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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63화 (63/183)

공작이 회귀함 63화

군을 일으킨 발타자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올리오 지방을 휩쓸었다.

영지전을 선포하고 일주일 만에 로마노프 공작가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인 오슬로에 도착할 정도이니 그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이것이 전략적으로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다.

빠르게 진군한 만큼 미처 점령하지 못한 요새와 영지들이 주변에 산재해 있었고 이는 곳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지도 모를 잠재적 위협이었다.

비록 로마노프 공작가의 기운이 크게 쇠락하였으나 여전히 로마노프 공작가에는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즐비했고 이들이 이 기회를 마냥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따라서 차근차근 영지들을 함락시키며 진군시키는 것이 전략상으로는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이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주력들이 모두 혁명단 토벌에 참전하였기에 올리오 지방에는 발타자르의 군을 막을 만한 전력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발타자르가 후방에 잠재적 위협을 내버려 두고서라도 이리 급하게 진군한 이유는 오슬로에 남아 있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과 주요 봉신들이 센피단 지방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 그들을 놓친다고 해도 전쟁의 판도를 뒤엎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피신할 때 맨몸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들도 머리란 것이 있다면 중요 비밀문서들과 재물들을 파기하거나 최대한 쓸어갈 것인데 그렇게 되면 영지전에서 승리하여 올리오 지방을 점령한다고 해도 반쪽짜리 승리가 될 뿐이었다.

긴 세월 동안 북부를 통치하며 쌓아 둔 재물들과 제도 대신들과 주고받았을 각종 문서는 올리오 지방에 비견 될, 아니, 그 이상의 값어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로마노프 공작가의 심처에서 비밀리에 보관되고 있을 ‘그 물건’은 더더욱.

* * *

“당했네.”

애슐리는 오슬로의 성벽 너머로 진을 치고 있는 발타자르의 군세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그녀와 참모부가 판단하기로 발타자르의 군대가 오슬로에 도착하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열흘은 걸릴 것이라 판단하였다.

이것도 발타자르군의 수송마차를 통한 압도적인 진군 속도를 감안한 것으로 일반적인 군대였다면 아무리 빨라도 보름은 걸려야 가능한 진군 속도였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그것보다 3일은 더 일찍 오슬로에 도착했다.

“다행인 점은 급하게 온 탓인지 병력이 모두 기병이라는 점이지만…….”

성벽 너머로 보이는 발타자르의 군대는 모두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따라서 쉽사리 공성전을 시작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협이었다.

“실마르 백작. 오슬로의 병력이 어떻게 되죠?”

애슐리가 현재 오슬로에 주둔 중인 군을 이끄는 실마르 백작에게 물었다.

“인근 영지에서 급하게 차출한 정규군과 징집병들까지 모두 포함하여 총 4만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발타자르 공작의 군대가 2만이니 수성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겠네요.”

“예. 비축된 식량과 군수품들이 넉넉하니 보급 면에서는 반년을 수성해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다만…….”

실마르 백작이 말끝을 흐렸다.

발타자르군의 선봉이 도착하여 오슬로를 포위 중이니 추가적인 지원군을 받기는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만 시간이 지난다면 발타자르의 본대가 연달아 도착할 것이니 보급이 넉넉하다곤 해도 오슬로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병력의 수적 우세를 믿고 성벽을 뛰쳐나가 일전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오슬로의 주변 지형은 개활지로 기병이 날뛰기에 아주 적합한 무대였다.

강병으로 유명한 발타자르의 군대를.

그것도 2만에 달하는 기병들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일전을 벌인다면 아무리 병력의 수적 우세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대패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오슬로에서 발타자르군을 상대하며 전력을 최대한 소모 시키겠다는 계획이 무산으로 돌아갔고 판단했다.

본래 계획대로 발타자르가 진군했다면, 아니,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그랬다면 더 많은 병력을 끌어모았을 테고,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생각하던 애슐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일은 이미 벌어졌다.

아쉬워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게이트는 이용이 가능한가요?”

오슬로에서 수성하는 것에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애슐리가 묻자 실마르 백작이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나 하여 성벽에 오르기 전에 점검을 해보았습니다만. 교란 장치를 설치해 둔 것인지 작동이 되지 않는다는 답만 들었습니다.”

“그렇겠죠.”

발타자르가 무턱대고 기병들만 이끌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 정도 속도로 진군했다는 것은 그만큼 무리를 했다는 뜻이고 모든 것이 유리한 상황에서 발타자르가 무리할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애슐리를 포함한 오슬로에 남아 있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과 봉신들, 그리고 공작가에 산재해 있는 비밀문서들과 재물들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발타자르의 입맛에 맞는 선물을 내어줄 수만 있다면 그녀의 한목숨 정도 건사하는 것은 물론 발타자르의 진영에서 요직을 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끝까지 붙들고 있기엔 본가는 끈 떨어진 연 신세야.’

로마노프 공작가는 침몰하는 배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전대 로마노프 공작이 야만족의 침공에 비명횡사한 이후로 서서히 침몰하던 것이 발타자르가 오슬로에 방문한 이후로는 그 속도에 가속이 붙었다.

발타자르가 오슬로에 방문했을 당시 수많은 이권을 속수무책으로 내어준 것부터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함께 침몰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배를 타느냐를 두고 고르라고 한다면…….’

답은 정해져 있었다.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새로운 배를 타는 것.

때마침 무척이나 크고 튼튼하며 성능 좋은 배가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배에 탈 티켓을 사는 것뿐이었다.

‘내가 가진 것 중에 발타자르 공작의 구미를 당길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녀는 자신의 손안에 쥔 패들을 떠올려 보았다.

그중에서 발타자르의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을 추리고 추리다 보니 딱 하나가 남았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애슐리는 발타자르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금인칙서! 그렇구나. 발타자르 공작은 금인칙서를 노리는 것이었어!’

발타자르가 무리해 가면서까지 서둘러 군을 이끌고 온 진정한 이유는 사로잡을 포로도, 재물도, 비밀문서도 아닌 금인칙서金印勅書 때문이었다.

‘발타자르 공작이 본가를 상대로 영지전에서 승리하는 것은 기정사실. 하지만 단순히 승리했다고 끝이 아니지. 확실하게 북부의 통치권을 틀어쥐기 위해서는 필히 금인칙서를 손에 넣어야 할 터.’

달리 선제후의 옥새玉璽라고도 칭해지는 금인칙서는 제국법에 따라 선제후인 자가 금인칙서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금인칙서를 소유한 자만이 선제후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발타자르가 진정으로 북부의 패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금인칙서를 손에 넣어야만 했다.

금인칙서는 차기 제국의 황제를 선출에 대해 발언권을 가질 수 있는 권력의 상징이며 한 지역의 지배자임을 증명하는 옥새이므로.

‘문제는 금인칙서가 이곳에 없다는 것인데…….’

물론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애슐리에게는 호재가 되는 상황이었다.

오슬로를 점령하고도 금인칙서를 손에 넣지 못한 발타자르는 결코 애슐리에게 손을 쓰거나 홀대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이슈카 오라버니에게 힘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키드홀 남작을 쳐낸 것이 이렇게 호재가 될 줄이야.’

본래 이 금인칙서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대 로마노프 공작과 그의 심복인 키드홀 남작밖에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대 로마노프 공작은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급사했고, 키드홀 남작은 이슈카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하려던 애슐리의 손에 의해 명을 달리했다.

따라서 키드홀 남작을 제거하는 도중 금인칙서의 행방을 접하게 된 애슐리를 제외한다면 금인칙서의 행방에 대해 아는 이는 전무했다.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애슐리가 실마르 백작을 불렀다.

“실마르 백작.”

“예, 공녀님.”

“성문을 여세요.”

“항복하시려는 것입니까?”

실마르 백작의 물음에 애슐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항복이 아니라 투항이에요.”

“그 말씀은……?”

“발타자르 공작의 산하로 들어갈 생각이에요. 마침 그가 혹할 만한 선물을 가지고 있으니 홀대하지는 않을 거예요.”

애슐리의 말에 실마르 백작이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토벌대에 참가 중인 저희 측 사람들이 화를 면하기 어려울 텐데요. 빌로스 공자나 웨즈 공자가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실마르 백작이 토벌대에 참가 중인 파벌을 걱정하였지만, 애슐리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어쩔 수 있나요. 그들을 살리자고 우리까지 침몰할 수는 없잖아요?”

“하오나…….”

여전히 실마르 백작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자 애슐리가 지그시 그를 바라보며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실마르 백작.”

“예. 공녀님.”

“새로운 배에 승선할 수 있는 티켓은 몇 장 되지 않아요. 어떻게. 그들과의 의리를 지키려 침몰하는 배에 끝까지 남아 계시겠어요? 아니면 저와 함께 새로운 배에 올라타시겠어요?”

최후의 경고이자, 제안이었다.

실마르 백작은 이만하면 최소한의 도의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애슐리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에 애슐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현명한 선택이에요.”

* * *

“생각보다 병력이 많군요.”

오슬로의 성벽 위를 바라본 가웨인이 말했다.

“최대한 서두른다고 서두른 것인데도 그보다 애슐리 공녀의 판단이 한 발 더 빨랐던 모양입니다.”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별 감흥 없는 표정으로 답했다.

“상관없지 않나. 적이 얼마나 많든 간에 공성전을 벌일 것도 아니니 말이야.”

“그건 그렇지요.”

발타자르의 말대로 이들은 공성전을 벌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기 때문이었다.

현재 5만의 본대가 뒤따라오는 중이고, 로키가 이끄는 야만족의 군대는 발타자르가 지나쳐온 올리오의 영지들을 휘젓고 다니는 중이었다.

따라서 굳이 피해를 감수해 가며 공성전을 벌일 필요 없이 오슬로를 포위한 채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다 적이 항복하면 항복을 받아들이면 되고 결사항전을 위해 성을 뛰쳐나온다면 그대로 쓸어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얼마나 버틸까요? 내기라도 하시겠습니까?”

가웨인의 제안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러지. 뭘 걸겠나?”

“술 내기 어떠십니까? 통 크게 여기 병사들에게 맥주 한 잔씩 돌리는 것으로요.”

“좋네.”

발타자르가 제안을 승낙하자 가웨인이 곧장 답했다.

“전 본대가 올 때까지 틀어박혀 있는 것에 걸겠습니다. 장군은 어디에 거시겠습니까?”

가웨인이 웃으며 물었다.

제법 의기양양한 모습이 승리를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오슬로의 성벽 위에서 실마르 백작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애슐리 공녀를 지긋이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말했다.

“난 5분 내로 성문이 열린다에 걸지.”

발타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슬로 쪽에서 거친 소음이 울려 퍼졌다.

기기기긱-

도르래가 빠르게 회전하며 도개교가 내려와 땅과 맞부딪쳤다. 쇠창살로 이루어진 1차 성문이 열리고, 이어서 나무와 판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2차 성문이 열렸다.

성문이 활짝 열린 오슬로를 바라보며 가웨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미래라도 보고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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