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79화
사람으로 북적여야 할 제도의 거리는 마치 유령 도시라도 된 것처럼 조용했다.
제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시민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 틀어박힌 탓이었다.
그렇다고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집안에 틀어박힌 이들이 무슨 상황인지 살펴보기 위해 창가에서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거 봐. 늑대야.]
[무슨 늑대가 저렇게 커?]
[나 저 늑대 뭔지 알아! 저건 다이어 울프야! 제국 최북단의 비프로스트 요새 너머에 있는 얼어붙은 동토에서만 서식하는 맹수야.]
[그 먼 곳에 짐승들이 어떻게 제도까지 온 거야?]
[바보야. 늑대들을 탄 기수들이 안 보여? 딱 봐도 야만족들이잖아.]
[어! 정말이네. 야만족들이 어떻게 제도까지…….]
대로변을 따라 황궁으로 진군하는 발타자르군을 본 시민들이 속닥이는 소리가 발타자르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들에게 단연 화제는 군의 선두에 있는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이었다.
제도의 시민들 대부분이 일평생을 제도에서 벗어나는 일 없이 살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제국 최북단 너머에 살고 있는 바이칸들과 다이어 울프들의 모습은 생소하기 그지없었다.
먹이를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입가에 번들거리는 붉은 피와 드문드문 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 거대한 몸집에서 나오는 위압감.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는 가지각색의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얼굴 가득 기묘한 문신이 가득한 이방인들의 모습은 절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오랜만이군요.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텅 빈 제도의 거리를 바라보며 가웨인이 말을 걸어왔다.
“그렇군. 정말 많이도 변했어.”
발타자르가 중얼거리며 제도의 풍경을 두 눈 가득 담았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망치듯 떠나던 날의 제도도.
반역자들의 손에 불타오르던 제도도.
그 모든 모습 들이 아직도 생생한 모습으로 눈앞에 떠올랐다.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제도에 돌아온 기분이 어떠십니까?”
가웨인이 물었다.
“기분? 기분이라…….”
사실 별 감흥은 없었다.
분노든 원망이든 격한 감정이야 회귀 전에 충분히 느꼈으니까.
“그냥 그렇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황궁을 향해 나아가던 발타자르의 눈에 문득 한 청년이 보였다.
청년은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앞서 나아가는 다이어 울프와 그 기수들을 통과하며 서서히 발타자르에게로 접근했다.
청년은 뭐가 그리도 슬픈 것인지 세상의 온갖 근심을 홀로 짊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발타자르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뒤이어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반파된 갑옷과 산발 된 머리칼.
온몸이 붉은 피로 흥건히 젖은 그는 앞서 지나간 청년처럼 사람들을 온몸으로 통과시키며 발타자르를 스쳐 지나갔다.
아직 앳된 티가 남아 있는 청년은 젊은 날의 발타자르였으며, 붉은 피에 젖은 중년인은 회귀 전의 발타자르였다.
발타자르는 잠시 말을 멈추어 세우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집 안에 숨어 두려움과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로 바라보는 시민들.
갑작스레 멈춰 서자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가웨인.
다이어 울프를 타고선 앞서 나아가는 트리스탄과 그 옆에서 그녀와 투닥거리는 도원경.
군타낙스 기사단을 이끌고 자신의 뒤를 따르는 갤러해드와 그 주변으로 늘어선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까지.
회귀 전 발타자르가 제도에 입성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발타자르가 이어지는 길의 끝에 보이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황궁의 성벽을 점령한 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중앙군의 병사와 발타자르군을 발견한 듯 손가락질하며 다급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발타자르군을 발견한 중앙군이 병력을 나누어 발타자르군을 향해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오늘.”
발타자르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 단순한 동작만으로도 병사들과 기사들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우리는 대신들의 야욕을 저지하고, 그들로부터 이 제국을 구원한다.”
중앙군이 맹렬한 기세로 돌격해 오는 가운데 발타자르군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굳건한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며 발타자르의 지시를 기다렸다.
“오늘!”
전투의 분위기를 직감한 다이어 울프들이 이를 드러내며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하고 궁수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잡아당기며 화살을 쏠 준비를 했다.
“우리가 이 제국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것이다!”
적들의 발소리와 함성이 조금씩 가까워졌다.
“전군.”
이윽고 중앙군의 모습이 눈으로 식별될 정도로 접근한 그때.
“진격.”
발타자르의 팔이 툭-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발타자르군이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과 함께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 *
제도는 현재 대신들에 의해 점거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거사를 위해 제도 인근의 영지에서 끌어모은 4만의 병력이 각 성문에 각기 1만씩 투입되었고, 황궁을 점거하기 위해 중앙군 5만이 투입되었다.
반면 황제 측은 황궁에는 근위대와 황실기사단을 모두 합쳐 2천의 병력과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이 급히 끌어모은 3천의 병력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병력이 각기 황궁과 서문에 나뉘어 있어 대신들의 야욕을 저지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타자르의 5만 군세가 아무런 저항 없이 북문을 통해 무혈입성함으로써 전황이 크게 급변하게 되었다.
비록 중앙군이 황궁을 점거하고 북문을 제외한 각 성문에 1만의 병력이 포진해 있다고는 하지만 마스터급의 고위 전력이 전무한 대신들 측이 발타자르군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 * *
근위대 내부에 심어놓은 간자 덕분에 어렵지 않게 황궁을 점거한 대신들은 곧장 황제의 거처로 향했다.
그러나 기세 좋게 황제의 거처에 도착한 그들은 텅 빈 방 안만 바라봐야 했다.
침상 위에 누워 있어야 할 황제는 오간 데 없었고, 방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어수선한 황제의 거처를 바라보며 종교대신 벤지아노 주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그사이에 도망친 건 아니겠지요?”
벤지아노 주교의 중얼거림에 법부대신 채드윅 골드하먼이 답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요. 황궁에 우리가 모르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면 그리로 도망쳤을지도 모릅니다.”
채드윅의 말에 벤지아노 주교가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황궁의 비밀 통로는 사전에 저희 측에서 다 막아둔 것 아니었습니까? 만약 저희가 모르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 도망쳤다면 큰일 아닙니까! 발타자르 공작이 황궁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에서 황제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우린 다 죽은 목숨입니다!”
“황궁에 심어둔 첩자에게선 아무런 보고가 없었습니까?”
벤지아노 주교와 채드윅이 앞다투어 말하자 군부대신 칼리우스 프로이덴이 그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걱정들 마시게. 병약한 황제는 쉬이 이 황궁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 몸으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발타자르 공작의 명분 역시 무용지물이 되니 황제가 도망쳤든 말든 간에 우리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일세.”
칼리우스의 말에 벤지아노 주교가 나서며 말했다.
“말씀대로 황제가 죽었다 한들 저 하이에나 같은 놈이 이대로 순순히 군을 물리겠습니까? 황제가 어찌 되든지 신경 쓰지 않고 이대로 우리를 밀어버릴지도 모를 자입니다. 마스터 전력이 전무한 저희가 발타자르 공작을 상대하려면 마탑의 마법사들을 불러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살아 있는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마법사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황제와 제국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평소에야 황제는 그들의 꼭두각시이고, 다수결에 의해 움직이는 제국의회는 대신들 그 자체나 다름이 없으니 그들 마음대로 마법사들을 부릴 수 있었으나 아직 황제를 손에 넣지 못한 지금은 그들 마음대로 마법사들을 움직일 수 없었다.
“걱정 말래도. 정말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황제가 살아서 발타자르 공작에게 합류한다고 해도 상관없네. 다들 내가 황제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해두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 말에 두 대신이 일제히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칼리우스가 황제의 전속 시녀를 매수하여 황제에게 꾸준히 독을 먹여온 것은 대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이야기였다.
그런 칼리우스가 황제의 몸에 아무런 조치도 취해두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만약 황제가 황궁을 벗어났다면 마법이 발동되어 순식간에 극독이 황제의 몸을 잠식해 들어갈 걸세. 그렇게 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망하겠지.”
제국 황제의 목숨을 제 장난감처럼 다루는 칼리우스의 행태에 두 대신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황제가 사망할 경우 차기 황제가 선출될 때까지 황제의 전권은 제국의회가 승계받고 그렇게 되면 아크메이지들을 비롯한 마탑을 움직일 수 있게 되겠지. 거기에 더해 황제의 사망으로 발타자르의 명분은 유명무실해지니 반역죄로 몰아 그들을 일거에 쓸어버리면 되는 것일세.”
칼리우스의 말대로 일이 순순히 풀린다면 더할 나위 없겠으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발타자르로부터 살아남는 일이었다.
“아시다시피 발타자르 공작은 마스터입니다. 그가 앞장서 밀고 들어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입니다. 거기에 발타자르 공작의 휘하에 기라성 같은 무장들은 또 어찌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벤지아노 주교의 물음에 칼리우스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잊었는가? 우리에겐 검은 사월이 있지 않은가.”
그 말에 벤지아노 주교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화색이 되었다.
“그렇군요. 검은 사월이라면…….”
검은 사월은 제국 최고의 암살자 집단이었다.
외무대신 자비에고 주교의 수족들이며, 거사를 위해 자비에고 주교가 그들에 대한 전권을 칼리우스에게 위임한 상황이었다.
돈만 충분하다면 마스터라도 암살해 낸다는 그들이다. 분명 발타자르의 발목을 잡아끄는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이었다. 운이 좋다면 발타자르의 목을 취할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그들이 최대한 시간을 끌어준다면 결국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걸세.”
칼리우스의 말에 두 대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한시름 덜었구나 싶은 그때.
한 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며 보고했다.
“황제를 찾았습니다!”
“그래. 어디 있더냐.”
칼리우스의 물음에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현재 황실기사단장 드미트리와 함께 대전에 있다고 합니다.”
기사의 대답에 칼리우스가 두 대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들었는가? 황제가 아직 황궁에 남아 있다는군.”
칼리우스의 말에 텅 빈 황제의 거처를 발견한 이후로 시종일관 위축된 기색이 역력했던 두 대신이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변해서는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서둘러 대전으로 가시지요.”
“그렇습니다. 어서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여 발타자르, 저 무도한 놈과 그 일당을 일거에 쓸어버리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