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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78화 (78/183)

공작이 회귀함 78화

자비에고 주교를 끌어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손쉬웠다.

켈마르크 백작이 발타자르에게 사로잡힌 이후 자비에고 주교는 사방에서 정치적 공세를 받으며 압박받았다.

황제파는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편으로 분류되던 대신들 마저 그를 압박하는 데 팔을 걷어 올리고 나서니 강력한 권세를 유지하던 자비에고 주교의 세력은 짧은 시간 동안 눈에 띌 정도로 위축되었다.

평소 괄시했던 황제파에게 당하는 것도 화가 나는 일이지만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래도 같은 편이라고 믿었던 대신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일이었다.

서로의 이해득실에 따라 손을 잡은 관계라고는 해도 같은 편이라고 믿었건만, 조금 힘이 약해지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황제파를 부추기며 자비에고 주교를 압박하는 그 행태는 그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평소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굽신대기 바쁘던 이들조차 최근에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뻗대기 시작하니 그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없기에 참고만 있던 차에 발타자르가 선뜻 손을 내밀어 오니 자비에고 주교는 이것이 독이 든 사과라고 해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켈마르크 백작을 돌려주고 더 나아가 대신들을 축출한 이후 황제파의 수장 안티오플 슈텔리앙과 함께 중앙 권력을 양분하는 체제를 성립하는 것을 지지해 주겠다는 발타자르의 제안은 무척이나 매혹적이었으니까.

물론 발타자르는 자비에고 주교가 이런 치욕을 당하는 원흉이었지만, 정치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으로 변하는 것은 부지기수였으니 그와 손잡는 것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뭐, 황제파로서는 금시초문인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상황은 어떻소?”

발타자르의 물음에 자비에고 주교가 힐끗 뒤쪽을 바라보더니 답했다.

“각 성문의 통제가 시작되었고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군이 황궁으로 몰려갔네. 황실기사단과 근위대가 막아서기는 하겠지만 시간문제일 뿐이네.”

대신들도 그렇지만 발타자르를 비롯하여 황제파 역시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이번 일의 관건이었다.

이것은 시급을 다투는 일이었지만 자비에고 주교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쳐 흘렀다. 그리고 그것은 발타자르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대신들의 목적은 4황자에게 황위를 선위하는 것이겠지. 맞소?”

“맞네. 꼭두각시놀음에는 현 황제가 적격이지만 나날이 병세가 악화되고 있어 언제 돌연사할지 모르는 지금 슬슬 새로운 꼭두각시를 들일 필요가 있으니까.”

자비에고 주교는 짐짓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황태자는 무능하고 힘이 없음에도 수그리기는커녕 대신들을 적대하기 바쁘니 그보다는 유약한 4황자가 차기 황제로 적격일 걸세. 칼 프란츠 대공과 메디치 공작을 제외한 선제후들은 미리 입을 맞춰둔 상황이니 거리낄 것도 없을 테고 말이야.”

자비에고 주교의 말에 발타자르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검집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 황제의 사후 제도의 정국이 어찌 변하던지 결국 제국 내전은 벌어질 일이지만 그것을 최대한 늦출 필요가 있었다.

회귀 전에는 내전 이후 제국의 전력이 크게 손실된 상황에서 마왕들이 발호하여 그들을 무찌르는 데 긴 시간과 막대한 물자를 소모했고, 결국 그로 인해 마신의 강림을 저지하지 못했으니까.

같은 역사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중간계에 강림한 마왕들이 힘을 회복하기 위해 각자의 거처에서 은거하는 지금 제국의 전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전이 최대한 뒤로 늦춰져 마왕들의 발호 이후에 벌어지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4황자라…….”

발타자르는 황태자와 4황자를 두고 저울질을 했다.

우선 4황자가 차기 황제가 될 경우 황제파는 황권의 강화를 위해, 자비에고 주교를 위시한 대신들은 저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 들 것이고 이를 위해 각 지방의 선제후들은 압박할 것이 자명했다.

그렇게 되면 중앙의 힘은 커지는 반면 각 선제후의 힘은 여기서 더 성장하는 것은 힘들 것이었다.

반면 황태자가 황위에 오를 경우 중앙의 힘은 한없이 약해질 것이었다.

황태자의 기존 행보로 볼 때 황제파를 위시하여 대신들과 정쟁을 벌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대신 중앙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각 지방 선제후들의 세력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것이었다.

선제후와 중앙.

이 둘 중 어느 쪽이 성장하는 것이 다가올 환란에 대비하는 데 도움이 될지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황제는 오늘 승하한다. 하지만 황위는 4황자가 아닌 황태자가 계승한다.”

발타자르의 말에 자비에고 주교가 이의를 제기했다.

“사전에 얘기한 것은 4황자가 황위에 오르는 것 아니었소?”

자비에고 주교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답했다.

“자비에고 주교. 그대에게도 나쁠 것은 없는 이야기 아닌가. 황태자가 황제가 된다면 당연히 대신들을 축출하고자 날뛰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대신들은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을 테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대신들이 모일 곳은 한 명밖에 없겠지.”

“그게 바로 나다?”

자비에고 주교는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그에게 이득일지에 대해서.

사실 어느 쪽이 황제가 되든지 그에게 나쁠 것은 없었다.

오늘 이 거사만 잘 넘길 수 있다면 누가 황제가 되건 간에 그의 권력은 공고할 테니까.

그렇다면 거사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 볼 때 발타자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필수였고 따라서 그의 뜻에 따라 황태자를 차기 황제로 추대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하지만 이것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선제후들은? 황제 선출권을 가진 그들의 과반수가 4황자가 차기 황제가 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네만.”

로마노프 공작가는 멸문하여 사라진 지금.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는 모두 6명으로 그중 칼 프란츠 대공과 메디치 공작을 제외한 남은 두 공작과 제도의 두 대신은 4황자를 차기 황제로 추대하는 것으로 입을 맞춘 상황이었다.

제국법에 의거하여 황제는 선제후들의 표결에 의해서만 선출되기에 발타자르가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기를 원한다고 한들 쉽게 그를 황위에 올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기존 체제가 유지되고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어차피 이번 거사가 끝이 나면 선제후 역시 새로이 개편될 것인데 무엇이 걱정인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발타자르의 말에 자비에고 주교가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번 거사를 통해 발타자르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네. 선제후의 위를 노리고 있는 게로군!”

확실히.

북부의 지배자로 떠오른 발타자르 외에는 달리 로마노프 공작가의 뒤를 잇는 선제후 후보는 전무한 상황이었다.

이번 거사만 잘 마무리된다면 일등 공신은 단연 발타자르일 테고 현재 공작 위에 있는 그가 더 오를 곳은 선제후뿐이니 발타자르가 선제후 직을 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얼. 자비에고 주교. 그대도 선제후의 위에 오를 생각이었지 않나.”

그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투의 말에 자비에고 주교가 묘한 미소와 함께 답했다.

“그렇긴 하지.”

* * *

와아아아─

병사들의 함성이 제도를 뒤흔들 정도로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제도를 지켜야 할 중앙군이 되려 황제를 향해 검을 뽑아 들며 황궁으로 진입하기 위해 공성전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근위대와 황실기사단이 분투하며 황궁을 지켜내고자 분투했지만, 수적 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단장! 이대로라면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부 기사단장 르판의 외침에 막 성벽을 넘어오는 적의 목을 쳐낸 황실기사단장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어떻게든 버텨라! 내무대신께서 어떻게든 활로를 열어주실 것이다! 그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버텨라!”

드미트리는 로열 랭크의 기사로 30대의 젊은 나이에 황실기사단장 직을 맡았는데, 젊은 나이의 그가 황실기사단장직을 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 누구보다 강했기 때문이었다.

“단장! 지금이라도 폐하를 모시고 황궁을 벗어나야 합니다!”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져만 가자 르판이 황제와 함께 몸을 피할 것을 제안했지만 중앙군이 황궁을 포위한 현재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니. 우리 황실기사단과 근위대는 목숨을 걸고 황궁을 사수한다.”

“단장!”

“제도가 저들의 수중에 떨어진 지금 도망치면 대체 어디로 도망친단 말이냐! 그리고 설령 저들을 뚫고 도망칠 수 있다고 한들 폐하의 몸이 버티시지 못하신다. 더 이상 말 말고 적들을 막는 것에만 집중해라!”

드미트리와 르판이 언쟁을 벌이던 그때 저 멀리서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와 보고했다.

“단장! 급보입니다. 폐하와 태자 전하를 피신시키기 위해 내무대신께서 황제파의 전력을 서문 인근에 집결시켜 두었다고 합니다.”

기사의 보고에 르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서둘러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저하를 모시고 비밀 통로를 통해 몸을 피하시지요.”

그러나 기사의 보고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만…….”

“다만? 무엇이냐?”

“황제파의 전력으로는 서문을 탈취하는 것이 고작인지라 근위대와 저희 황실기사단의 전력만으로 서문까지 길을 뚫고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내무대신의 전언을 들은 드미트리는 생각했다.

중앙군이 황궁을 포위한 지금.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다 한들 쉬이 적발될 것이고 곧장 적들의 맹렬한 추격을 받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누군가는 이곳에서 적들의 시선을 끌어야 했다.

어차피 병약한 황제는 그 격한 여정을 버티지 못할 테니 이곳에 남아야 할 것이고 그런 황제의 곁을 지킬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지. 황태자 전하를 모셔와라.”

“결정하신 겁니까? 알겠습니다. 속히 폐하와 황태자 전하를 모셔오겠습니다.”

드미트리가 피신하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한 르판이 서둘러 황제와 황태자를 모셔오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의 뒤에서 드미트리의 말이 이어졌다.

“아니. 서문으로 향하는 것은 황태자 전하뿐이다. 그리고 그 일을 책임지는 것은 르판. 자네이고.”

“단장!”

“앞서 말했듯이 놈들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면 격전을 치러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폐하의 몸이 버티지 못하신다. 그렇다고 여기서 버텨봐야 결국 대신 놈들의 뜻대로 흘러갈 뿐이니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봐야지 않겠느냐.”

드미트리의 말에 르판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황제 폐하를 지킨다. 내가 최대한 시선을 끌어줄 테니 자네는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 속히 서문으로 몸을 피하도록 하게.”

르판이 망설이는 듯하자 드미트리가 소리쳤다.

“놈들도 감히 황제 폐하의 옥체에 손을 대지는 못할 테니 내 걱정은 말고 서둘러 떠나거라!”

드미트리의 말에 르판은 이를 악물더니 이내 드미트리를 향해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부디. 꼭 살아남으십시오.”

“자네도.”

말을 끝으로 드미트리는 재차 성벽을 넘어오는 적들을 저지하기 위해 격전을 재개하였고 르판은 황태자와 함께 황궁을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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