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75화
바르바토스.
앞서 언급했듯이 서열 8위의 마왕.
지금은 중간계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을 회복하기 위해 저런 가냘픈 소녀의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실체는 하체는 산양, 상체는 인간의 모습에 이마에는 길쭉한 산양의 뿔이 자라난 거대한 체구의 양인족羊人族이었다.
고위 서열의 마왕 중에서도 특히나 무력에 특화된 그녀는 대전 당시 마스터 둘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다.
자신보다 약한 이와는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드는 그 성정으로 인해 이렇다 할 동맹 하나 없었지만, 그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난세 속에서 홀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결국 그 독불장군 같은 성정이 독이 되어 그녀는 사방에서 협공을 당하며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숨겨진 비사가 있었는데 사실 바르바토스는 프리드리히 공작과 동맹을 맺고 있었다.
바르바토스는 언젠가 바알을 쓰러뜨리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프리드리히 공작은 로마노프 공작가라는 강력한 지배자를 잃은 북부를 손에 넣기를 원했다.
이해관계가 일치한 두 세력은 서로 손을 잡았고, 바르바토스의 도움 아래 결국 프리드리히 공작은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북부를 손에 넣게 된다.
이후 바알과 일전을 벌이려는 바르바토스가 프리드리히 공작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언급하며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프리드리히 공작은 이를 거부하고 정치적 공작을 펼쳐 여러 세력과 손을 잡고 바르바토스를 공격하였다.
배신당한 바르바토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프리드리히 공작의 배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격렬한 싸움 끝에 숨을 거두었다.
그만큼 바르바토스는 입이 무겁고, 신의가 있으며 또한, 일반적인 마왕들과 달리 마신을 맹신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마왕 중 하나였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발타자르에게 있어 바르바토스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동맹 상대였다.
“각하.”
스페디악이 황급히 바르바토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죽여주십시오. 감히 각하의 동면을 깨뜨린 죄.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힐끗- 그런 스페디악을 바라보던 바르바토스가 고개 숙인 스페디악의 머리를 자그마한 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됐어. 어차피 계속 잠만 자느라 몸도 찌뿌둥하던 참이었고. 잠시 바람 쐰다고 생각하면 되지.”
말하곤 바르바토스가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샛노란 그녀의 눈동자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발타자르가 말에서 내려와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반갑네. 바르바토스.”
발타자르가 인사하자 바르바토스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지며 발타자르를 올려다보았다.
“이건 또 어디서 솟아난 물건이야?”
그런 그녀의 눈동자에는 흥미로움과 호승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나 호승심은 이내 눈 녹듯 사라졌다.
“지금 당장 싸우면 필패겠네.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비슷비슷할 것도 같고. 거기다 정령의 냄새도 진해. 이 정도면 정령왕급인데……. 신기한 녀석이네? 너 인간 맞아?”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발타자르의 대답에 잠시 그를 응시하던 바르바토스가 피식 웃었다.
“하긴. 아무렴 어때. 그보다 날 찾아온 목적이 뭐야? 보아하니 싸우려고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바르바토스가 팔짱을 끼며 묻자 발타자르가 답했다.
“동맹 제의일세.”
발타자르의 말에 바르바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동맹? 너. 내가 누군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아무렴. 동맹을 제안할 상대를 모르고 찾아올까.”
“거참. 웃긴 놈이네. 내 살면서 동맹을 하자고 찾아온 인간은 네가 처음이야. 물론 인간과 이렇게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말하곤 그녀가 등을 돌려 다시 동굴 안을 향해 걸어갔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따라와. 안에서 이야기하자.”
그렇게 동굴 안을 향해 걸어가던 그녀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만 돌려 발타자르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어 보였다.
“아 참. 데리고 온 애들은 밖에 두고. 아무래도 인간들이 안에 들어왔다가는 우리 애들이 흥분해서 날뛸 것 같거든.”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넘쳐 흘렀다.
하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실제로 병사들이 동굴 안으로 진입한다면, 최소한의 지능이 있는 것들이라면 몰라도 본능밖에 남지 않는 하급 마물들이 병사들을 향해 달려들 것이었다.
“설마 나와 동맹을 맺자는 자가 그 정도 담력도 없는 건 아니겠지?”
바르바토스가 짓궂은 농을 건네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
발타자르가 바르바토스의 뒤를 따라 동굴 앞으로 이동하자 바르바토스가 앞발로 땅을 두어 번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새하얀 빛무리가 두 존재를 감싸더니 이내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눈 앞을 가렸던 새하얀 빛이 사라지자 드러난 것은 거대한 침상과 티 테이블, 그리고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는 벽난로가 전부인 방이었다.
발타자르가 방 안을 가볍게 한번 훑어보는데 벽면에 걸린 사자 머리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바라보니 그제야 사자 머리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서열 20위 단정왕 푸르손의 수급이었다.
“아, 그거? 자리 좀 비워 달라니까. 싫다길래.”
바르바토스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알 만했다.
본래 이 동굴은 푸르손의 거처였으리라.
바르바토스는 그것을 힘으로 빼앗은 것이고.
“자자, 편히 앉아.”
자리를 권한 바르바토스가 침상에 몸을 던지듯 뛰어올라 드러누웠다.
발타자르가 그녀가 권한 자리에 앉자 바르바토스가 몸을 뒤척이며 모로 누워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동맹을 맺자고 했지?”
“그렇네.”
“왜? 아니, 너와 동맹을 맺는다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지?”
바르바토스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답했다.
“내 소개가 늦었군.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공작일세. 자네가 자리 잡은 북부의 실질적인 통치자이지.”
“그래. 반가워, 발타자르. 난 바르바토스야. 그래서 대답은?”
발타자르의 소개에 바르바토스가 대충 답을 하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재촉했다.
성격 급하긴.
하긴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닌가?
하고 발타자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했다.
“사실 자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다네. 자네 휘하의 마족 혹은 마물들이 먹을 식량을 공급해 준다든가. 각종 병장기를 지급해 준다든 가 하는 것 말일세. 원한다면 막대한 재화를 줄 수도 있지.”
발타자르의 제안에도 바르바토스는 별 흥미가 돋지 않는 표정이었다.
“다 필요 없는데? 식량이야 저들끼리 잡아먹으면 되는 거고. 무기야 몸뚱이 자체가 무기라서 필요 없어. 그리고 내가 인간들 돈을 어디에 써?”
사실 바르바토스의 이런 반응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다른 마왕이라면 몰라도 그녀에게 가장 매력적인 제안은 딱 하나뿐이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찾아온 것이기도 하고.
“그런가? 그럼 이건 어떤가.”
툭툭- 테이블을 두드리던 발타자르가 진짜 제안을 꺼내었다.
“바알의 죽음.”
이 제안에 일순간 바르바토스의 눈이 크게 치켜 떠졌다.
그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터벅터벅 발타자르의 맞은편으로 걸어가더니 자리를 잡고 앉아 매끈한 두 다리를 꼬았다.
“그거…… 정말 흥미로운데? 계속해 봐.”
“자네가 바알과 일전을 벌일 무대를 마련해 주겠네. 그의 휘하에 있는 마왕들은 내가 해결해 주겠다는 소릴세.”
바알과 비견될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바르바토스가 쉬이 바알과 일전을 벌이지 못하는 것에는 바알 휘하에 있는 마왕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녀 휘하에 3대 맹장이라는 훌륭한 고위 마족들이 있기는 하지만 마왕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마왕도 없었다.
그녀의 독불장군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반면 바알은 힘과 세력.
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춘 마신을 제외한다면 실질적인 마계의 지배자였다.
바르바토스의 비원이 바알을 쓰러뜨리는 것이라고 해도 이렇게나 전력 차가 극심한 상황에서 무모한 싸움을 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네. 좋아, 그렇다면 내가 네게 줄 것은?”
“내가 따로 연락을 넣으면 주변 일대에서 날뛰어 주게.”
발타자르의 말에 바르바토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그게 끝?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나와 동맹을 맺겠다고?”
“원한다면 차후에 날 도와줘도 좋고.”
순간 바르바토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뱀과 같은 그녀의 샛노란 눈동자가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그녀의 지긋한 눈길에도 발타자르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물끄러미 바르바토스의 시선을 마주 응시했다.
“……능글맞은 놈이네. 아주 골수까지 빨아먹겠다는 거지?”
“무슨 말인가. 난 분명 주변 일대에서 날뛰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이미 답을 했네만.”
“지랄하네.”
바르바토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타자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곤 발타자르의 얼굴을 향해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서로의 숨결마저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자 바르바토스가 말했다.
“내가 바알을 잡을 때까지 날 부려먹으려는 심보잖아?”
말하는 바르바토스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넌 내게 있어 네가 가지는 가치를 잘 알고 있어. 스페디악에게 한 무력시위나 내게 제시한 제안이 그걸 증명해 주지. 넌 네 말대로 처음의 제안 이후로 내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나로서는 네 요구 조건을 들어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네게 협력할 수밖에 없겠지. 왜? 이대로 네 제안을 거절한다면 앞으로 너처럼 내 입맛에 맞는 동맹을 구하기란 요원할 테니까. 아니야?”
바르바토스의 물음에도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사소한 요구로 시작해서 넌 서서히 날 좀먹겠지. 아주 천천히. 넌 뱀이야. 서서히 내 목을 옥죄어 오는 뱀.”
“그래서. 싫은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바르바토스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그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알 수 없는 희열감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뱀이 내 목을 조여온다면. 찢어 죽이면 될 뿐이지.”
이것은 경고였다.
자신을 이용하는 것까지는 묵인해 주겠지만 만약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녀의 목에 칼날을 들이민다면 결코 용서치 않으리라는 경고 말이다.
“네 제안. 받아들이지. 동맹. 맺자 그거.”
바르바토스가 발타자르에게서 얼굴을 떼어내며 말했다.
그러나 가까운 것은 여전했다.
“대신 조건을 하나 추가해야겠어.”
“그게 무엇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바르바토스가 손을 뻗어 그의 양 뺨을 손으로 감싸더니 재차 제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바르바토스의 새빨간 입술이 발타자르의 입술과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것이 맞닿는 일은 없었다.
콰직-
발타자르는 귓불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바르바토스가 귓불을 깨문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천천히 발타자르에게서 얼굴을 떼어내며 씨익- 웃었다.
미소 짓는 그녀의 입가에는 붉은 혈흔이 번들거렸다.
“다른 연놈이랑 붙어먹으면 사지를 찢어발겨 줄 테다.”
할짝- 혀를 내밀어 입가에 묻은 혈흔을 닦아내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요사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