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64화
“어서 오세요. 공작 각하.”
발타자르가 군사를 이끌고 오슬로에 진입하자 성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애슐리가 제 파벌들을 이끌고 발타자르를 맞이했다.
“공녀. 오랜만이군.”
발타자르가 인사를 건네자 애슐리가 생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지난번에 방문하신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금방 다시 만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제가 공작 각하와 다시 뵙는 이 날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각하는 모르실 거예요.”
교태를 부리는 그녀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든 탓이었다.
“공녀는 여전하군.”
“사람이 갑작스레 변하면 단명한다잖아요?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나요.”
“그렇긴 하지.”
애슐리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이리 성문을 연 것은 항복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애슐리 생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공작 각하께서도 여전하시네요. 물론이죠. 뭐…… 가문의 몇몇 어른들께선 끝까지 반대하시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야 없지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성 쪽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발타자르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시선을 눈치챈 애슐리가 말을 덧붙였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내성으로 안내해 드리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내성이 지금 너무 지저분한 터라 아직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이곳에서 대화를 나눠야 할 듯한데…….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이곳에서 대화를 나누셔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녀의 말과 내성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로 보아 지금 내성에선 한바탕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는 듯했다.
“괜찮네.”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애슐리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의 하해와 같은 배려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그녀의 인사에 발타자르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발타자르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빠르게 성벽 위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전에 혹시 모를 미연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오슬로의 병사들을 무장해제시키고 한 곳에 모아 감시해야겠지만. 아! 하지만 걱정은 말게.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모두 풀어줄 테니.”
발타자르 휘하의 병사들이 오슬로의 병사들을 제압하는 것을 지켜보던 애슐리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요. 뜻대로 하세요.”
지극히 저자세로 나오는 그녀의 태도에 발타자르는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리겠구나 싶었다.
“각하께옵선 본론부터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시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각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금인칙서이시지요?”
애슐리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구나 싶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금인칙서는 이곳에 없답니다. 또한, 그 행방을 아는 이 또한 딱 한 명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지요.”
애슐리의 말대로라면 그녀가 말한 금인칙서의 행방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는 애슐리가 분명했다.
발타자르가 서두를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 말을 돌리고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에게 원하는 바가 있어서라는 것을 깨달은 발타자르가 물었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그녀가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절 공작 각하의 휘하로 받아주세요.”
고민할 것도 없는 요청이었다.
애슐리 본인 자체만으로도 제법 매력적인 인재였으며, 그녀의 휘하에 모인 인재들 역시 발타자르에게 큰 도움이 될 만한 이들이었으니까.
다만, 그녀를 받아들이는 것은 발타자르의 세력 내에 또 다른 파벌이 등장한다는 뜻이었다.
현재 발타자르의 세력은 발타자르가 홀로 모든 실권을 틀어쥐고 있는 절대군주제였다.
발타자르 휘하의 무장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발타자르의 권력은 절대 그 자체였다.
한데 애슐리를 비롯하여 그녀의 파벌들을 받아들인다면 철옹성 같은 발타자르의 권력에 작은 균열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그들과 기존 발타자르의 수하들이 경쟁하며 성장한다는 이점이 발생할 수 있겠지만 세상일이 다 뜻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혹시 내부 분열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그녀가 썩 매력적인 인재임은 부정할 수 없고 또한, 금인칙서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을 감수할 정도인지는 한 번쯤 고민해 볼 문제였다.
“그것은 자네만이 아니라 자네의 파벌까지도 받아들여 달라는 청이겠지?”
발타자르가 망설이는 듯하자 애슐리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망설여지시는 것이 당연해요. 각하께선 저와 제 파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생길 분쟁 혹은 권력에 흠집이 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시겠지요.”
그녀의 지적은 정확했다.
“하지만 저와 제 파벌들을 이용하신다고 생각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발타자르라는 배에 올라타기로 결정한 그녀는 이것이 그녀의 미래를 결정지을 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기서 발타자르를 설득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녀의 미래가 달라지리라.
“지금까지의 각하의 행보를 보면 대외적인 업무는 각하께서 도맡아 하시는 경향이 강하셨죠. 물론 지금까지야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고 그것으로도 충분했겠죠. 하지만 각하께서 북부를 제패하시고 그 이후를 바라보신다면 저와 제 파벌들을 받아들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실 거예요.”
애슐리는 자신과 제 파벌의 쓸모를 주장했다.
“북부를 제패한 이후 각하의 세력은 급격하게 그 크기를 키워 나갈 것이고, 각하께서 미처 신경 쓰시지 못하는 부분들도 발생하겠죠. 주로 행정과 정치 문제로 말이에요.”
“그것을 그대와 그대의 파벌이 해결해 주겠다?”
발타자르의 물음에 애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물론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제도의 능구렁이들을 상대하기에는, 이런 말씀은 죄송하지만, 각하 휘하의 인재들은 아직 미숙하죠. 하지만 제 파벌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정쟁의 경험이 풍부한 이들이니만큼 앞으로 각하께서 일을 도모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랍니다.”
이것은 발타자르의 생각과 일치했다.
발타자르 역시 그러한 이유로 그녀와 그녀의 파벌을 받아들이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또한, 경쟁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죠. 그동안 각하의 세력은 각하의 절대적인 통치 아래 큰 잡음 없이 성장해 왔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죠.”
말이 길어지자 애슐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을 이어갔다.
“각하께서 북부를 제패하신 이후로는 수많은 인재가 각하의 아래로 모여들 것이고 그중에는 야심을 품은 이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이에 대한 대비가 아직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을 받아들이신다면 자칫 세력 내에 큰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을 테지만, 저와 제 파벌들을 받아들이신다면 사전에 경쟁을 통해 각하 휘하의 인재들을 단련하고 대비할 수 있을 거예요.”
애슐리의 말대로라면 그녀와 그녀의 파벌은 현재 발타자르의 세력에 꼭 필요한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부정적인 면 역시 간과할 수는 없었다.
그러한 발타자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애슐리가 말을 덧붙였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긍정적인 면이고 부정적인 면 역시 외면할 수는 없죠. 분명 잡음이 나올 테고 일이 심각해진다면 자칫 내부 분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겠죠. 제 짐작이지만 각하께서 결정을 고민하시는 것도 이것 때문일 것이고요.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망설이시기에는 저와 제 파벌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일이죠. 또한, 각하의 앞으로의 행보를 생각한다면 저와 제 파벌을 꼭 받아들이시는 것이 좋을 거예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분명 문제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고 그것으로 망설이기에는 그녀와 그녀의 파벌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앞으로의 내 행보라. 내가 어찌 움직일지 알고 있다는 말투로군.”
발타자르의 물음에 그의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냈다고 판단한 애슐리가 한결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미소 지으며 답했다.
“급격한 세력 성장과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북부 제패. 이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딱 하나뿐이죠. 지방의 권력자들이 바라 마지않는 것.”
말을 멈추곤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그녀가 진중한 얼굴로 한 단어를 꺼냈다.
“제도 상경.”
욕망의 구렁텅이.
사치와 향락의 도시.
제도 상경이라 함은 곧 프락시온 제국 권력의 핵심에 발을 들이겠다는 뜻이었다.
* * *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친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성은 무척이나 삭막했다.
공터에는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곳곳에 혈흔이 낭자했다. 애슐리와 함께 발타자르가 내성에 진입하자 실마르 백작이 그들을 마중 나왔다.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하는 그는 온몸이 피범벅이었다. 묻지 않아도 이 학살극의 주범이 누구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고생했네.”
발타자르는 딱 그 한마디만 건넨 채 실마르 백작을 지나쳐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부로 들어갔다. 애슐리가 그런 발타자르의 뒤를 따르며 말했다.
“재물들과 비문들. 둘 중에 무얼 먼저 보시겠나요?”
애슐리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민할 것도 없이 즉답했다.
“비문.”
“그러실 줄 알았어요. 도착하시면 바로 보실 수 있게 집무실에 준비해 두었답니다. 자. 집무실은 이쪽으로 가시면 돼요.”
* * *
애슐리가 앞장서며 안내하고 얼마 걷지 않아 그들은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예요.”
애슐리가 집무실 문을 열려는 순간 발타자르가 깜빡했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공녀.”
“네, 말씀하세요.”
“오는 길에 보니 사용인들이 더러 보이던데.”
“무언가 필요한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애슐리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모두 죽이게.”
그 한마디에 애슐리의 안색이 확 굳었다.
그러나 재차 되묻는 일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처리할게요.”
이에 발타자르가 눈에 이채를 띄며 물었다.
“왜 그들을 처리하라 지시하는지 되묻지 않는 것인가?”
“개중에 빌로스 오라버니나 웨즈를 비롯해 다른 직계들의 파벌에 선을 대고 있는 이가 없으리란 보장이 없으니까요.”
애슐리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고 있다니 되었네. 하면 단순히 그들만 처리하라 지시한 것이 아님을 알겠군?”
발타자르가 재차 묻자 애슐리가 얼굴에 다시 미소를 띠며 답했다.
“저와 제 파벌을 제외한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과 그 관련자들을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명심하게. 내가 받아들인 것은 딱 자네까지일세. 그 외에 로마노프 공작가와 관련된 이들은 모두 자네의 손에 의해 축출되어야 할 걸세.”
발타자르는 북부 제패 이후 혹시나 로마노프 공작가의 잔당들이 날뛸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오랜 세월 북부의 패자로 군림해온 로마노프 공작가답게 북부 전역에는 여전히 그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고 이는 잠재적인 위협이 될 여지가 컸다.
혹시나 구심점이 될 직계가 살아 있다면 후에 공작가를 재건하겠답시고 무슨 문제를 일으킬지 몰랐다.
물론 이것은 한 번에 끝낼 문제가 아닌 긴 시간을 들여 처리해야 할 문제였지만 그렇기에 애슐리에게 맡기는 것이었다.
그들을 축출함으로써 애슐리는 그들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는 것이고 제가 살려면 그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까지는 발타자르라는 끈을 꼭 쥘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자네는 공작가의 직계도 아니었지?”
발타자르의 그 말에 애슐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