찾아왔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곧장 시카리오를 만나는 대신 접선자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야 할 사내였다.
하지만 자비에고 주교가 사전에 칼리우스의 사람이 방문하면 직접 대화를 나누라는 언질을 주었던 터라 이렇게 곧장 시카리오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준비 시간도 없이 지금 바로?”
“예. 마스터를 암살한 전적이 있는 검은 사월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 아닙니까?”
사내는 마스터 암살을 쉽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옛날.
시카리오와 검은 사월이 마스터를 암살한 것은 천운에 천운이 겹쳐서였다. 물론 그것을 위해 긴 시간과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고도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인간의 몸으로 이적에 가까운 행위를 벌이는 자들.
시카리오에게 다시 한번 같은 일을 반복하라고 한다면 그때는 암살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었다.
한데, 사내는 그 일을 거론하며 마스터 암살을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좋아. 암살을 시행한다 치고. 지원은?”
시카리오의 물음에 사내가 품에서 새하얀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백지 수표입니다. 원하시는 만큼의 금액을 쓰시면 제국 은행에서 지급해 줄 겁니다.”
사내의 말에 시카리오는 헛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지원은 고작 돈뿐인데. 그 돈만 보고 마스터 암살에 뛰어들라 이 말인가?”
“검은 사월은 돈만 맞춰주면 상대가 누구든 암살해 주는 암살 집단 아니었습니까?”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는 사내의 말에 시카리오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검은 사월을 홍보하기 위해 그런 문구를 내건 것은 맞지만 실제로 돈만 많이 준다고 아무나 암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암살 대상의 직급, 정치적 위치, 일신의 무력 등.
여러 가지 요건들을 사전에 조사하고 암살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될 때에만 비로소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비에고 주교께서 언질을 주셨지 않습니까? 어떤 임무이든지 군부대신께서 내리신 임무는 무조건 받아들이라고요.”
“그래. 그랬지.”
답하며 시카리오는 자비에고 주교를 떠올렸다.
대신들 사이에서는 검은 사월이 자비에고 주교의 수족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사실 검은 사월과 자비에고 주교는 서로의 이해득실이 맞아 떨어져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자비에고 주교가 검은 사월의 뒤를 봐주고 검은 사월은 자비에고 주교의 눈 밖에 난 이들을 처리해 주는 일종의 업무적 협력관계였다.
하지만 최근 칼리우스 백작이 발타자르에게 사로잡히면서 자비에고 주교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자연스레 그동안 검은 사월에게 당했던 전적이 있던 이들이 그들에게 비수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하여 시카리오는 슬슬 배를 갈아탈 때가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자비에고 주교가 제도 최고의 권력자. 군부대신 칼리우스와의 접점을 만들어주니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었다.
하지만 칼리우스가 발타자르의 암살을 요청하니 이것이 호재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해지기 시작했다.
“흐음…….”
시카리오는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을 깨달았다.
현재 제도의 상황은 수하들에게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대신들이 역모를 꾸몄고 이를 시행 중이며, 발타자르는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제도에 입성한 상황이라는 것. 자비에고 주교가 발타자르와 손을 잡고 북문을 열어준 것까지도 말이다.
여기서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대로 쭉 자비에고 주교와 손을 잡을 것인지.
아니면 칼리우스라는 새로운 배에 올라설 것인지를 말이다.
시카리오가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이자 사전에 칼리우스가 지시한 대로 사내가 말을 덧붙였다.
“군부대신께서 이 말도 첨언 하셨습니다. 암살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면 발타자르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요. 그 일만 제대로 수행해 준다면 앞서 말씀드렸던 돈은 물론이고 후에 귀한 대접을 해주시겠다는 말도 남기셨습니다.”
사내의 말에 시카리오는 결정을 내렸다.
새로운 배에 올라타기로 말이다.
“좋네. 의뢰를 받아들이지.”
현재 대신들 입장에서는 발타자르를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끄는 것이 일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만약 검은 사월이 이 시간을 제대로 벌어줄 수만 있다면 대신들이 승리했을 때 막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시카리오가 판단하기로 발타자르보다는 대신들 측이 승리할 확률이 더 높았다.
시간은 대신들의 편이었고, 발타자르에게는 그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여기서 검은 사월이 발타자르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갉아먹을 수만 있다면 발타자르의 패배는 기정사실이나 다름없게 되리라.
최근 급성장을 거듭하는 발타자르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오랜 시간 제도의 지배자로 군림해온 대신들은 괴물들이었다. 탐욕을 양분 삼아 끝없이 몸을 불려 나가는 괴물 말이다.
‘인간은 결코 괴물을 이길 수 없는 법이지.’
야망으로 번들거리는 시카리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사내가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 * *
황제의 행방을 파악한 대신들은 곧장 수하들을 이끌고 대전으로 향했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걸어가는 그들을 발견한 시종들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렇게 대신들이 대전에 도착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황실기사단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전의 문을 열었다.
“군부대신, 법부대신, 종교대신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대신들이 대전 안으로 들어서자 악사들이 연주하는 감미로운 선율이 대신들의 귓가에 울려 퍼지고, 늘어선 테이블과 그 위로 산더미처럼 수북이 쌓인 각종 진귀한 음식들이 향긋한 냄새로 그들의 식욕을 자극했다.
대전의 가장 높은 자리.
단상 위의 옥좌에 몸을 파묻듯 앉아 있던 황제가 그들을 반겨주었다.
“어서 오게. 최후의 만찬에 온 것을 환영하네.”
평소 병약하던 황제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붉은 온기가 감도는 안색과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심유한 눈빛으로 황제가 대신들을 응시했다.
“무얼 하는가. 어서 이리 오지 않고선.”
말하며 황제가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기품이 넘쳐 흘렀다.
그들의 상상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이는 황제로 인해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던 대신들이 서둘러 표정을 고치고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달라진 황제의 모습이 사뭇 당황스럽기 그지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대신들이 이끌고 온 수하들과 함께 천천히 황제를 향해 다가섰다.
완전무장을 한 기사들과 병사들을 위시한 대신들이 대전을 가로질러 다가옴에도 황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선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위엄이 넘치는 그 모습은 가히 제국의 황제다운 모습이었다.
“그래. 대신들께선 어찌 짐을 찾아온 것인가?”
황제의 물음에 칼리우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삐딱한 자세로 황제를 올려다보며 답했다.
“폐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폐하를 찾아온 연유를요.”
그 불경스러운 태도에도 황제는 별달리 지적하지 않고선 수북이 기른 제 턱수염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혹 선위 문제로 찾아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계셨으니 슬슬 자리를 후대에게 물려주실 때도 되었지 않습니까.”
이는 역모였다.
제국 역사에 황제의 면전에서 선위를 거론하는 이는 칼리우스가 최초였다.
이에 황제의 옆에 시립해 있던 드미트리가 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황제가 손을 내밀며 제지했다.
“그렇군. 하지만 그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는 것이 어떻겠나. 오기로 한 손님이 조금 늦는 듯하니. 준비한 음식들을 즐기며 느긋하게 기다려주게나.”
황제의 말에 칼리우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제는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심유한 황제의 눈동자는 굳게 닫힌 대전의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알만하군.’
이 모습을 보곤 칼리우스는 황제가 시간을 끄는 것이라 생각했다.
‘제국의 황제라기에는 너무 유치하군.’
칼리우스는 황제의 같잖은 술수에 넘어가 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말했다.
“설마 이렇게 시간을 끄시면 내무대신이나 발타자르 공작이 폐하를 구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칼리우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수하들이 일제히 무기를 빼 들기 시작했다.
그에 맞서 대전 안에 대기하고 있던 황실기사단 역시 무기를 빼 들며 그들과 대치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언제 칼부림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황제는 대전의 문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요. 그리 고집을 부리신다면 제가 직접 그 자리에서 내려오시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말하며 칼리우스가 성큼성큼 황제를 향해 다가서는 그때.
황제의 목소리가 짙게 내리깔렸다.
“오는구나.”
황제의 말에 칼리우스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대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수하를 시켜 대전 밖의 상황을 알아보고 오라 지시하였으나 아무런 이상도 없다는 보고만 들었다.
황제의 허장성세에 당했다고 생각한 칼리우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대체 무엇이 온단 말씀이십니까?”
칼리우스의 물음에 처음으로 황제가 시선을 움직여 그를 응시했다.
“나의 종말이. 그리고 그대들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노라.”
무저갱 같은 황제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칼리우스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제 목을 옥죄이는 기분을 느꼈다.
“대체 그게 무슨 헛소…….”
이 불쾌함을 떨쳐내기 위해 칼리우스가 무어라 소리치려 했으나 그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콰아앙─
순간.
대전의 문이 박살 나듯 부서져 나가며 한 사내가 대전 안으로 난입했다.
“프락시온 제국의 하늘을 뵙습니다.”
모든 것을 초탈한 표정의 황제가 인자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를 반겼다.
“어서 오라. 종말이여.”
황제의 인사말에 사내, 발타자르가 대전 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