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69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우리 측 요구 조건은 단 한 가지일세. 불의 마탑은 자네 군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부대로 움직이겠네. 상황에 따라서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려 전투에 참가하겠다는 소릴세.”
지휘부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기도 전에 레티시아가 본론으로 들어갔다.
“마법사가 가장 효율적으로 움직일 때를 아는 것은 마법사인 이쪽이 그 누구보다 잘 알 터이니 그게 낫지 않겠는가? 대신 추가로 올 중앙군 5만의 지휘권은 사령관이 알아서 하시게.”
누가 성격 급한 불의 마법사 아니랄까 봐 훅 치고 들어오는 그녀에게 발타자르가 작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레티시아는 발타자르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 생각했던지 그녀의 말에도 아무런 답 없이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는 발타자르의 행동에 일순간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더니 이내 표정을 관리하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만약 이 요구 조건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는 없다네.”
그녀 나름의 엄포였다.
독립부대로 움직인다니.
회귀 전의 그 무모한 짓거리를 몸소 겪었던 발타자르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중앙군은 엄연히 지원군으로 오는 이들. 따라서 내 지휘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 그것은 불의 마탑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이고. 또한.”
발타자르가 깍지낀 손에 턱을 괴고선 레티시아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발타자르가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언행을 보이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우리 군에 통제되지 않는 전력은 필요 없네.”
그 말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혁명단의 마법사들 때문에 곤란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네만. 내가 들었던 것과는 상황이 다른 모양이군. 그 말은 나와 본탑의 지원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
최대한 점잖게 말하려는 듯하지만, 목소리에서 그녀의 동요와 분노가 느껴졌다.
“필요하네.”
“한데 왜…….”
“하지만 군에서 통제되지 않는 전력은 변수를 일으키게 마련이고, 지휘관에게 변수란 적의 대군보다도 두려운 법이지. 우리 군이 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은 아닌지라.”
말하며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어떻게 보면 레티시아를 비웃는 것만 같은 그 모습에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면 더 이상 우리가 나눌 대화는 없겠구려.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다니 이만 가 보겠네.”
레티시아가 막사를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발타자르의 서늘한 음성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러왔다.
“앉게.”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고 생각하며, 레티시아가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고개를 홱 돌리는데 일순간 발타자르와 눈동자가 마주쳤다.
한없이 무미건조한 그 눈동자에 순간 레티시아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발타자르에게 기세에서 밀렸다는 생각에 마력을 끌어올리며 발타자르를 노려보았다.
“감히 이 몸을 겁박하려는 겐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며 살이 익을 듯 강렬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갑작스레 막사 안에서 강렬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지자 가웨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려 했지만,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제지했다.
그러곤 이런 단순한 도발에도 쉽게 넘어오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속으로 조소를 금치 못했다.
‘온실 속의 화초답군.’
능구렁이들이 득실거리는 제도에서 살고 있는 이답지 않게 어수룩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리 감정을 쉽게 드러내서야.’
협상이란 정치와 같았다.
상대가 어떤 말을 꺼내건 쉽게 동요하지 않고 제 감정을 감추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만약 상대방의 말에 제 감정을 드러내게 되면 한순간에 상대방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레티시아는 한없이 미숙했다.
“이대로 제도로 돌아갈 생각인가? 이번에 큰 결심을 하고 자네를 이곳에 파견한 대신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발타자르의 말대로였다.
대신들이 그동안 품에 안고 있던 아크메이지라는 강력한 패를 꺼낸 것은 이 전장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한데, 레티시아가 이대로 아무런 소득 없이 제도로 돌아간다면 대신들의 체면을 구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크메이지를 참전시킴으로써 얻을 이권들을 제 발로 차버린 레티시아를 대신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었다.
평상시의 레티시아였다면, 아니, 조금이라도 생각이란 것을 했다면 여기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협상에 들어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자존심을 구길 대로 구긴 레티시아는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이는 만용을 불러왔다.
“내가. 불의 마탑을 이끄는 이 몸이. 그들을 두려워할 것 같은가?”
마력을 누그러뜨리기는커녕 더욱 마력을 끌어올리는 그녀의 모습은 당장에라도 일전을 불사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 경고일세. 앉게.”
발타자르 역시 기운을 끌어올리며 레티시아의 마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발타자르를 압박하던 자신의 마력이 너무나도 쉽게 밀려나기 시작하자 레티시아는 일순간 당황하더니 이내 이를 악물고 본격적으로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내게 손을 쓰려 한다면 자넨 죽어.”
서릿발처럼 차가운 발타자르의 음성이 레티시아의 목을 옥죄어 왔다.
“그리고 자네가 죽는다면 에르제 황녀도 무사하진 못하겠지.”
에르제 황녀의 이름이 거론되자 레티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격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는 현재 그녀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변방에 있다고 제도에 눈과 귀가 없는 것은 아닐세.”
서서히 마력을 누그러뜨리는 레티시아의 모습에 본격적인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한 발타자르가 끌어올린 기운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대신들의 암투에 휘말려 사망한 3황후. 그녀는 빈민가 출신인 자네의 후원자였지. 그리고 3황후의 하나뿐인 여식인 에르제 황녀는 어린 나이에 보호자를 잃었음에도 마귀의 소굴인 황실에서 살아남아 현재 제도의 꽃으로 불리고 있지.”
말하며 발타자르가 깍지낀 손에 괴고 있던 턱을 들어 올리곤 의자에 파묻듯 몸을 뒤로 기울였다.
“자, 그럼 여기서 문제일세. 변변한 지지자 하나 없던 에르제 황녀가, 필요하다면 제 혈육도 잡아먹는 마귀의 소굴에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발타자르의 물음에 레티시아가 그를 홱- 노려보았다.
한동안 발타자르를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더니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몸짓 하나만으로도 발타자르의 추론을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에르제 황녀의 후원자가 레티시아라는 것은 추론이 아닌 사실이었지만.
“좋네. 사령관의 뜻대로 하지. 이제 되었는가?”
그녀가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녀가 항복했다고 이 대화가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발타자르는 그녀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을 모두 취하기 전에는 이 대화를 끝낼 생각이 없었다.
“문제를 바꾸지.”
그녀가 스스로의 패배를 시인했음에도 발타자르가 이 대화를 끝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레티시아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난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네.”
말하곤 레티시아가 막사를 나서기 위해 등을 돌리려는데 이어지는 발타자르의 말이 그녀의 발목을 굳게 부여잡았다.
“최근 황자와 황녀들이 제도를 떠나고 있다지? 표면적인 이유야 민생시찰이지만, 그들의 행보를 가만히 지켜보면 수많은 이들이 그들을 방문하고 떠나가기를 반복하고 있다던데. 얼핏 보면 제 세력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제국 전역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그 답이 나오지 않나?”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겐가.”
일방적인 발타자르의 말에 레티시아가 참다못해 물었지만, 발타자르는 답하기보다는 제 말을 이어갔다.
“작금의 제국에 큰 전쟁이라고는 혁명단의 민란뿐인데 그렇다고 토벌에 힘쓰는 것도 아니면서 각 지방의 선제후들과 영주들은 군비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지. 그 이유가 무엇일까?”
딱딱- 발타자르가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가 막사 안에 울려 퍼졌다. 레티시아가 침을 꿀꺽 삼키곤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이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황족들의 제도 이탈. 각 지방 세력가들의 군비 확장.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단 하나이지.”
레티시아가 고민하는 와중에도 말을 이어가던 발타자르가 한 단어를 내뱉었다.
“제국 내전.”
내전이라는 감히 언급하기조차 조심스러운 그 단어를 꺼낸 발타자르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쳐 흘렀다.
“자네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제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황제는 병약하여 언제 쓰러질지 모르고, 황태자는 능력도 없으면서 대신들을 적대하기 바쁘지. 한데 그 탐욕스러운 대신들이 이 상황을 마냥 지켜보기만 할 것 같은가? 제도를 떠나는 황족들은 다 제 목숨 들을 부지하려고 도망친 것일세. 그렇다면…….”
발타자르의 심유한 눈동자가 빛나며 레티시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순간 레티시아는 뱀이 그녀의 발목을 휘어 감으며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타고 오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르제 황녀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왔다.
레티시아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자 발타자르가 깍지낀 손을 풀며 그녀에게 자리를 권했다.
“계산 끝났으면 자리에 앉게.”
* * *
털썩-
레티시아가 다리에 힘 풀린 사람처럼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처음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오간 데 없이 변장한 그 외형에 어울릴 법한 지치고 힘없는 목소리로 레티시아가 물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언제까지 그 꼴로 있을 텐가?”
발타자르의 말에 레티시아가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 알고 있었네.”
레티시아에게서 늘그수레한 노인의 음성이 아닌 가냘프고 고운 젊은 여인의 미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노파는 사라지고 웬 젊은 여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됐어?”
더 이상 연기는 집어치우겠다는 듯 사뭇 도발적인 어투로 묻는 그녀에게 발타자르가 말했다.
“내게 신종하게. 그리하면 에르제 황녀를 살려주지.”
“나보고 당신의 개가 되라는 뜻이야?”
레티시아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대신들의 개보다는 내 개가 되는 것이 낫지 않겠나?”
그 말에 레티시아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뜻 거절의 뜻을 내비치지 못했다. 에르제 황녀가 못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자네가 보기에 나와 제도의 대신들은 다를 바 없는 이들이겠지.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언할 수 있네. 난 내 것을 홀대하는 사람은 아닐세.”
레티시아는 갈등했다.
어차피 구겨질 대로 구겨진 자존심은 마음 한구석에 미루어 두고서라도 냉정하게 볼 때 발타자르의 제안은 그녀에게 나쁘지만은 않은 제안이었다.
북부 최고의 권력자로 급부상한 발타자르. 그의 비호를 받을 수 있다면 어쩌면 에르제 황녀가 황위에…….
“미리 말해두지만, 에르제 황녀를 살려준다는 것이 그녀를 지지하겠다는 뜻은 아닐세.”
레티시아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발타자르가 말을 덧붙였다.
귀신 같은 놈.
레티시아가 속으로 중얼거리곤 그런 생각 따윈 한 적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
“그래서. 대답은?”
레티시아의 대답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선 발타자르가 자신의 제안에 대한 답을 재촉했다.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아. 에르제만 구해준다면 당신 제안을 받아들일게. 하지만 그쪽도 알다시피 난 맹약에 묶여 있는 몸이야. 대신들이나 황족들을 향해 결코 적대적인 행동을 할 수 없어. 그것이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얕은 수작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이 퍽이나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네. 간다르바를 사로잡는 대로 그 목줄을 풀 방법을 알아봐 주지. 어차피 그럴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던가.”
그녀의 속내를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그녀는 더 이상 잔꾀를 부리는 것을 포기했다.
“좋아. 좋다고. 이제 당신 마음대로 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녀가 포기했다는 투로 말하자 발타자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티시아는 속으로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얄밉다고 생각했다.
“한데 마탑주.”
“또 뭔데.”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그녀가 답하자 발타자르가 툭- 하고 테이블을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자네 친구는 아닐 텐데?”
레티시아의 얼굴이 순간 벙찐 표정이 되더니 이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뜻대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