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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77화 (77/183)

공작이 회귀함 77화

발타자르의 진군 소식을 접한 대신들은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사실 그의 진군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발타자르가 얼마나 많은 대군을 이끌고 오든지 간에 제도를 함락시키기란 요원한 일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가 제도에 입성했을 때였다.

현재 대신들이 제도를 장악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제도에 흩어져 있는 황제파가 제 목숨을 도외시한 채 성문을 열어젖힌다면 발타자르, 북방의 흉폭한 맹수가 제도에 들어와 대신들의 목을 물어뜯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물론 이를 대비하여 각 성문에 다수의 병력을 주둔시켜 두었기에 가능성이 낮은 일이기는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관건은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황제만 손에 넣는다면 황제파가 쉽게 경거망동하지 못하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황제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진군 중인 발타자르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몰아낼 수 있을 것이었다.

만약 대신들이 황제를 손에 넣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제도 진입을 시도한다면 반역죄를 물어 눈엣가시 같은 발타자르를 쓸어버릴 수도 있고 말이다.

“외무대신. 왜 그러시오?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이오?”

법부대신 채드윅 골드하먼이 회의 내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자비에고 주교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자비에고 주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허허. 총명하던 눈도 탁하고 매번 허공을 응시하기 일쑤니 아들처럼 아끼던 켈마르크 백작을 잃은 충격이 매우 컸나 보오.”

채드윅의 위로에 자비에고 주교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거. 괜히 신경 쓰게 한 것 같아 죄송하군요.”

웃으며 말하는 자비에고 주교의 눈길은 몹시도 서늘했다.

승냥이 같은 놈.

켈마르크 백작이 발타자르에게 사로잡힌 이후 그 세력이 위축된 자비에고 주교를 가장 먼저 물어뜯은 이가 바로 채드윅이었다.

물론 자신도 채드윅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똑같이 행동했겠지만.

“그보다 이번에 발타자르 공작의 손에 함락된 곳 중에 스쿤다 남작령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곳의 영주인 스쿤다 남작이라면 법부대신의 사위 아니었소?”

자비에고 주교의 일격에 시종일관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채드윅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막내 녀석이 성화더이다. 허허.”

“이것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듣기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선물을 보낼 정도로 사위 사랑이 각별하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스쿤다 남작은 채드윅의 비밀 재산을 관리하는 일종의 비밀 금고였다.

스쿤다 남작령은 제도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주변이 채드윅의 파벌에 속한 영주들뿐인지라 다른 대신들이 함부로 손 쓰기 어려운 곳이기에 비밀 금고로 삼았는데 하필이면 발타자르가 그곳을 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영지가 함락되고 스쿤다 남작이 발타자르에게 포로로 잡혔으니 그동안 채드윅이 쌓아온 비밀 재산들이 어찌 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자비에고 주교는 이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어쩔 수 없지요. 잃어버린 영지야 다시 찾으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켈마르크 백작 일로 정신이 없을 텐데도 이리 제 걱정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채드윅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져 있었다.

“별말씀을요. 뜻을 같이하는 동지끼리 걱정해 주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요.”

자비에고 주교가 그런 채드윅을 바라보며 너스레를 떨자 군부대신 칼리우스 프로이덴이 두 대신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서로를 위하시는 모습이 몹시도 보기 좋습니다. 하나 거사를 앞둔 지금은 거사에만 신경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소이다.”

칼리우스의 말에 자비에고 주교와 채드윅이 고개를 숙여 보이며 사과의 뜻을 전했고 잠시 중단되었던 회의가 재개되었다.

“그럼, 자비에고 주교와 세 대신께서는 각 성문을 관리해 주시고 나머지 두 대신은 저와 함께 황제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칼리우스의 말에 이견이 없다는 듯 일곱 대신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발타자르의 진군에 따라 대신들의 계획이 앞당겨지기 시작했다.

* * *

제도 탈라브하임은 동쪽으로는 강이 서쪽으로는 산맥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군이 움직일 수 있는 북쪽과 남쪽에는 각기 관문 요새를 건설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지형 조건과 관문 요새들을 뚫고 제도에 도착한다고 하여도 공략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마법진에 의해 보호받는 성벽과 성문.

주변 일대를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함정 마법들이 도처에 설치되어 있기에 관문 요새를 통과하였다고 해도 마법사가 전무한 상황에서 제도를 공격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거기다 제국 4대 마탑의 마법사들을 비롯해 4인의 아크메이지들이 상주하고 있기에 사실상 제도를 공략할 수 있는 세력은 대륙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전무했다.

따라서 내부에 내통자가 있지 않은 이상 얼마나 많은 대군을 이끌고 오더라도 결코 제도를 함락할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 * *

“크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풍경에 트리스탄이 감탄을 토해내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제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되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웅장함을 자랑했다.

높이 솟아오른 성벽과 그 성벽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문양의 마법진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을 보는 것만 같았다.

또한, 제도의 각 성문을 따라 이어진 길들은 얽히고설켜 묘한 문양을 이루고 있었는데, 평범한 이들은 그저 감탄하고 넘어가겠지만 실상은 위급 상황이 발생할 경우 제도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키는 강력한 마법진이었다.

“저희가 이끌고 온 군으로만 공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겠는데요?”

제도의 모습에 감탄만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사이에 ‘견적’을 내본 듯했다.

“그래서 서제스 백작을 이리 끌고 온 것 아니겠나. 그의 장남인 데릴 남작이 제도 북문을 책임지는 수비대장이니 큰 싸움 없이 쉽게 제도에 진입할 수 있을걸세. 안 그런가? 백작.”

발타자르의 부름에 서제스 백작이 재빠르게 발타자르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 숙여 보였다.

“물론이지요. 공작 각하. 절 보내주시면 바로 성문을 열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리하게.”

서제스 백작의 말에 발타자르가 별다른 조치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했다.

생각보다 발타자르가 쉽게 수긍한 덕에 신이 난 서제스 백작이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하며 고개를 숙여 보이곤 헐레벌떡 성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그냥 혼자 보내면 안 되지 않나요?”

달려가는 서제스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트리스탄이 묻자 발타자르가 웃으며 답했다.

“별 상관없네.”

그 태연한 말투에 트리스탄은 발타자르가 이미 무언가 조치를 취해 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제스 백작을 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냥 보내기는 그러니까 제가 따라갈게요.”

트리스탄이 감시역을 자청하며 나섰다.

“마음대로 하게.”

발타자르가 수락하자 트리스탄이 휘하 기수들을 이끌고 빠르게 서제스 백작의 뒤를 쫓았다.

* * *

빠르게 성문 앞으로 달려간 서제스 백작은 성벽 위에 선 이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발타자르군을 향해 두 팔을 힘차게 휘저어 보이기 시작했다.

“저거. 오라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아마도 그럴 걸세.”

“……수작질이 너무 빤히 보이는데. 이거 당해주려니 괜히 기분이 찝찝하군요.”

가웨인이 굳게 닫힌 성문 앞에서 팔을 휘젓는 서제스 백작을 보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제 무덤을 제가 파는 것이지. 자, 가세. 서제스 백작이 제 삶을 불태우며 열연을 펼치고 있으니 관객 된 입장에서 그에 호응해 주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발타자르가 군을 이끌고 천천히 북문을 향해 진격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발타자르군이 북문의 바로 앞까지 당도하자 성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야 할 서제스 백작의 장남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성벽 위의 궁수들이 발타자르군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겨누었다.

“하하! 네놈도 이제 끝이다! 발타자르!”

서제스 백작이 돌연 실성한 듯 웃으며 소리쳤다.

“잠시 후면 대신들의 명을 받은 중앙의 영주들이 대군을 이끌고 몰려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놈은 앞뒤로 포위되는 형국이 되어 전멸을 면치 못하리라!”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인듯했다.

“억울하게 죽어간 내 봉신들과 병사들의 원한을 갚아주겠노라!”

두 팔을 벌린 채 소리치는 서제스 백작의 모습은 마치 신파극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보였다.

“한심하기는.”

옆에 서 있던 트리스탄이 한심함을 가득 담은 눈길로 그런 서제스 백작을 바라보는 가운데 발타자르가 천천히 말을 몰아 서제스 백작을 향해 다가갔다.

“백작.”

“이제 와 내게 애원한들 소용없다! 나는 이 한목숨을 걸고 죽어간 내 부하들의 원한을 갚는 것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만. 그리 즐거워하기엔 조금 이르지 않나?”

“흥! 태연한 척해도 소용없다. 속으론 무척이나 조급할 테지. 하나 이미 화살은 내 손을 떠난 뒤다! 나 하나 어찌한다고 해도 이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발타자르가 자신만만해하는 서제스 백작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였다.

“백작. 설마 내가 자네만 믿고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제도로 향했다고 생각한 것인가?”

말과 동시에 발타자르가 손을 따악 하고 튕겼다.

그러자 어떤 일이 있어도 굳건히 닫혀 있어야 할 성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구구궁…….

그 이변에 서제스 백작이 당황하여 열리기 시작하는 성문을 손가락질했다.

“어…… 어어? 이게 왜……?”

서제스 백작이 당황하건 말건 간에 성문은 빠르게 열렸고 열린 성문을 통해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미소 짓는 태양이 새겨진 깃발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뒤이어 대규모 사제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슈미트라 교단?”

서제스 백작이 그들을 보곤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들이…… 왜?”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슈미트라 교단은 자비에고 주교의 세력으로 자비에고 주교는 발타자르와 대척점에 선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였다.

한데, 그런 슈미트라 교단이 어째서 성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백작. 자네 아들이 함께 오는 군 그래.”

발타자르의 말에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보던 서제스 백작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행렬을 응시했다.

사제들의 긴 행렬이 끝날 무렵 은빛으로 빛나는 풀 플레이트로 무장한 크루세이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가마를 타고 있는 한 노인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되었다. 이만 내 발로 걸어가마.”

노인의 말에 가마가 아래로 내려가고, 곧이어 노인이 가마에서 내려 터벅터벅 발타자르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제들과 크루세이더들이 그런 노인의 앞길을 열어주며 길을 만들자 노인의 손에 쥐어진 무언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금세 깨달은 서제스 백작이 목청이 터져라 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데리이일!”

눈이 까뒤집힌 서제스 백작이 노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에 노인은 손에 들고 있던 데릴의 수급을 툭- 앞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달려가던 서제스 백작이 다급히 바닥을 구르는 데릴의 수급을 품에 안고는 통곡했다.

“으허허헝…… 내 아들아! 어찌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냐!”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통곡하던 서제스 백작이 돌연 고개를 휙 들더니 노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자비…….”

퍼억-

그러나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노인의 옆에 서 있던 크루세이더 하나가 철퇴로 서제스 백작의 머리통을 으깬 탓이었다.

투둑-

서제스 백작의 머리통이 으깨지며 그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지더니 노인의 뺨까지 와 닿았다.

“거참. 살살하지 그랬나.”

노인이 제 뺨에 묻은 살점을 엄지로 훑어 내곤 투덜거렸다.

“죄송합니다. 주교님.”

이에 크루세이더가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고 노인은 한숨과 함께 머리통이 으깨진 서제스 백작의 시신을 지나쳐 발타자르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 아닌가? 발타자르 공작.”

노인이 발타자르를 응시하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단숨에 말 위에서 내려와 노인을 향해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어서 오시게. 자비에고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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