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76화
“장군. 그 문신은 무엇입니까?”
바르바토스와의 동맹 체결 이후 레오나스로 돌아가는 길.
가웨인이 발타자르의 귓불부터 시작하여 목까지 내려오는 붉은 문신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아아, 이거 말인가?”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제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문신을 드러내어 보였다.
“바르바토스가 제법 독점욕이 강하더군.”
“괜찮으십니까? 혹시 몸에 무슨 이상이라도 있으십니까?”
가웨인이 문신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네. 이건 말 그대로 표식일 뿐이니까.”
발타자르의 목에 새겨진 문신.
이것은 마왕의 낙인이었다.
대게 마왕이 자신의 숙적에게 내리는 표식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다른 마왕들에게 이 자는 내가 점찍어둔 자이니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다른 마왕과 손을 잡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그보다 슬슬 황제파에서 안달 낼 때가 된 듯하니 레오나스로 전령을 보내게.”
“전령이라 함은……?”
“소집령에 응하여 레오나스로 복귀하지 않고 곧장 제도로 향할 테니 발맞추어 준비시켜둔 병력들을 출진시킬 수 있도록 하라. 그리 전하게.”
뜸은 들일만큼 충분히 들인 상황이었다.
지금쯤이면 큰 부담을 떠안으며 발부했던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영주들로 인해 황제파는 큰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소집령은 곧 대신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민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했다고 해도 제도를 장악한 대신들이 언제까지고 모를 리도 없을 테고, 한창 역모를 진행 중인 그들에게는 거칠 것이 없으니 자신들에게 칼날을 들이민 황제파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파의 의도대로 영주들이 제법 모였다면 모를까. 대다수가 소집령에 응하지 않은 상태에서 황제파는 대신들의 칼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으리라.
그러한 상황에서 발타자르가 등장한다면.
황제파는 발타자르에게 목을 맬 수밖에 없으리라.
“드디어. 제도 상경입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극적인 상황에서의 등장만큼 인상적인 것은 없지.”
* * *
제도의 상황은 발타자르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내무대신의 입장에서는 큰 위험부담을 떠안으며 발신한 소집령이었지만 황제파의 예상과는 달리 소집령에 응한 영주는 몇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없느니만 못한 수준.
실로 낭패였다.
대신들 쪽에서는 밀서의 정체에 대해 알아차리자마자 황제파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살기등등한 그들의 최근 행보로 볼 때 황제파는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은 오늘도 황제파의 귀족들이 대신들에 의해 투옥되었다는 소식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무대신이 조반니 메디치의 제안을 수락했던 것은 어느 정도 가망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프락시온 제국은 천 년이라는 장대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제국이었다. 기나긴 역사만큼이나 위험도 많았고 그때마다 뜻있는 충신들이 나서 제국을 구원하곤 했었다.
내무대신은 이번에도 역시 충신들이 나서 제국을 좀먹는 대신들을 몰아내고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제국을 구원하리라 생각했었다.
물론 내무대신이 마냥 낙관적으로 생각하고 일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칼 프란츠 대공과 메디치 공작가.
그리고 최근 황제파에 가담한 발타자르 공작이 나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패를 까놓고 보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칼 프란츠 대공은 몬스터들의 준동으로 인해 발이 묶였으며, 이 일을 주도했던 조반니 메디치는 그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공작가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쉬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지방의 권세 있는 영주들은 눈치를 보며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발타자르 공작은 지금까지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
“하늘이 제국을 버리시는 것인가.”
내무대신이 침통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대신들의 손길이 시시각각 황제와 황태자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는 지금.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대신들에게 시간을 더 주었다가는 정말로 손 한번 써보지 못하게 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될 테니까.
지금까지 끌어모은 전력으로는 대신들의 야욕을 막아내기에 한없이 미흡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당할 바에야 차라리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라고 해도 감행할 수밖에.
“후우…….”
결단을 내린 내무대신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말을 몰아 그의 저택으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설마……?”
혹시 대신들이 드디어 일을 벌인 것은 아닌가 하고 내무대신이 걱정하는 가운데 황제파의 귀족들이 앞다투어 내무대신을 찾아왔다.
내무대신의 걱정과는 달리 그들이 헐레벌떡 내무대신을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급보! 급보입니다! 발타자르 공작이 영내 진입을 거부한 데르챠 남작령을 무력 점거하였다 합니다!”
“급보입니다! 발타자르 공작께서 디나라스 요새를 격파! 제도로 직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발타자르 공작 각하께서…….”
갑작스러운 발타자르의 제도 진격.
바로 그것이었다.
* * *
사전에 어떠한 언질도 없이 기습적인 진격을 감행한 발타자르는 5만의 군세를 이끌고 빠른 속도로 제도를 향해 진격해갔다.
그들에게는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길을 열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강제로 길을 열어젖히며 제도로 향했다.
그러한 발타자르의 행보는 역모나 다름이 없었으나, 내무대신이 전한 소집령이 그 모든 것을 무마시켜 주었다.
황제가 위험에 처하여 충신이 황제를 구하기 위해 제도로 향한다는 이 명분은 그 어떠한 명분보다도 강력한 것이었기에.
황제파보다 먼저 사전에 이 소식을 접한 대신들은 발타자르가 제도에 도착하면 일이 크게 틀어질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각 지방의 영주들에게 결코 길을 내어주어서는 안 된다며 엄명을 내렸지만, 기나긴 평화에 나태해진 중앙의 병사들은 수많은 전투로 단련된 발타자르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발타자르군의 앞을 막아서는 중앙의 영주들은 맞부딪치는 족족 대패를 면치 못하며 추풍낙엽처럼 허무하게 쓰러졌다.
병력의 수적 우세는 무의미했다.
마스터와 다수의 로열랭크의 기사들.
수많은 실전으로 단련된 강병들까지.
마스터 혹은 다수의 마법사가 나서지 않는 이상에야 발타자르군의 앞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3개 영지와 2개 요새가 사흘이 되기도 전에 함락당했고, 발타자르는 그야말로 노도와도 같은 기세로 제도를 향해 진격했다.
그렇게 진격 5일 만에 발타자르는 제도 탈라브하임을 목전에 두었다.
* * *
“시시하네.”
시큰둥한 표정의 트리스탄이 불타오르는 성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막 격전을 치르고 온 듯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한동안 성벽을 응시하던 트리스탄이 시선을 옮겨 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무릎을 꿇은 한 중년인과 그를 내려다보는 발타자르가 있었다.
“꼴사납긴.”
트리스탄이 중년인을 흘겨보며 말했다.
길을 열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결사 항전을 불사할 태도를 고집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살려달라 애원하는 꼴이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공작 각하. 저, 전 군무대신의 명에 따른 죄밖에 없습니다.”
제도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
칼름 요새를 책임지던 서제스 백작이 발타자르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살려달라 애원했다. 그런 그의 뒤로는 무장을 해제당하고 결박된 칼름 요새의 병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백작.”
서제스 백작을 응시하던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예, 예! 각하!”
서제스 백작이 황급히 대답하며 발타자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내 몸을 흠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내려다보는 발타자르의 눈빛이 몹시도 차가웠기에.
“본 공작은 위험에 처한 황제 폐하를 구하기 위해 제도로 향하는 길이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기에 정식 절차는 아니었으나 내무대신의 인장이 찍힌 공문까지 내보이며 길을 내어줄 것을 요구하였지. 한데 자네는 그 앞을 막아섰다.”
발타자르의 말에 서제스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보이며 아량을 베풀어 줄 것을 청했다.
“죄송합니다. 각하. 군무대신에게 처자식이 인질로 잡혀 있는 터라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네 처자식이 황제 폐하의 안위보다 중하다 그 말이더냐?”
“그, 그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황급히 변명하는 서제스 백작을 향해 발타자르가 손을 내밀며 말을 쳐내었다.
“듣기로 자네의 장남이 제도의 북문을 지키는 수비대장이라지?”
“예, 예…… 그렇습니다.”
발타자르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서제스 백작이 이내 자신의 장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낸 목적에 대해 깨닫고는 황급히 말했다.
“혀, 현재 제도의 각 성문은 대신들의 수족들이 점거한 상황입니다. 어느 문으로 향하시든지 각하에게 쉬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제도는 대신들의 세력권.
황제파가 그동안 얼마나 힘을 모아두었는지는 모르지만, 성문을 열기도 전에 모두 제압당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북문은 다릅니다. 각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제 자식놈이 북문을 책임지고 있으니 절 데리고 가 주신다면 바로 성문을 열 수 있게 조치하겠습니다.”
물론 서제스 백작은 순순히 성문을 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의 목숨은 부지할 수 있겠지만 제도에 있는 그의 처자식들의 목숨은 장담하기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리 말한 것은 속내에 음흉한 꿍꿍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 길로 발타자르와 함께 제도로 향하면 자신의 봉신에게 명해 몰래 군을 이끌고 발타자르군을 뒤따라 오도록 조치한 후 제도에서 발타자르군을 앞뒤로 포위할 생각이었다.
일이 잘만 풀린다면 제 목숨을 건사하는 것은 물론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니 제도 대신들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의 목숨을 잃게 된다 하더라도 적어도 처자식들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그의 꿍꿍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죽여라.”
갑작스러운 사형 선고에 서제스 백작은 발타자르의 마음이 돌변하여 자신을 죽이려는 줄 알고 눈을 질끈 감았다.
동시에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처참하게 울려 퍼지던 비명은 곧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사그라졌고 아무리 기다려도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자 서제스 백작이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그를 제외한 그의 수하들의 싸늘한 주검이었다.
서제스 백작이 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 광경을 바라보는 가운데.
“자네가 한 말은 필히 지키는 것이 좋을걸세.”
발타자르의 서늘한 음성이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