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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73화 (73/183)

공작이 회귀함 73화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초췌한 몰골의 빌로스가 브라이언 남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물음에 브라이언 남작이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영주들이 하나같이 같은 태도를 고수하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발타자르 공작이 사전에 손을 써둔 것 같습니다.”

혁명단에게 대패한 이후 빌로스는 발타자르의 추격대를 피해 돌고 돌아 서부에 진입했다.

빌로스는 이곳에서 잠시 세력을 추스르며, 그동안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서부 영주들의 힘을 빌려 북부를 탈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발타자르의 발 빠른 조치로 인해 인근의 영주들에게 영지 내로 진입하는 것을 거부당했고 그것은 어느 영지를 가든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는데 뒤로는 발타자르의 추격대가 쫓아오고 있으니 실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빌 헬름 공작 각하께서는? 그분께서도 답이 없으시던가?”

서부의 지배자인 빌 헬름 공작은 의리를 중시하며, 덕망이 높고 도량이 넓었다.

일례로 빌 헬름 공작이 젊었을 적.

호위도 대동하지 않고서 평민으로 위장하여 민생 시찰을 끝마친 그가 가문으로 돌아가던 중 큰 개울을 건너게 되었다.

그 개울은 물살이 너무나 셌지만, 다른 길로 가게 된다면 크게 빙 돌아가야 하기에 시간이 없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개울을 건너게 되었다.

그러던 찰나에 어떤 노인이 그를 부르며 도움을 청했다. 이미 한번 젖은 몸이기에 빌 헬름 공작은 흔쾌히 노인을 업어 재차 개울을 건넜다.

그러자 노인이 ‘자네를 부르다가 짐을 두고 왔으니 다시 나를 업어다 주게’라고 말했다.

이에 빌 헬름 공작은 군말 없이 노인을 다시 업어 개울을 건넜다. 그렇게 몇 번을 왕복하여 개울을 건너게 된 노인이 공작에게 물었다.

‘자네는 어찌 두 번이나 나를 업고 건널 생각을 하였는가? 무엇을 바라고 한 번 더 수고로움을 참았는가?’

노인의 물음에 빌 헬름 공작은 ‘잃어버리는 것과 두 배로 늘어나는 차이 때문입니다. 제가 두 번째로 건너기를 마다하게 되면 첫 번째의 수고로움 마저 값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건너면 앞서의 수고로움도 두 배로 셈 쳐 받지 않겠습니까?’ 하고 답하였다.

이처럼 능력 면에서는 여타의 선제후들에 비해 가장 아래로 평가받지만, 빌 헬름 공작의 휘하에는 그의 인품에 반한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즐비해 있었다.

오죽하면 서부에서 성군이라 칭송받을 정도였다.

빌 헬름 공작과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지만, 빌로스는 이러한 빌 헬름 공작의 평판에 한 가닥 희망을 담아 그에게 구원 요청을 보낸 상태였다.

“아직까지는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

“그런가…….”

빌로스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 누구도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는 가운데 발타자르의 손길이 시시각각 그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남은 병력과 군량이 어느 정도인가?”

빌로스의 물음에 잠시 병사들을 바라본 브라이언 남작이 깊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3만입니다. 군량은…… 오늘 하루 버틸 양밖에는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빌로스는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혁명단을 토벌하기 위해 토벌대를 구성하고 센피단 지방으로 진격할 때만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토벌대를 이끌고 혁명단의 토벌에 나선 것이 잘못이었는가.

아니면 아그리파의 말을 믿고 발타자르 공작을 경시하여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방관하며 후계 다툼에 심혈을 기울인 것이 문제였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발타자르가 오슬로에 방문할 당시 많은 이권들을 너무 손쉽게 내어주어 그가 성장할 기반을 마련해 준 탓이었는가.

이전의 기세 높은 정예군은 오간데 없고 패잔병처럼 초췌한 몰골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빌로스가 짙은 후회가 담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정말 더 이상 달리 방도가 없었다.

“저, 적습입니다! 발타자르군이 코앞까지 들이닥쳤습니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발타자르군을 바라보며 빌로스는 결정을 내릴 순간임을 직감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브라이언 남작이 황급히 도망쳐야 한다 말했지만, 빌로스는 가만히 고개를 내저었다.

“피하다니. 어디로 말인가. 서부의 영주들은 내게 등을 돌렸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는데. 대체 어디로 도망치란 말인가.”

“주군…….”

“항복하겠다.”

빌로스의 말에 브라이언 남작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주군!”

“더 말하지 말게. 이젠 정말 끝이네.”

모든 것을 초탈한 표정으로 말하는 빌로스의 모습에 브라이언 남작은 더 이상 권유하지 못하고 절망 어린 눈동자로 다가오는 발타자르군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빌로스와 브라이언 남작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순간.

빌로스 군의 후미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함성이 들려왔다.

이에 깜짝 놀란 두 사람이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거대한 군세가 물밀 듯 밀려오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군세가 다가오고 그 선두에서 높게 치솟은 깃발을 발견한 브라이언 남작이 그것을 보곤 군세의 정체를 파악해냈다.

“빌 헬름! 빌 헬름 공작가의 깃발입니다!”

브라이언 남작이 소리치며 가리킨 곳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살았습니다. 이젠 살았습니다.”

선제후.

빌 헬름 공작이 빌로스를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급파한 것이었다. 천운이 빌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한편.

천운이 도망친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 모두에게 와닿은 것은 아니었다.

대신들을 믿고 중앙으로 도망친 웨즈는 빌로스와 마찬가지로 영지 내로 진입을 거부하는 중앙 영주들의 행태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으냐! 대신들께서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웨즈의 노기 어린 외침에 성벽 위에 선 데르챠 남작이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머금으며 답했다.

“글쎄올시다. 대신들께서 날 혼내시는 것보다는 웨즈 공자의 목이 달아나는 것이 먼저일 것 같소이다만?”

말하며 데르챠 남작이 턱짓하자 웨즈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발타자르의 군대가 서서히 웨즈의 목을 옥죄어 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 이 일은 결코 잊지 않겠다!”

“그러시던지.”

데르챠 남작이 비웃음을 남기곤 성벽을 내려갔다.

그 모습을 타오를 듯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응시하던 웨즈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홱- 하고 돌리며 외쳤다.

“저놈들을 도륙 내버리리라! 전군 전투준비!”

웨즈의 외침에 웨즈의 병사들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얼굴에 절망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전투가 그리 희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 * *

4만의 웨즈군에 비해 발타자르군의 추격대는 그 수가 1만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4배나 차이나는 병력의 수적 우세가 무색하게 웨즈군은 추풍낙엽처럼 발타자르군의 검에 의해 쓰러져 갔다.

그들이 발타자르군에 의해 압도당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웨즈군의 한복판에서 거침없이 날뛰는 두 사내 때문이었다.

“크하하! 더! 더! 더 덤벼봐라!”

장창을 마치 제 몸처럼 다루며 소용돌이치듯 회전시키며 휘두르는 도원경의 무위는 발타자르군 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웨즈군의 병사, 기사 할 것 없이 감히 그의 창을 감당할 자가 없었다.

도원경의 창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병사가 십수 명씩 나가떨어지고, 기사 여럿이 합공을 해야 간신히 발목을 붙잡을 정도였다.

그동안 트리스탄과 갤러해드를 비롯하여 발타자르 휘하의 맹장들에게 혹독한 실전 경험과 훈련을 받은 도원경은 단시간에 발타자르군 내에서도 수위에 손꼽힐 무위를 가지게 되었다.

인성만큼은 실력에 비례하지는 않았지만.

“이 몸을 상대할 자 누구냐!”

전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그의 외침에 기세에서 짓눌린 웨즈군의 병사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그를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은 탓이었다.

한번 기세에서 짓눌리기 시작하자 더욱 도원경을 상대하기가 난해해졌다.

비단 도원경만이 아니었다.

전장의 반대편에서는 갤러해드가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휘두르며 적진을 휩쓸고 다니니 웨즈군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몸이 바로 천하무쌍 도원경 님이시다!”

전의를 상실한 웨즈군을 그야말로 도륙을 내버리며 도원경이 소리쳤다.

그 순간.

피잉-

화살 한 발이 그의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들었고, 도원경이 간발의 차이로 화살을 피해내었다.

그러나 화살은 처음부터 그를 맞출 생각이 없었다는 듯 도원경의 측면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오던 암살자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퍼억-

암살자가 쓰러지고 그것을 잠시 지켜본 도원경은 이내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한 여인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장에서 방심은 금물이라고 안 배웠어?”

말을 몰아 다가온 트리스탄이 말하자 도원경이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내 먹잇감이었다고!”

도원경이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고래고래 소리치자 트리스탄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어쩌라고.”

그 모습에 도원경이 창날을 그녀를 향해 겨누며 재차 소리쳤다.

“하! 이 할망구가! 내가 언제까지 당하고만 있을 거 같아!”

일순간 트리스탄의 눈동자에 살기가 맴돌았다.

북부의 한파를 닮은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가 도원경을 응시했다.

“너. 자꾸 까불면 죽인다.”

순간 도원경이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기세에서 밀렸다는 것을 깨달은 도원경이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다시 소리치려는데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손길이 있었다.

퍼억-

“억-!”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휘둘러진 그 손길에 후려 맞은 도원경의 몸이 앞으로 쓰러지더니 볼썽사납게 땅바닥으로 나자빠졌다.

“……천둥벌거숭이가 따로 없군.”

도원경을 후려친 이는 바로 갤러해드였다.

전장이 마무리되자 티격대고 있는 두 사람이 눈에 띄어 바로 다가온 것이었다.

“어느 새끼가 감히…….”

잠시 머리가 멍해졌던 도원경이 이내 정신을 차리며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친 갤러해드에게 한마디 하려는데 그의 차가운 눈빛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계속 그렇게 까불면 사지를 분질러서 끌고 다녀주마.”

허언하는 법이 없는 갤러해드는 말을 꺼내면 그것을 기필코 지켜내었다.

그동안 그의 밑에서 몇 번 수련을 받으며 뼈저리게 그 사실을 몸소 체득한 도원경은 여기서 더 까불었다간 정말 사지가 부러진 채 끌려다닐 것이란 위기감을 느꼈다.

“아, 알았다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도원경이 태도를 돌변하며 다소곳한 모습을 보이자 트리스탄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갤러해드는 무서운 모양이네.”

트리스탄의 조롱에도 도원경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녀를 노려볼 뿐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트리스탄의 조롱에 대한 분노보다는 갤러해드의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탓이었다.

“드그브자.”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리는 도원경이었지만 트리스탄에게는 그저 우습게만 보일 뿐이었다.

“너는 어쩜 그리 한결같니. 인성도 네 실력만큼만 성장했으면 얼마나 좋아.”

“조용히 해라.”

갤러해드는 연신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한심하단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전투는 끝났고. 웨즈 공자를 비롯해 그의 수족들의 수급도 모두 취했으니 이만 돌아간다. 주군께서 기다리신다.”

빌로스는 서부로 망명하였으며, 웨즈는 제 수족들과 함께 목이 달아남으로써 로마노프 공작가의 남은 잔당들이 모두 정리되었다.

이로써 발타자르는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북부의 패자로 등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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