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61화
아무리 제도 대신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다고는 하지만 중앙도 아닌, 그것도 고위 귀족의 영지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것은 제 목숨을 거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켈마르크 백작이 이렇게 날뛸 수 있는 것에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는 슈미트라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거칠 것이 없는 광신도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행동은 신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둘째. 그의 뒤에 외무대신 프란체스 자비에고가 있었다. 슈미트라 교단의 주교이기도 한 그가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기 때문에 여지껏 켈마르크 백작이 어떠한 문제를 일으켜도 그를 향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셋째. 켈마르크 백작 본인의 무위가 마스터, 그것도 제국 최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막강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정치적으로는 자비에고 주교가.
무력으로는 본인 자체가 막강하니 아무리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그를 두려워하였고 따라서 그에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발타자르의 최근 행보들과 황제파의 움직임 등을 연관 지어 자비에고 주교는 발타자르가 황제파에 가담했다고 판단했고 그를 압박할 명분을 얻기 위해 켈마르크 백작을 파견하는 강수를 두었다.
평소 북부가 타 지역에 비해 슈미트라의 신도가 적다는 사실이 탐탁잖았던 켈마르크에게는 무척이나 좋은 기회였다.
켈마르크 백작은 자비에고 주교가 깔아준 판 위에서 거침없이 날뛰기 시작했다.
우선 온두라스의 시민들을 상대로 종교를 파악하고 슈미트라를 믿지 않는 이들을 모조리 잡아들였다.
그 후 그들을 이단자라 몰아가며 이것을 빌미로 온두라스의 관리들마저 엮어 들어가 종교재판에 기소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을 빌미로 발타자르를 압박하는 것만이 남은 상황에서 온두라스의 주인이 돌아왔다.
“밀튼. 괜찮은가?”
발타자르가 결박에서 풀린 밀튼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곧장 괜찮다고 말하려던 밀튼이 입을 닫고는 몸 상태를 점검해 보는 듯한 몸짓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지 않습니다. 팔 한쪽이 부러진 것 같습니다만…….”
그 누가 보아도 어색함이 뚝뚝 떨어지는 동작으로 밀튼이 어깨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의 팔이 부자연스럽게 힘없이 흔들거렸다.
“그거 무척 안타까운 일이군.”
발타자르가 밀튼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켈마르크 백작을 바라보았다. 그는 시종일관 여유가 넘치는 얼굴로 발타자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백작. 저들을 이리 잡아둔 이유가 무엇인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켈마르크 백작이 답했다.
“저들이 이단자이기 때문이오.”
“이단자라?”
“그렇소. 슈미트라 님을 섬기지 않고 악신을 섬겨 영혼이 타락했기에 저들을 구원하고자 이리 모아둔 것이오.”
“그렇군.”
켈마르크 백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발타자르가 이내 손을 휘둘렀다.
짜악-
발타자르의 손이 켈마르크 백작의 뺨을 후려쳤고 켈마르크 백작의 고개가 옆으로 팩- 돌아갔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손을 들어 올린 켈마르크 백작이 후려 맞은 뺨을 매만졌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억눌린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켈마르크 백작이 한마디를 하려는데 발타자르의 말이 한 발 더 빨랐다.
“사자가 자리를 비우면 이리가 왕 노릇을 한다더니. 그대가 딱 그 짝이로군. 감히 내 영지에서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영지민들과 관료들을 잡아들이고 핍박하다니.”
발타자르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크루세이더들과 사제들을 제압했던 군타낙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휘둘러 그들의 목을 쳐내었다.
순식간에 광장이 피바다가 되고 짙은 피 내음이 단상 위로 올라왔다.
발타자르의 돌발 행동에 켈마르크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대놓고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감히 변방의 공작 나부랭이…….”
짜악-
재차 휘둘러진 발타자르의 손이 켈마르크 백작의 뺨을 재차 후려쳤다.
“죽고 싶으면 그 주둥아리를 한 번 더 놀려 보게. 나도 내가 어찌 반응할지 모르니까.”
이번에는 켈마르크 백작이 참지 않고 워 해머를 들어 올리며 발타자르를 향해 겨누었다.
“운이 좋아 공작 위에 오르니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네놈이 암만 고위 귀족이 되었다고 해도 기껏해야 변방의 귀족. 슈미트라의 종들을 해하고도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켈마르크 백작의 일갈과 함께 그의 워 해머에서 오러블레이드가 넘실거렸다.
그가 손에 조금만 힘을 준다면 그대로 발타자르의 머리통이 으깨어지고 곤죽이 되어버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발타자르는 무심한 눈동자로 켈마르크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무엇을 믿고 이리 천방지축으로 날뛰는지 모르겠군. 자비에고 주교의 권세를 믿는 것인가? 아니면 일신의 무위를 믿고 이리 오만한 것인가?”
발타자르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곳곳에서 발타자르 공작가의 깃발이 솟구쳤다. 이어서 일단의 군세가 광장 주변을 가득 메우며 하늘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발타자르 공작 각하 만세!]
[프락시온 제국 만세!]
지축이 흔들리고,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가 켈마르크 백작을 짓눌러 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각 성문에 크루세이더를 배치해 두었건만 지금 이 상황으로 보건대 모두 당한 것 같았다.
“끄응…….”
상황이 켈마르크 백작의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사실 켈마르크는 잡아들인 이들을 모두 정화형에 처할 생각은 없었다.
본보기로 몇을 정화형에 처한 후 남은 이들은 인질 삼아 발타자르를 압박할 계획이었다.
만약 문제가 생겨 일이 틀어진다고 해도 발타자르에게 강렬한 경고를 남기는 일은 되리라 생각했었다.
물론 이 생각과 계획들의 전제에는 자비에고 주교를 등에 업은 조사단을 발타자르가 쉬이 손대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한데 발타자르가 모든 예상을 뒤엎고 강경한 태도를 내비치니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것은 자비에고 주교님을 향한 도전이라고 봐도 되겠는가? 설마 꼭두각시 황제를 믿고 이러는 것은 아니겠지?”
켈마르크 백작이 자비에고 주교를 거론하며 압박해 보지만 발타자르는 피식- 웃으며 실소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어쩔 텐가? 저 멀리 제도에 계신 자비에고 주교께옵서 이 한 몸 내치자고 직접 오시지는 않으실 것이고. 결국엔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날 쳐야 할 것인데 이 북부에서 그 누가 감히 내게 칼날을 들이밀 수 있단 말인가.”
실로 오만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사실이기도 했다.
누가 뭐라 해도 북부에서 가장 강한 세력이 바로 발타자르의 세력이었으니까.
자비에고 주교의 위세를 빌려 압박을 해보았지만 먹혀들지 않자 켈마르크 백작이 이번에는 로마노프 공작가를 거론했다.
“웨즈 공자가 단단히 벼르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는가? 그가 공작 위에 오른 이후의 일은 생각지도 못하나 보군.”
명백한 협박이었지만 발타자르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대신들의 지원을 등에 업은 웨즈의 성장세가 사뭇 매섭기는 하나 다른 후보자들이 그것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또한, 만에 하나의 경우 웨즈가 로마노프 공작위에 오르고 발타자르를 향해 검을 뽑아 든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기운이 다한 작금에 이르러 현재 북부의 최고 권력자는 바로 이 몸일세.”
야만족의 침공에 이어 혁명단의 봉기로 인해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된 로마노프 공작가는 더 이상 발타자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아직 공작위에도 오르지 못한 웨즈 공자를 거론한다고 하여 두려워 할 것 같은가?”
하물며 조만간 로마노프 공작가를 쳐낼 계획인 발타자르로서는 로마노프 공작가를 언급한들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켈마르크 백작이 지긋이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발타자르 공작은 문제가 아니지만…….’
그와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은 없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제국 최강자이니까.
하지만 발타자르와 싸운 직후의 몸 상태로는 이만한 병력의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려고 한다면 적어도 팔 한쪽은 내어 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대업을 앞둔 지금. 이런 곳에서 심신을 소모할 수는 없지.’
켈마르크 백작은 항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항복도 형식상일 뿐이고 이것으로 발타자르의 체면을 세워주는 것으로 이번 일은 무마가 될 듯싶었다.
조사단이 온두라스에서 소란을 일으켰다고는 해도 사망자는 전무한 반면 조사단 측은 켈마르크 백작을 제외한 대다수가 사망했으며 제국 최강인 켈마르크 백작이 항복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오?”
켈마르크 백작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발타자르가 이내 답했다.
“한동안 저택에 머물고 있게. 마침 전 온두라스의 영주가 쓰던 저택이 비어 있으니 그곳이 좋겠군. 제도에는 내가 따로 연락을 넣을 터이니 그때까진 저택에서 푹 쉬게나.”
연금령이었다.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적당한 처분에 켈마르크 백작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게 하리다.”
“그리고 잠시 포박되어 주어야겠네. 어찌 됐든 자넨 범죄자 아닌가.”
발타자르의 말에 켈마르크 백작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치욕도 이런 치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말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까득. 그리, 하시오. 까드득.”
이를 갈며 켈마르크 백작이 다가오는 기사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맡겼다. 기사들은 능숙한 동작으로 켈마르크 백작을 무릎 꿇리고 사지를 결박했다.
이내 켈마르크 백작이 결박되고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가 분노로 가득 찬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되었소?”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발을 들어 올려 켈마르크 백작의 어깨를 밟으며 그의 몸을 넘어뜨렸다.
동시에, 언제 뽑혔는지 모를 검이 켈마르크 백작의 가슴팍에 박혀 들었다.
발타자르의 검이 켈마르크 백작의 오러하트를 꿰뚫자 오러하트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간 켈마르크 백작이 눈이 크게 치떠지고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말했지 않나. 한 번만 더 주둥이를 놀린다면 내가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네놈……!”
발타자르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호랑이 소굴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켈마르크 백작을 순순히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자비에고 주교의 가장 강력한 패를 무력화시킬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 기회를 잡지 않는 것은 머저리나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다만 발타자르가 켈마르크 백작의 목숨을 취하지 않고 오러하트를 깨뜨린 것에 그친 것은 그에게 이용 가치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당한 놈이 멍청한 것이지. 그걸 가지고 왜 내게 화를 내는 것인가?”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켈마르크 백작이 붉은 피를 토해내었다. 오러하트가 깨진 영향이었다.
그의 몸에서 마나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더니 종내에는 한 줌의 마나 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자비에고 주교님께서 결코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켈마르크 백작이 피를 토하며 절규하듯 소리쳤다.
발타자르가 그의 어깨를 밟은 채로 허리를 숙여 얼굴을 마주했다.
“자네라는 강력한 칼을 잃은 자비에고 주교가 지금처럼 계속 권세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황제파가 나설 것도 없이 그가 손에 틀어쥔 권력을 노린 아귀 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할 걸세. 모르긴 몰라도 이런 변방에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을 테지.”
그 말에 일순간 켈마르크 백작의 눈이 크게 치떠지고 발타자르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 제도는 권력투쟁으로 더욱 정신이 없어질 테고. 그렇게 되면 변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들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걸세. 그것이 설령 새로운 선제후 가문의 탄생이라고 해도.”
켈마르크 백작이 새하얗게 질렸다.
“……네놈이구나. 연회장에 암살자를 보낸 것이 황제파가 아니라 바로 네놈이었어!”
그는 이 모든 것이 발타자르의 계획이라 생각했다.
연회장의 암습으로 황제파와 대신들이 정쟁을 벌이게 만든 것도.
그로 인해 자신이 조사단으로 파견 나온 것까지 모두.
“슈미트라 님의 저주가 있으리라!”
켈마르크 백작이 저주를 퍼붓자 발타자르가 실소하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 잘난 신께서 부디. 아주 부디. 내게 저주를 내리셨으면 좋겠군.”
그 말을 끝으로 발타자르의 발이 움직이며 켈마르크 백작의 미간을 후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