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72화
발타자르가 듀락 후작성을 점령하기 며칠 전.
제도에 흉흉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제도의 대신들이 작당하여 병약한 황제를 시해하고, 그들과 대립각을 세우는 현 황태자 대신 새로운 황족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은 마른 들풀에 불길이 번지듯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순식간에 제도를 집어삼켰다.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이 소문에 대해 떠들어 대었고 이것은 곧 제도 권력자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증거 하나 없는 뜬 소문일 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소문이 제도는 물론 제국 전역에 퍼져 나갈 기미가 보인다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정치적 명분은 충분했다.
한데 때마침 병약하던 황제가 회의 도중 쓰러지는 일까지 발생하니 소문에 신빙성까지 더해졌다.
황제파는 이때가 기회라 여기며 물 만난 물고기처럼 대신들이 가진 실권들을 회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압박했고 선제후들 역시 황제파의 기세에 편승하여 대신들을 향해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다.
대신들 입장에서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평소 그들의 행보와 소문이 맞물려 대신들의 목에 날카로운 비수가 들이밀어졌다.
일부 호사가들은 대신들이 한발 물러나 사태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릴 것이라 이야기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몸을 사리기보다는 되려 중앙군을 움직여 제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모든 게이트를 차단했다. 제도 바깥과 연결되는 모든 이동 수단, 통신수단을 차단한 대신들은 뒤이어 무력시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훈련을 빙자하여 완전무장을 한 병사들이 대규모로 시가행진을 하는 등 제도의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세상이 어둠에 잠기는 이변이 발생하니 발타자르가 북부의 통치권을 공고히 다지는 행보에 신경 쓰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 * *
“아저씨 말대로네. 소문을 잠재우려고 하기는커녕 되려 소문이 사실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제도를 통제하기 시작했다라…….”
제도에 심어 놓은 정보원의 보고서를 살펴보던 신시아가 피식 웃었다.
“무서운 건 알고 있었지만. 어휴……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니까.”
발타자르가 오슬로를 점령한 직후 신시아는 발타자르로부터 밀명을 받았다.
그 밀명이란 제도에 은밀히 대신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라는 것이었다.
처음 신시아는 이것이 괜히 제도 대신들의 심기를 자극하기만 할 뿐 별다른 이득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제도는 대신들의 세력권인 만큼 소문을 퍼뜨린다고 해도 금세 대신들에 의해 잠잠해질 것이고 곧 소문을 퍼뜨린 자의 꼬리를 잡기 위해 대신들이 혈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괜히 벌집을 들쑤시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일이었지만 신시아의 예상과는 달리 시기적절하게 황제가 쓰러지면서 소문은 사실로 둔갑하여 제도를 뒤흔들었다.
“이것까지 계산에 들어갔던 걸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도 신시아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평소 병약하다고는 하지만 황제가 언제 쓰러질지 알고 계산에 넣었겠는가. 미래를 볼 수 있지 않은 이상에야 말이다.
“단순히 시선을 돌리기 위해 벌인 일이 이렇게나 커졌다라. 천운이 아저씨를 따르네.”
신시아는 이것이 모두 우연이라 치부하기로 했다.
그것 말고는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 상황이니까.
“자자. 일해야지, 일.”
신시아가 제 뺨을 두드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운이든 뭐든 간에 발타자르가 원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니 자신은 그에 맞추어 보조하는 일을 하면 될 뿐이었다.
“어디…… 우리 아저씨가 제도 나들이를 좋아하시려나?”
키득거리며 신시아가 들고 있던 보고서를 내려놓았다.
그녀가 내려놓은 보고서에는 최근 황제파의 동향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는데, 가장 상단에는 황제파의 수장인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과 조반니 메디치가 밀회를 가졌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대신들에게 억눌린 개국공신 메디치 가문의 서자와 황제파 거두의 만남이라…….”
* * *
“장군. 부르셨다고 들었…….”
발타자르의 부름에 그의 집무실에 방문한 가웨인은 말을 하려다 말고 발타자르의 다리와 목에 찰싹 붙어 있는 두 여인을 발견하곤 피식 웃어 보였다.
“사이가 좋아 보이시는군요.”
두 여인.
아이린과 비비안이 가웨인의 말에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꺄르르 웃었다.
“두 분은 뵐 때마다 장군과 찰싹 붙어 계시는군요.”
아이린과 비비안이 레오나스에 방문한 이후로 두 여인은 한시도 발타자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가웨인의 말에 비비안이 생긋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우린 영혼의 실로 맺어진 사이인걸요. 그쵸, 린?”
비비안의 묻자 아이린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에요.”
가웨인의 말대로 아이린과 비비안은 각기 발타자르의 목과 다리에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딱 달라붙어 있었다.
그나마 아이린은 종종 엘룬 자매들과 함께 레오나스에 있는 본가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자리를 비우곤 했지만, 비비안은 한시도 발타자르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계약자와의 연결고리를 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는 하는데 그게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닌 것이 발타자르가 그런 비비안을 따로 제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웨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니 본가에라도 다녀오렴.”
“네, 그럴게요.”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이 그의 다리에서 떨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비비안은 못 들은 척하며 발타자르의 목 뒤로 쏙- 숨어버렸다.
“비비안. 자네도.”
“알겠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발타자르의 말에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아이린에게 쪼르르 날아갔다.
“천천히 놀다오렴.”
발타자르가 손을 흔들며 말하자 아이린과 비비안이 그런 발타자르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주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장군께서 전장에 나가신 이후로 많이 불안해하셨다고 하더군요.”
닫힌 집무실 문을 바라보던 가웨인이 말하자 발타자르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 내 업보이지.”
한숨과 함께 중얼거리는 발타자르로 인해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보다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가웨인이 묻자 발타자르가 그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앉게.”
가웨인이 발타자르가 권한 자리에 앉자 발타자르가 책상 서랍에서 한 통의 서찰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가웨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일단 살펴보게.”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서찰을 들어 펼쳐 보였다.
한데 한 통인 줄 알았던 서찰이 두 통이었다.
살펴보니 하나는 별다른 특색 없는, 누가 보낸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편지이고 다른 하나는 신시아에게서 온 보고서였다.
“읽으면서 듣게.”
서찰을 하나하나 훑어보는 가웨인에게 발타자르가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내무대신이 내게 보낸 밀서일세. 조만간 제도에서 각지의 대영주들에게 소환령을 내릴 것이니 그에 응답해 달라는 것일세.”
“황제파 쪽에서 결심을 내린 듯하군요. 한데 왜 갑자기 이렇게 급히 일을 치르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걸 대신들이 가만히 두고 보겠습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아직 그가 읽지 않은 신시아의 보고서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고에 따르면 제도에서 대신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네. 현 황제의 병사후에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황족을 차기 황제로 등극시킬 것이라더군.”
“그걸 사람들이 믿습니까? 지금도 저들 세상인데 굳이 그렇게 무리를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대신들이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황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그 기세가 드높다고 한들 역모란 제국의 민심을 등 돌리고, 각지에 퍼져 있는 선제후들과 대영주들을 중앙으로 불러들일 빌미가 될 수 있는 큰 문제였다.
어차피 병약한 황제는 근시일 내로 병사할 것이고 차기 황제의 선출에 관해서는 선제후들의 표결이 있어야 하니 황태자를 폐위시킬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따라서 급할 것이 없는 대신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소문일 뿐이었지. 하나. 어전 회의 때 황제가 갑작스레 쓰러지고 대신들이 중앙군을 움직이기 시작하니 소문은 사실이 되었네. 그 말은 애초에 그런 계획을 작당하고 있었고 소문과 황제가 쓰러진 일이 그들의 계획을 앞당기는 발화점이 되었다는 뜻이겠지. 마침 시기적절하게 이변이 발생하여 모든 이목이 그쪽으로 쏠렸으니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겠지.”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말하던 중 발타자르의 입가에 맺힌 묘한 미소를 발견한 가웨인의 머리에 한 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장군이 꾸미신 일입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대신들이 저리 급박하게 움직이니 황제파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차에 마침 메디치 가문에서 손을 내밀었다더군. 내무대신과 조반니가 밀회를 가졌고 그 이후 각 영지로 은밀히 밀서들이 배부되었네. 내 짐작일 뿐이지만 이번 소환령은 조반니 메디치가 제안한 일일 가능성이 높다네.”
메디치 공작가는 개국공신 가문이자 대신들과 칼 프란츠 대공이 실권을 틀어쥔 중앙과 남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명가 중의 명가였다.
조반니 메디치는 그런 메디치 가문의 장자이며 동시에 서자였다.
지닌바 능력이 출중함에도 서자라는 이유로 가문 내에서 경시 받던 그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적통인 그의 동생을 밀어내고 메디치 후계자에 올랐으며, 친우인 칼 프란츠 대공과 황제파를 설득하여 제도에서 대신들을 축출하는 것에 앞장서는 인물이었다.
황후가 대신들의 손을 들어주며 결국 물거품이 되기는 했지만.
“하지만 소환령에 응하는 영주는 몇 되지 않을 걸세. 각 선제후들은 잦아지는 이변들로 인해 쉬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대영주들도 선제후들의 눈치를 보기 급급한 상황이지. 기껏해야 움직이는 것은 메디치 가문과 황제파, 그리고 칼 프란츠 대공 정도일까. 그마저도 메디치 가문과 칼 프란츠 대공은 남부와 이변을 견제해야 하니 전력을 다하기가 어려운 실정이고.”
이 혼란스러운 정국에 가장 큰 변수로 등장한 마왕들의 존재가 각지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군웅들의 발목을 굳게 움켜쥔 지금이 기회였다.
잠시 말을 멈춘 발타자르가 가웨인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하면.”
발타자르와 가웨인이 서로 짜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말을 꺼냈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이겠지.”
“움직일 수 있는 세력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은 저희뿐이겠군요.”
두 사내의 생각이 일치했다.
“장군께서는 이번 기회에 제도를 장악하시려는 겁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우리는 제도 진출 이후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모두 취한 후 제도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북부에서 때를 기다린다.”
이대로 제도로 진출하여 제국 정계를 장악할 것 같았던 발타자르가 그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꺼내어 놓자 가웨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힘들게 제도로 진출해 놓고 물러나다니. 왜 그러는 것입니까? 그리고 때라니요?”
“제도는 제국 권력의 중추인 만큼 무척이나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탐하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네. 괜히 과욕을 부리다간 협공을 당해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버리겠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취한 후 물러나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발타자르가 가웨인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이 손아귀에 제국의 모든 실권을 쥘 기회가 찾아올 걸세.”
* * *
황제 폐하는 병약하고, 태자 저하는 힘이 없는데 대신들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흉악해지니.
조정은 혼탁하고, 백성들은 괴롭도다.
천 년을 이어온 제국의 정사가 벼랑 끝에 서 있음이니.
뜻있는 자여.
제국을 구원하라.
탈라브하임에서 그대들을 간절히 기다리겠노라.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