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66화
애슐리에게서 온 급보를 전해 받은 빌로스는 가신들을 소집하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발타자르 공작이 본가를 향해 영지전을 시작했다는데 다들 어찌 생각하는가?”
빌로스가 가신들을 바라보며 묻자 빌로스의 파벌 내에서 참모 역할을 맡은 브라이언 남작이 발언했다.
“현재 상황에서는 애슐리 공녀께서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시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둘러 혁명단을 토벌하는 것뿐입니다.”
브라이언 남작의 말에 빌로스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 말은 본가의 영지들이 발타자르 공작에게 유린당해도 마냥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겨울 전쟁을 통해 단련된 발타자르 공작의 군세는 북부에서도 최강으로 손꼽히는 강병들입니다. 괜히 어중간하게 병력을 나누었다가는 사자의 입에 병사들을 집어넣는 꼴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발타자르 공작의 군세가 아무리 강맹하다 한들 본가의 병사들 역시 그에 못지않네.”
말하는 빌로스의 음성에서는 로마노프 공작가에 대한 자부심이 넘쳐 흘렀다.
빌로스가 오슬로에 지원 병력을 보낼 기미를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브라이언 남작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 전술 지도를 가리켰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상황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 군은 토벌대의 가장 선봉에서 혁명단과 전선을 맞대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토벌대 전력의 반을 차지하는 대 군세입니다. 한데 여기서 병력을 나누게 되면 전선에 공백이 생기게 되고 혁명단에서는 이 틈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모를까.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현재 상황에서는 최악의 선택이라는 뜻이지요.”
절대 오슬로에 지원 병력을 급파해서는 안 된다는 간곡한 요청이었지만 빌로스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혁명단을 토벌하는 동안 발타자르 공작이 오슬로를 점거한다면 혁명단과의 전투로 지친 병사들을 이끌고 오슬로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 보는가?”
“물론 곧장은 힘들겠지요. 하지만 황명으로 혁명단 토벌을 천명한 지금 발타자르 공작도 쉬이 저희들을 향해 검을 들이밀지는 못할 것이고, 그 틈에 혁명단을 토벌한 이후 센피단 지방에서 병력을 추스르고 재차 올리오 지방으로 진군하면 될 일입니다.”
“흐음…….”
브라이언 남작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빌로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때 나서는 이가 있었다.
“제게 병력 3만을 지원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제가 가서 빌로스 공자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오슬로를 지켜 보이겠습니다.”
아그리파였다.
발타자르의 오슬로 방문 이후 은근슬쩍 빌로스의 파벌에 가담한 그는 빌로스의 손발이 되어주었으며, 최근에는 빌로스의 목숨을 구해주는 등의 전공을 올려 빌로스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다.
“오! 아그리파 경. 자네라면 믿고 맡길 수 있겠지. 그렇게 해주겠는가?”
빌로스가 반색하며 빌로스를 바라보며 묻자 브라이언 남작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가 보기에 아그리파는 전형적인 간신이었다.
온갖 감언이설로 빌로스를 현혹시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고 발타자르를 전형적인 소인배로 포장하여 빌로스가 발타자르를 경시하게 만들었다.
빌로스가 공작위에 오르는 데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인 발타자르를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 것에는 그의 영향이 무척이나 컸다.
물론 지난번 전투에서 제 목숨을 걸고 빌로스의 목숨을 구해준 공은 높게 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빌로스를 망치는 주범이었다.
“일평생 검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애슐리 공녀가 발타자르 공작을 상대로 오슬로를 지킬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하지만 발타자르 공작과 검을 맞대본 저라면 충분히 오슬로를 지킬 수 있습니다. 믿고 맡겨 주십시오.”
자신만만한 아그리파의 말에 빌로스가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좋네. 자네 말대로 병력 3만을 지원해 주지. 가서 내가 돌아갈 때까지 오슬로를 굳건히 지키고 있게.”
빌로스가 아그리파의 요청을 수락하자 아그리파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빌로스를 향해 무릎을 꿇으며 힘차게 소리쳤다.
“존명! 제 목숨을 다해 오슬로를 지켜 보이겠습니다!”
빌로스가 그런 아그리파를 믿음직스럽게 바라보았다.
‘하…… 큰일이구나.’
브라이언 남작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 지원을 하고 싶었다면 이런 무력적인 지원이 아닌 웨즈 공자와 손을 잡고 제도 대신들을 이용해 정치적 압박을 가했어야 했다.
앞서 거론했듯이 전황이 팽팽한 지금 병력 3만의 공백은 무척이나 컸다.
마음 같아서는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해서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한번 정한 것을 되돌리는 법이 없는 빌로스의 성정으로 볼 때 그렇게 한다고 한들 마음을 돌릴 리가 없었다.
‘진형을 다시 구성해야겠어.’
브라이언 남작이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이튿날.
아그리파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오슬로를 지원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빌로스 진영의 병력의 공백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혁명단이 총공세를 퍼부었고, 결국 토벌대는 대회전에서 대패하며 눈물을 머금고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 * *
“흠. 토벌대가 중앙 방면으로 퇴각하고 있다는군.”
토벌대의 퇴각을 돕기 위해 보낸 트리스탄에게서 온 전보를 찢으며 말했다.
“저희 측과 로마노프 공작가는 아직 영지전 중이니 지원군으로 왔다고 해도 혹여나 우리가 그들을 칠까 두려워 피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들을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차후에 후환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따로 추격대를 편성할까요?”
가웨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이미 조치를 취해 두었으니까.”
센피단 지방으로 진군하기 전.
발타자르는 애슐리에게 지시를 내려 두었다.
그것은 로마노프 공작가가 보유하고 있던 제도 대신들과 서부 귀족들의 약점을 이용해 로마노프 공작가와 관련된 이들이 북부를 벗어나지 못하게 조치를 취해 두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로마노프 공작가와 대신들 간의 거래였다면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이상 상당한 이권들을 내주어야 거래가 성사되었겠지만, 현재 발타자르는 이렇다 할 약점거리가 없기에 이것은 일방적인 강요였다.
따라서 대신들과 서부 귀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발타자르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 대한 것은 위치만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네. 처리는 혁명단이 정리된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말하며 발타자르가 아그리파를 바라보았다.
오슬로를 지원하기 위해 빌로스의 3만 병력을 이끌고 떠났던 아그리파는 애초의 목적지가 아닌 발타자르의 진영을 향해 이동했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발타자르와 조우할 수 있었다.
“고생했네.”
발타자르가 아그리파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자네가 이끌고 온 병력들은 자네가 지휘하도록 하게. 그리고 자네가…… 아직 자작이던가?”
“예, 그렇습니다.”
“혁명단의 토벌이 끝나는 대로 논공행상을 실시할 예정이니 기대해도 좋을 걸세.”
승작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발타자르의 말에 아그리파가 웃으며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사실 아그리파는 빌로스의 밑에 있으면서 발타자르를 배신할까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고민은 빌로스에게서 3만에 달하는 병력의 지휘권을 받았을 때도 계속되었다.
발타자르에게 잡힌 약점이나 그가 본 발타자르의 성정으로 볼 때, 발타자르의 휘하에 들어갈 경우 이리저리 휘둘릴 가능성이 높았다. 반면 빌로스 공자의 아래에 들어간다면 적어도 삼인자의 자리까지는 넘볼 만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로마노프 공작가는 지는 해였고, 발타자르는 떠오르는 해였다.
뱀의 머리가 되느냐, 용의 꼬리가 되느냐를 묻는다면 아그리파의 선택지는 하나였다.
비록 발타자르의 휘하에 기라성 같은 무장들이 즐비해 있다고는 하나 아그리파 또한 로열랭크의 기사.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인재였다.
그래도 용의 꼬리보다는 나은 처우를 받으리라 결정한 아그리파는 병력을 이끌고 발타자르에게로 향했고 결과는 정답이었다.
“앞으로도 충심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그리파의 말에 발타자르가 답 없이 말을 몰아 선두로 나섰다.
“전군. 진군 속도를 높인다.”
* * *
퇴각하는 토벌대의 후미를 노리는 혁명단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토벌대를 휩쓸었다.
지휘관들을 비롯한 기병들이야 진즉에 보병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지 오래이고, 남겨진 보병들은 서로를 밀치며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싸울 의지를 상실한 채 도망치기 바쁜 보병들은 기병들의 손쉬운 먹잇감이었고 변변한 전투조차 치르지 못한 채 토벌대의 보병들은 빠른 속도로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놈들이 다시는 우리 혁명단에게 검을 들이밀지 못하게 공포를 심어주어라!”
혁명단의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다그치며 도망치는 토벌대의 병사들을 학살하던 그때였다.
뿌우우우─
지평선 너머로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축이 흔들리고,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져 왔다. 아군의 말발굽 소리가 아니었다.
“선두 정지!”
오스왈드 간다르바를 보필하는 삼십육좌의 일익.
오좌 베에루아비스가 이상함을 느끼곤 도망치는 토벌대의 병사들을 추격하던 기병들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입니까?”
이에 십일좌 투리온이 다가와 의아하다는 듯이 묻자 베에루아비스가 지평선 너머를 가리켰다.
“온다.”
그 말에 투리온이 베에루아비스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는 순간 지평선 너머에서 깃발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포효하는 황금빛 용이 날개를 활짝 펼친 문양.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투리온이 다급히 소리쳤다.
“발타자르의 군대다! 전군 진형을 갖춰라! 적의 기습에 대비하라!”
그의 외침에 인근의 기병들이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지만, 그와 멀리 떨어져 있던 기병들과 보병들은 여전히 토벌대의 병사들을 추살하는 것에 열중이었다.
피와 전장의 광기에 취한 병사들의 귓가에 그의 외침은 와닿지 않은 탓이었다.
“제길! 오좌. 안 되겠습니다. 저희끼리라도 도망쳐…….”
퍼억─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투리온의 미간을 한발의 화살이 꿰뚫었다.
깜짝 놀란 베에루아비스가 발타자르군을 바라보자 그곳에 새하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이가 막 화살을 쏘아 보낸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트리스탄! 발타자르의 사냥개가 왔구나!”
그녀는 발타자르군 내에서도 요주의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와 그녀 휘하의 기수들은 피에 미친 사냥개들이었다.
적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죽음조차 불사하는 그들의 이름이 거론되면 에버나스 방면에 주둔했던 혁명단의 병사들이 얼마나 치를 떠는지, 그 공포가 직접 마주하지 않아도 절로 느껴질 정도였다.
위이잉─
베에루아비스의 귓가에 벌이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퍼억-
그와 동시에 화살 한 발이 베에루아비스의 바로 옆에 서 있던 병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퇴, 퇴각한다! 신속히 본대로 복귀하라!”
물밀 듯이 밀려오는 기마대를 두 눈으로 목격한 베에루아비스가 황급히 소리치며 말을 몰아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퍼억-
마치 죽음의 사신이 그의 등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그의 옆에서 도주하던 병사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에 주변의 병사들이 모두 나가떨어지고 이제는 그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위이잉─
또다시 벌이 날갯짓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죽음을 직감한 베에루아비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제길!”
그가 욕지거리를 내뱉음과 동시에.
퍼억-
의식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