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58화
발타자르가 일행들과 함께 비프로스트 요새에 도착한 그 날 밤.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발타자르에게 아이린이 찾아왔다.
“오라버니! 별똥별이에요!”
어찌나 급히 달려왔던지 그 말을 외치곤 아이린이 헥헥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발타자르가 그런 아이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신기하니? 가끔씩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보이는 것이 유성이지 않니.”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이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거칠게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랑 달라요. 별이 엄청 많이 떨어지고 있어요!”
두 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요란스럽게 말하는 아이린을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피식- 웃던 발타자르가 돌연 웃음을 뚝- 그쳤다.
“……얼마나 많이 떨어지고 있는데?”
발타자르가 묻자 아이린이 바로 대답했다.
“아까 전부터 계속 떨어지고 있어요. 막 비가 내리는 것처럼요.”
그 말에 발타자르가 황급히 집무실을 벗어나 밖으로 나섰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복도를 지나 공터로 나오자 주위가 마치 대낮인 듯 환한 빛을 띠었다.
발타자르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자 그곳에는 하늘을 빼곡히 수놓은 별들이 마치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빛의 궤적을 그리며 쏟아져 내리는 별 무리.
한 폭의 그림 같은 장관이 연출되었다.
발타자르가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용사들이 왔구나.”
회귀 전의 기억보다 반년 빨리 용사들이 이 땅을 방문했다. 그렇다는 것은 조만간 마왕들 역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었다.
아직 혁명단의 토벌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이 등장하였으니 시국은 이제 한 치 앞도 모르는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쿠웅─ 쿠웅─
떨어지던 별 중 몇 개의 별이 비프로스트 인근에 떨어지며 환한 빛과 함께 지축을 울렸다.
“게 누구 없느냐!”
이에 발타자르가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장교 둘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부르셨습니까! 컥-!”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달려온 장교들은 눈앞에 총사령관이 있자 잔뜩 긴장해서는 최대한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를 올렸다.
“프, 프락시온 제국에 영광을!”
발타자르가 그런 장교들의 경례를 받아주곤 말했다.
“자네는 지금 바로 가서 기사들과 기병들을 소집하게. 그리고 자네는 가웨인이나 갤러해드, 아니, 지휘관급이면 아무나 좋으니 찾는 대로 소집된 병력을 이끌고 별 무리가 떨어진 곳으로 향하라고 전하게. 가서 인근에 있는 사람은 몽땅 잡아 오라 전하게.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는 말도 함께. 알겠는가?”
발타자르의 말에 장교들이 재차 경례를 올리곤 힘차게 대답했다.
“예!”
이윽고 장교들이 황급히 떠나가고, 발타자르가 여전히 별들이 떨어져 내리고 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계획을 빨리 앞당겨야겠군.”
비비안과 계약하며 힘이 한층 강해진 상태이니 계획을 앞당긴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터였다.
“후우…….”
발타자르의 한숨이 깊어져만 갔다.
* * *
그리고 이날.
비프로스트 인근에서 총 다섯 명의 용사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중 살아남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들 중 셋은 현장에서 사살되었으며 나머지 둘은 순순히 끌려왔으나 발타자르가 얼굴을 보자마자 곧장 사형 선고를 내림으로써 앞선 세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살되었다.
* * *
비프로스트 요새의 본성에서 이틀간 휴식을 취한 발타자르는 일행들은 내버려 둔 채 군타낙스 기사단만을 이끌고 제 1관문으로 향했다.
출발 직전 보고받은 바에 따르면 5일간의 전투 동안 사상자가 도합 1만에 달한다고 하였다. 이것만 봐도 싸움이 얼마나 격렬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이 시답잖은 연극도 끝내야겠군.’
비록 치열한 전투라고는 하지만 이번 한 번의 전투로 신병들이 능숙한 숙련병처럼 전투력이 급상승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전투로 살아남은 병사들은 적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뎌낼 수준은 벗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이 차이는 매우 컸다.
아무리 혹독한 훈련을 받은 병사라고 해도 막상 전쟁터에 서게 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몸이 경직되어 제힘을 다 발휘하지 못한다.
그 두려움이 커져 그것에 먹히게 되면 쉽게 패주하는 오합지졸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반면 실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병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기에 제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을뿐더러 전황이 조금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해서 쉽게 패주하지 않게 된다.
일례로 야만족의 경우 성년식을 치를 때 경쟁 부족의 전사. 혹은 마수를 홀로 상대하고 끝내 그 숨통을 끊어 놓아야만 비로소 전사로 인정받게 된다.
전사의 증명이라고도 불리는 야만족 특유의 성인식인데 이 전사의 증명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심성이 유약하거나 혹은 두려움에 쉽게 휩싸이는 자는 전사의 증명을 결코 통과할 수 없었다.
상대가 타 부족의 전사든 혹은 마수이든 그들 역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싸우는 이들이니 말이다.
따라서 이 전사의 증명을 통과한 야만족의 전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법을 알고 그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야만족의 전사들이 강한 것이고, 두려운 것이었다.
* * *
두두두두─
비프로스트 요새 본성에서 출발하여 단숨에 1관문에 도착한 발타자르는 거기서 말을 멈추지 않고 더욱 박차를 가하며 속력을 올렸다.
미리 지시한 대로 성문을 지키고 있던 장교가 성문을 열자 발타자르는 그대로 말을 몰아 성문을 통과했다.
성문을 지나자 성벽이 막아주던 거친 한파가 휘몰아쳤다.
눈이 휘날리고, 살이 베일 듯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눈보라 너머로 야만족들이 진격해 오는 가운데 발타자르의 검에서 붉은 오러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돌격 태세!”
[돌격 태세!]
발타자르의 외침에 군타낙스 기사단이 일제히 쥐고 있던 랜스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거센 눈보라를 가르며 오러의 폭풍이 군타낙스 기사단을 휘감았다.
“충격 대비!”
[충격 대비!]
마치 화살이라도 된 것 마냥, 빠른 속도로 나아간 발타자르와 군타낙스 기사단은 정면에서 달려오는 야만족의 전사들을 문자 그대로 분쇄하며 야만족의 진영을 관통해 나아갔다.
마스터가 이끄는 기사단의 돌격에 그 앞을 막아설 자가 없었다.
그저 스치기만 해도 몸이 곤죽이 되어버리는 통에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한 야만족의 전사들 조차도 쉬이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피해라!”
“정면에서 맞서면 안 된다!”
심지어 지휘관급의 전사들은 ‘저것’에 맞서지 말라며 전사들을 뒤로 물리기까지 했다.
그렇게 막힘없이 질주한 끝에 발타자르와 군타낙스 기사단은 야만족의 본진에까지 치달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야만왕.
우트가르트 로키가 있는 곳이었다.
* * *
“막아라!”
“저들이 왕에게 다가가게 두지 마라!”
야만족들 가운데서도 손에 꼽히는 유명한 전사들이 발타자르와 군타낙스 기사단의 앞을 막아서는 가운데.
그들을 향해 돌진해 나아가던 군타낙스 기사단이 천천히 말의 속도를 줄여나갔다. 동시에 그들을 휘감고 있던 오러의 폭풍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히이이잉-
이윽고 말이 정지하고,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발타자르의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거칠게 투레질했다.
군타낙스 기사단과 야만족의 전사들이 묘한 대치를 이어가는 가운데 야만족의 전사들 사이에서 야만왕 우트가르트 로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게 누군가! 발타자르! 제국의 용이여!”
로키가 두 팔을 벌리고 발타자르를 맞이해 주었다.
“로키, 오랜만이군.”
발타자르가 말 위에서 로키를 내려다보며 인사했다.
이에 로키는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양날 도끼를 집어 들어 쿵-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그래. 한판 하려고 오셨나?”
살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로키가 묻자 발타자르가 말 위에서 내리곤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얼굴만 내비쳐 달라고 부탁했건만. 인사를 아주 거칠게 했더군.”
“예상 못 한 일도 아니지 않나? 그리고 오히려 그걸 원했던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
발타자르가 시원스레 수긍하자 로키가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 이래서 내가 널 맘에 들어 한다니까. 확실히 유약한 제국 놈들과는 다르단 말이지. 혹여 핏줄 중에 북부인의 핏줄이 섞여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어.”
로키의 말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며 답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뭐. 인사치레는 이 정도로 하고. 이곳까지 행차한 이유가 무엇인가?”
“자네와 마찬가지로 약속을 지키러 왔네.”
발타자르의 말에 로키가 눈을 빛내며 그를 응시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어떻게. 여기서 당장 시작할까?”
로키가 당장에라도 발타자르를 향해 양날 도끼를 휘두를 기색으로 물어왔다.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세 번째 약속도 이행해 주었으면 하는데.”
겨울 전쟁이 끝날 무렵.
발타자르는 야만족의 군대가 온전히 북부로 퇴각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주었고 그 대가로 로키에게 세 가지 약속을 얻어내었다.
로키는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차후에 못다 한 대결을 약속해달라 하였고 발타자르는 그의 요구를 승낙하였다.
첫 번째 약속은 발타자르가 원할 때 야만족의 군세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 약속은 3군을 야만족의 한 부족으로 인정하며, 그들을 이끄는 발타자르에게 족장의 직위를 내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약속.
그것은…….
“……재밌군. 그냥 한 말인 줄 알았더니.”
발타자르의 말에 로키가 잔뜩 굳은 얼굴로 발타자르의 얼굴을 응시했다.
“내가 허언을 할 사내로 보이던가?”
“아니. 물론 아니지.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첫 번째 약속이야 그렇다 치고 두 번째 약속부터는 하나같이 자네에게 별 이득이 없는 약속들뿐이니 말이야. 그렇다고 자네가 우리 바이칸들에게 친화적인 인물도 아니니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발타자르가 검을 들어 로키를 향해 겨누며 말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닐 텐데?”
그의 말에 로키가 피식 웃으며 양날 도끼를 어깨에 턱- 하니 걸쳤다.
“그래, 그렇지. 결국, 모든 것은 삶을 내건 투쟁으로 증명할 뿐.”
그리 말하곤 로키가 주위가 떠나가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족장들을 소집해라! 바이칸의 왕. 우트가르트 로키의 이름으로 전사들의 연회를 시작하겠노라!”
그의 외침에 주변에서 군타낙스 기사단과 대치하던 전사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뭣들 하느냐! 내 말이 들리지 않았더냐!”
로키가 그들을 향해 호통을 치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전사들이 황급히 족장들을 부르기 위해 떠나갔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지켜보던 로키가 발타자르에게로 시선을 옮기고선 씨익- 미소 지었다.
“자, 족장들이 도착하려면 시간이 제법 남았으니 그동안 나와 함께 몸이나 풀고 있는 것이 어떻겠나?”
제안하듯 말했지만, 양날 도끼를 양손에 쥐고선 자세를 잡고 있는 그 모습에서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