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71화
듀락 후작성이 함락되고 혁명단이 일으킨 제국 역사에 유례없던 거대 규모의 민란도 종결이 되었다.
물론 각 지방에 흩어진 혁명단의 잔당들이 다소 남아 있기는 하였지만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고 이마저도 곧 토벌될 것이었다.
그렇게 민란이 종결되고 발타자르군이 북부 전역에서 잡아들인 포로만 40만에 육박했다.
민란 종결 이후 발타자르가 최우선 과제로 삼은 것은 바로 도로망 건설이었다.
혁명단의 포로들을 비롯해 발타자르가 모집한 인력들이 북부 전역에서 연일 벌어지는 공사 현장에 투입되어 빠르게 북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각 영지를 잇는 도로망이 건설되고 무너진 기반 시설들을 복구하기 위해 대대적인 인력이 투입되었다.
북부는 빠르게 재건되기 시작했고 그렇게 재건된 북부는 이후 벌어질 제국 내전에서 발타자르에게 강력한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북부의 재건이 어느 정도 진척을 보이기 시작하자 발타자르는 북부의 중심에 위치한 오슬로를 레오나스로 개명했다.
레오나스를 발타자르 공작령으로 삼으며 북부에 남은 로마노프 공작가의 잔재를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러곤 주인을 잃은 북부의 각 영지에 자신의 수족들을 영주로 임명하며 북부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다지기 시작했다.
서부와 중앙에 각기 흩어진 빌로스와 웨즈가 잠재적 불안 요소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발타자르가 따로 조치를 취해 두었기에 그리 위협적이지는 못했다.
이러한 발타자르의 독단적인 행보에 제도에서 여러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감히 발타자르에게 직접적으로 불만을 터뜨리는 이는 없었다.
명실상부 북부 최대의 권력자로 떠오른 발타자르와 적대해서 득 볼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한.
발타자르에게 집중된 이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큰 이변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 * *
세상이 어둠에 잠겼다.
해가 떠오르지 않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세상이 멸망할 징조라 떠들고 다녔고, 각 교단에서는 신이 진노하신 것이라 주장하며 이럴 때일수록 신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며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며 포교 활동에 열을 올렸다.
날이 갈수록 민심이 흉흉해지고 제도에선 제국의 저명한 학자들과 마법사들을 불러모아 이 기현상에 대해 조사할 것을 명했다.
수많은 학자와 마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애썼지만, 알아낸 것이 전무 했다.
그렇게 세상이 어둠에 잠식된 지 사흘째 되던 날.
지평선 너머로 해가 차오르고 어둠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에 황실에서는 이 기현상을 자연적인 현상이었다 공표하며 마무리 지었다.
일부 종교인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황실의 공표를 믿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하지만 진짜 이변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 * *
“간다르바.”
침상 위에 죽은 듯 누워 있는 간다르바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그를 불렀다. 그러나 간다르바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에 발타자르가 재차 간다르바를 불렀다.
“깨어난 것 알고 있네.”
여전히 미동 없는 간다르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잠시 후면 자네의 제자들과 수족들의 처형식이 집행될 걸세. 죄질이 악한 만큼 처형은 일반적인 교수형이 아닌 거열형이 될 것이라네.”
그 말에 간다르바의 손이 꿈틀거렸다.
“제도에서 혁명단의 포로 처분에 대한 전권을 내게 일임한 만큼 처형식을 주관하는 것은 내가 될 것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제시간에 처형장에 도착하여 형을 집행하게 되겠지.”
발타자르가 침상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을 이어갔다.
“형이 집행되면 죄수들은 사지가 찢겨 나가는 고통 속에 생을 마감하게 될 거야. 하지만 자네가 깨어나 나와 대화를 나누게 되면 형은 내가 도착할 때까지 미뤄질 것이고 대화시간이 길어지면 자연스레 오늘 있을 형은 취소되겠지.”
간다르바가 슬슬 움직일 기미를 보이자 발타자르가 쐐기를 박았다.
“딱 다섯까지만 세겠네.”
그 말을 끝으로 발타자르가 천천히 숫자를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하나.”
여전히 간다르바는 미동이 없었다.
“둘.”
간다르바의 손가락이 재차 꿈틀거렸다.
“셋.”
간다르바의 손이 주먹을 쥐고 옅게 떨렸다.
“넷.”
결국, 간다르바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졌네.”
상체를 일으켜 세운 간다르바가 짙은 한숨을 내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래. 공작께선 이 노인네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오?”
간다르바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답했다.
“서론을 싫어하는 편이니 바로 본론에 들어가겠네. 간다르바. 내게 신종하게.”
발타자르의 말에 간다르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감당할 자신은 있소?”
간다르바의 물음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 것이었다.
오스왈드 간다르바는 제국 최고의 아크메이지이며 동시에 현자로 불릴 정도로 문무가 뛰어난 인재였다.
몹시 매력적인 인재임은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품에 안기에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인물이었다.
제국 역적이라는 점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큰 문제는 대륙의 미래를 위해서라고는 해도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이가 없자 민란을 일으킬 정도로 과격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를 품에 안았을 때 그와 발타자르의 뜻이 일치하지 않는 일이 생길 경우.
특히 그것이 간다르바가 그토록 열창하는 미래를 위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어떤 돌발 행동을 벌일지 몰랐다.
그렇기에 그를 품에 안기 위해서는 그의 목에 강력한 목줄을 채워놓아야 했는데 이럴 경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맹약이었다.
하지만 간다르바는 맹약의 허점을 찾아내어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님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그렇기에 간다르바가 발타자르에게 신종한다 하여도 믿을 수 없고 완전히 통제할 수도 없었다. 간다르바는 이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믿을 수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존재이지만 간다르바가 원하는 바와 발타자르의 행보가 일치하기에 협력 관계는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잠들어 있어 모르겠지만 대륙에 어둠이 찾아왔네. 자네가 제국의 지도자들에게 누차 경고했던 위협이 현실이 되었지.”
그가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발타자르의 말에 간다르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제국에 어떠한 위협도 찾아오지 않아 경각심을 느끼지 못하고들 있는 듯하지만, 슬슬 조짐을 보이고 있네. 남부의 슈리마 왕국은 대수림에서 뛰쳐나온 몬스터들에 의해 고전을 하는 중이고, 서부에선 최근 들어 농작물이 말라비틀어지며 흉작이 시작되고 있지.”
이것만이 아니라 어느 지역에서는 죽은 자들이 일어나 산자를 해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한 마을의 처녀들이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추는 해괴한 일들이 벌어졌다.
마왕들이 이 땅을 방문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지만 제국의 위정자들은 이권 다툼에 눈이 멀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치부하며 경시했다. 이것은 후에 제 목에 칼날을 들이미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방관한다면 자네 말대로 이 대륙은 큰 환란을 맞이하여 종국에는 멸망의 끝에 서게 되겠지.”
발타자르가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러한 상황도 모른 채 제국의 위정자들은 이권 다툼에 혈안이 되어있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조만간 내전이 터질 걸세. 제국은 분열되고 그 틈에 마왕들이 날뛰기 시작하겠지. 분열된 제국은 마왕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정적에게 전력을 기울이기 바쁠 걸세. 백성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고, 천 년을 이어온 제국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지 않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 회귀 전에는 칼 프란츠 대공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각고의 노력 끝에 마왕들을 제국에서 몰아내는 것에 성공했다.
회귀라는 이적을 경험한 발타자르의 존재로 인해 다소 비틀어진 미래이지만 그럼에도 변치 않을 미래였다.
“그래서. 공작은 그들과 다르다는 것인가?”
간다르바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자네처럼 대륙을 구원하겠다는 숭고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네. 하지만.”
발타자르가 팔짱을 풀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간다르바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그와 얼굴을 맞대며 말했다.
“하지만 내 사람들이 웃으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네. 그러기 위해 북부를 장악한 것이고, 더 나아가 제국을 좌지우지할 권력자가 될 생각이지.”
말하며 발타자르가 팔을 쭉 뻗더니 주먹을 쥐어 보였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내 소중한 사람들의 미래를 지켜낼 걸세. 그것이 설령 피로 물든 길이라고 해도.”
발타자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간다르바가 말했다.
“말 좋게 포장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공작의 권력욕 아닌가.”
간다르바의 말에 발타자르가 그에게서 멀어지며 픽- 웃어 보였다.
“자네가 보기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힘없는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것을 자네도 뼈저리게 느꼈지 않은가. 그래서 혁명단이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민란을 일으킨 것이고 말이야. 사실 자네가 없다고 해도 문제는 없네. 하지만 자네가 내게 협력한다면 내가 원하는, 그리고 자네가 원하던 미래가 펼쳐질 가능성이 조금은 높아질지도 모르지.”
간다르바가 생각에 잠겨 들고, 그 모습을 긍정적인 의미로 판단한 발타자르가 말했다.
“대화가 끝난 듯하니 이만 가보겠네. 급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아 참. 내 제안에 대한 답은 근시일 내로 들을 수 있으면 좋겠군.”
말을 끝마치며 분주한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서는 발타자르의 등을 향해 간다르바가 말했다.
“처형식을 집행하러 가는 것이오? 난 아직 답을 하지 않았소.”
간다르바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그것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닐세. 동생이 오기로 했거든.”
그 말에 간다르바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처형식은 거짓말이었군.”
간다르바의 중얼거림에 발타자르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 * *
“오라버니!”
가웨인과 함께 레오나스에 도착한 아이린이 성문 앞에서 마중 나와 있던 발타자르에게 달려와 품에 안겨들었다.
그런 아이린을 단박에 안아 든 발타자르는 팔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에 못 본 사이에 많이 자랐구나 하고 생각했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니?”
발타자르가 묻자 아이린이 고개를 내저으며 답하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발타자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재밌었어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괜찮단다.”
아이린의 등을 토닥여 주는 발타자르에게 자그마한 크기로 아이린의 어깨에 앉아 있던 비비안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알. 저도 왔어요.”
넵튠과의 계약이 있기에 발타자르가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고 하더라도 아이린의 신변에 큰 위협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발타자르의 부탁으로 비비안은 그동안 아이린과 함께 오슬로에 잔류해 있었다.
“그동안 린을 지켜주어 고맙네.”
“에이. 알의 부탁이었는걸요.”
발타자르의 말에 비비안이 생긋 미소 지으며 답하곤 아이린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발타자르의 어깨로 이동했다.
“린이랑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알의 옆이 편해요.”
그리 말하며 그녀는 기분이 좋은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작게 웃어 보이곤 아이린을 품에 안은 채 내성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