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62화
로마노프 공작가에 영상 기록구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발타자르 공작이었다.
혁명단 토벌을 위해 빌로스, 웨즈 등 공작가의 직계들을 비롯해 주력들이 모두 빠져나간 지금 공작가의 모든 업무는 애슐리가 담당하고 있었다.
“발타자르 공작이 영상 기록구를 보냈다라…….”
애슐리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달랑 영상 기록구만 보낸 발타자르 공작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 했지만, 딱히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무슨 목적이지?”
애슐리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영상 기록구를 작동시켰다.
영상 기록구가 푸른 빛을 뿜어내더니 이내 영상이 재생되었다.
* * *
온통 어둠으로 뒤덮인 검은 방.
횃불의 불길만이 은은하게 어둠을 밝혀주는 가운데 화면의 중심에 한 사내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는데 사내의 앞으로 또 다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애슐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발타자르 공작.
그가 분명했다.
“자네의 이름은 무엇인가.”
발타자르 공작이 묻자 의자에 앉아 있는 사내가 잠에 취한 듯 몽롱한 목소리로 답했다.
“……힐리스 켈마르크.”
사내의 이름을 들은 애슐리는 기함했다.
힐리스 켈마르크 백작.
슈미트라 교단의 아크 크루세이더이며 제국 최강자가 아니던가!
분명 이번에 온두라스에서 일어난 암습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켈마르크 백작이 파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대체 그가 왜 저런 모습으로 영상 기록구 속에서 발타자르 공작과 함께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온두라스에 방문한 목적은 무엇인가.”
“자비에고 주교님의 밀명으로 발타자르 공작을 견제하기 위해서.”
“본 공작을 견제한다라. 대체 무슨 연유로?”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발타자르 공작이 황제파와 손을 잡았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고자…….”
대화를 듣고 있던 애슐리는 깨달았다.
자비에고 주교가 켈마르크 백작을 이용해 발타자르 공작에게 수작질을 부렸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라고 말이다.
‘발타자르 공작이 수작질을 부린 켈마르크 백작과 자비에고 주교를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 켈마르크 백작은 죽은 목숨이겠네. 그렇다면 칼을 잃은 자비에고 주교는 여러 파벌의 공격을 받기 시작할 테고 제도 정계의 권력 구도가 또 한 번 바뀌겠어.’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도 거기까지 짐작해 낸 애슐리였지만, 여전히 발타자르 공작이 대체 왜 이 영상 기록구를 보낸 것인지 그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자비에고 주교 말고도 공범자 혹은 협력자가 더 있는가?”
“로마노프 공작가…….”
애슐리는 켈마르크 백작의 입에서 로마노프 공작가가 튀어나오자 깜짝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러곤 이내 켈마르크가 왜 로마노프 공작가를 언급했는지 짐작해 내었다.
‘웨즈! 이 멍청한 놈이!’
필시 지난번 발타자르 공작에게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서 자비에고 주교와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안 그래도 대신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자비에고 주교와 손을 잡았다고 해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다만.
발타자르 공작을 건드렸고,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서 문제인 것이지.
까득-
다급해진 애슐리가 손톱을 깨물었다.
사실 켈마르크 백작의 증언만으로는 명분이 부족하긴 하지만 명분이야 어떻게든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웨즈가 발타자르 공작에게 빌미를 주었다는 것이었다.
애슐리가 직접 만나본 발타자르 공작은 결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었다.
만약 발타자르 공작이 군을 일으켜 밀고 들어온다면 주력이 모두 혁명단 토벌에 투입된 로마노프 공작가로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바로 전선에 연락을 보낸다고 해도 혁명단과 전투 중인 지금 섣부르게 병력을 돌릴 수도 없을 텐데…….’
진퇴양난이었다.
이대로 병력을 돌려 철수한다면 혁명단이 곧장 뒤를 칠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현재 남아 있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힘만으로 발타자르 공작을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병력을 오슬로에 집중시켜 농성을 벌여야 할까? 아니, 그렇게 한들 발타자르 공작의 정병들을 상대로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발타자르 공작의 병사들은 겨울 전쟁을 통해 단련된 강병들인데 반해 현재 로마노프 공작가에서 끌어모을 수 있는 병력은 급조성한 징집병이 전부였다.
‘제도에 지원을 요청한다면? 발타자르 공작의 세력이 여기서 더 커지는 것을 중앙에서도 원하지 않을 테니…….’
애슐리가 고민하는 중에도 영상 기록구는 끊임없이 영상을 재생하고 있었다.
“성실하게 대답해 주어 고맙네.”
발타자르 공작이 천천히 영상 기록구를 향해 걸어왔다.
또각- 또각-
들려오는 발소리에 애슐리가 생각을 멈추고선 영상 기록구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영상 기록구의 앞에 선 발타자르 공작이 사나운 기색으로 말했다.
“보았다시피 켈마르크 백작이 모두 자백하였네.”
애슐리는 불현듯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
그리고 그녀의 불안감은 적중했다.
“선물을 받았으니 그에 답해주는 것이 예의겠지.”
발타자르 공작이.
“현 시간부로 발타자르 공작가는 로마노프 공작가를 향해 영지전을 선포하는 바일세.”
영지전을 선포했다.
* * *
본래 영지전은 과도한 영지전으로 인해 제국의 전력이 손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황실의 승인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하지만 각 지방의 선제후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정당한 명분만 있다면 가능하도록 변경하였고, 덕분에 선제후들이 지방에서 무소불위 강력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발타자르가 로마노프 공작가를 향해 영지전을 선포한다고 해도 이것에 대해 그 누구도 제지할 수 없었다.
“켈마르크 백작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신시아가 의자 위에 기절한 듯 축 늘어져 있는 켈마르크 백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죽은 듯 미동조차 없는 그는 과도한 약물 투여로 인해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였다.
켈마르크 백작이 순순히 진실을 실토할 리가 없으니 그에게 강력한 자백제를 투입한 후 영상을 찍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찍은 영상들은 로마노프 공작가와 황제파에게로 전해졌고 양측 모두에게 영지전을 선포했음을 전달해 둔 상태였다.
“적당한 때. 적절한 상황에서 죽여야겠지.”
아직까지는 이용 가치가 있기에 살려둘 뿐 켈마르크 백작은 결코 살아서는 발타자르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발타자르가 손짓하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켈마르크 백작을 데리고 떠나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신시아가 말했다.
“켈마르크 백작을 미끼로 해서 자비에고 주교를 이용하시려는 거죠?”
발타자르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한 그녀의 질문에 발타자르가 흥미를 가지고 되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신시아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지금 상황에서 켈마르크 백작의 이용 가치는 그것이 제일이니까요.”
“설명해 보게.”
“켈마르크 백작이라는 칼을 잃게 된 자비에고 주교는 조만간 압박을 받기 시작할 거예요.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말이죠. 그동안 쌓아온 것이 있으니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겠지만 그럴수록 켈마르크 백작의 부재를 안타까워하고 후회할 거예요. 그때 자비에고 주교에게 넌지시 켈마르크 백작의 송환을 가지고서 거래를 한다면 자비에고 주교는 많은 것을 내주고서라도 그를 돌려받으려 하지 않겠어요?”
말을 마친 신시아가 돌연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말을 덧붙였다.
“물론 자비에고 주교가 돌려받을 켈마르크 백작은 그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겠지만요.”
만 점짜리 답변이었다.
발타자르가 신시아를 칭찬하려는데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 * *
“발타자르!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이 들리던데. 사실인가?”
불청객은 야만왕 우트가르트 로키였다.
그는 바이칸들이 발타자르 영토 내에 자리를 잡는 일에 대해 추가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 온두라스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디서 영지전의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전쟁을 거론하며 잔뜩 흥분한 얼굴이었다.
“언제부터 시작되는 건가? 선봉은 당연히 우리 바이칸들이겠지?”
“그 얘긴 또 어디서 들었는가?”
발타자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로키를 바라보며 묻자 로키가 씩 웃으며 답했다.
“트리스탄이 아주 신이 나서 주변에 떠벌리고 다니던걸.”
로키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에게 영지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이가 누구인지 쉬이 짐작되었다.
발타자르가 신시아를 지그시 바라보자 그녀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발타자르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이내 화제를 전환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런데 바이칸 분들은 왜 그렇게 전쟁을 좋아하시는 거예요?”
신시아의 물음에 로키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발타자르를 힐끗 보더니 낄낄 웃으며 답해주었다.
“그대들 제국인들이 믿는 신들과는 달리 우리 바이칸들이 모시는 신들께선 용맹한 전사를 무척이나 총애하시기 때문이지.”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우리들의 신들께선 전장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한 바이칸을 신들의 거처인 발할라로 초대하시지. 우리 바이칸들에게 가장 영광된 것이 바로 이 발할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로키의 말에 신시아는 바이칸들이 광신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런 것도 있고 바이칸의 삶이란 것이 날 때부터 투쟁의 연속이다 보니 자연스레 전쟁에 열광하는 것도 있지. 그보다 발타자르.”
말을 마친 로키가 발타자르를 불렀다.
“선봉은 무조건 우리 바이칸의 것이네.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약속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겠네.”
로키의 엄포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리하게.”
* * *
발타자르는 로마노프 공작가를 향해 영지전을 선포하는 것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군을 일으켜 로마노프 공작가의 세력권인 올리오 지방으로 진군했다.
이에 애슐리는 정면에서 발타자르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병력을 오슬로에 집중시켰다.
또한, 센피단 지방에서 혁명단과 치열한 접전 중인 로마노프 공작가의 지휘부에 발타자르의 영지전 선포를 알리고 혹여라도 병력을 돌리지 않도록 경고했다.
이제 와 병력을 돌린다고 해도 발타자르의 군대를 막아낼 것이란 확신이 없을뿐더러 혁명단이 순순히 군대를 물리는 것을 지켜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현재 로마노프 공작가에 남아 있는 여력만으로 최대한 버텨보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오슬로를 버리고 올리오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황명으로 혁명단의 토벌을 천명한 지금.
발타자르와 로마노프 공작가가 영지전 중이라고 해도 황명을 수행 중인 군대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지는 못할 테니까.
그렇게 애슐리가 발 빠르게 조치를 취한 덕분에 발타자르의 군대는 진격하는 동안 일체의 전투 없이 빠른 속도로 영지들을 장악해 나갔고, 영지전 선포 일주일 만에 로마노프 공작가의 근거지인 오슬로에 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