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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57화 (57/183)

공작이 회귀함 57화

발타자르와 맺은 언약으로 인해 야만왕 우트가르트 로키는 군을 이끌고 비프로스트 요새로 진격하였다.

겨울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된 야만족이었으나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총 15만의 병력으로 공성전을 감행해 왔다.

야만족은 공격하는 척만 해 달라는 발타자르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비프로스트 요새를 맹렬한 기세로 몰아쳤다.

하지만 이것은 발타자르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

비프로스트 요새는 본성과 2개의 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본성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2개의 관문 중 한 곳은 필히 거쳐야만 했다. 현재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이 두 개의 관문 중 제1관문이었다.

발타자르는 이곳에 병력 5만을 주둔시켰는데 병력의 다수가 실전 경험이 없는 신병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성벽이라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병사들은 야만족의 공세를 잘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신병으로 구성된 병력인 만큼 언제까지고 막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함락될 걱정은 없었다.

1관문 인근에는 7만의 본대가 대기 중이었다.

따라서 설령 제 1관문이 위험해질 때 언제고 지원 병력을 급파할 수 있으며 설령 야만족의 수중에 1관문이 넘어간다고 해도 금세 탈환할 수 있었다.

발타자르가 굳이 이런 비효율적인 배치를 한 이유는 신병들의 실전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서였다.

3군을 포함하여 발타자르의 지휘 아래 있는 병력은 총 20만.

그중 10만이 겨울 전쟁을 거친 강병들이고 나머지 10만 중 5만은 이번에 새로이 모집한 신병들이며, 남은 5만은 혁명단의 포로 중에서 선발한 노예병들이었다.

노예병들은 이번에 제도에서 내려온 귀족들과 함께 센피단 지방으로 향했고 신병들은 비프로스트 요새에서 야만족을 상대하고 있었다.

이 5만의 병사들이 이번 전투를 거쳐 정병으로 거듭나게 되면 발타자르가 북부를 제패하는 퍼즐 조각이 대부분 완성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로마노프 공작가를 비롯한 토벌대들은 혁명단을 상대하느라 전력을 소비하며 발타자르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있었다. 그동안 발타자르는 그가 유도한 야만족의 재침공으로 신병들을 단련하고, 북부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가 손에 넣은 영지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다지고 있었다.

* * *

“윽…….”

에버나스 산맥 곳곳에 자리 잡은 관문들을 거쳐 비프로스트 요새 인근에 도착한 발타자르 일행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데, 요새 방면을 바라보던 비비안이 코를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에버나스 산맥의 초입부부터 표정이 나쁘긴 했지만, 크게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썩 좋아 보이는 표정이 아니었다.

“왜 그래요?”

아이린이 그런 비비안에게 다가가 묻자 비비안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답했다.

“냄새가 너므 도캐요.”

“냄새요?”

비비안의 말에 아이린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아 보았지만 풀 내음 말고는 따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혹시 풀냄새를 싫어하세요?”

“으게 아이라…….”

결국, 참다못한 비비안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거대한 물방울이 생겨나더니 비비안의 머리를 집어삼켰다.

머리에 물방울을 뒤집어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된 비비안이 그제야 숨을 푹- 내쉬며 한결 편안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아. 살겠다. 그게 아니라 피 냄새 때문이에요.”

비비안의 대답에 아이린은 지난번에 발타자르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정령들은 피 냄새. 그러니까 오랜 시간이 지나면 발생하는 그 특유의 기운을 싫어한다고 했었다.

“최대한 익숙해져 보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네요.”

쓰게 웃으며 말하는 비비안에게 아이린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힘들면 굳이 참지 않아도 돼요.”

비비안이 그런 아이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어쩜. 이리 예쁘게도 말할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알과 함께 다니려면 익숙해 져야죠.”

비비안은 최근 들어 발타자르를 애칭으로 불렀는데 발타자르는 그것에 대해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비비안의 말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이자 비비안과 아이린이 그 모습을 보곤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꺄르르- 웃고는 서로 장난을 치며 놀기 시작했다.

발타자르가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비프로스트 요새로 시선을 옮겼다.

“제법 많이 발전했군.”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비프로스트 요새를 내려다보며 발타자르가 짧게 평했다.

곳곳에 고층 건물을 비롯해 여러 시설이 건설된 비프로스트의 모습은 요새임에도 도시를 연상하게 했다.

아직 오슬로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온두라스보다 더욱 발전한 모습이었다.

“막대한 돈을 들였으니까요. 거기다 저희 근거지이기도 하니 저 정도는 되어야지요.”

옆에서 가웨인이 말하곤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야만족의 공세가 심상치 않다는데 괜찮겠습니까?”

오늘 새벽 도착한 전령의 보고에 의하면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양측 모두 통틀어 하루에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했었다.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짐작하지 못한 것도 아니지 않나.”

“그래도 적정선에서 싸워야지 저렇게 싸워대다간 신병들이 죄다 죽어 나갈 겁니다. 야만왕에게 따로 연락을 넣어 공격의 강도를 조금 낮춰달라고 요청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전쟁에 적정선이 어디 있나. 그리고 야만왕이 내가 부탁한다고 들어줄 것 같은가? 설령 야만왕이 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의 휘하에 있는 전사들이 그 통제를 따를 리가 없지.”

발타자르의 군에 전향한 야만족 출신의 전사들만 봐도 야만족들의 성향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제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싸움에만 모든 신경을 몰두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이들이 작전상 후퇴를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도 저들의 힘이 다 빠진 후에야 말을 따르지, 그렇지 않다면 퇴각하라 신호를 보내도 무시하고 죽어라 싸워댈 놈들이 야만족들이었다.

뭐. 그러한 성향 덕분에 겨울 전쟁에서 제법 덕을 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신병들이라고는 하나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무장시키고, 훈련시킨 병사들이 아닙니까. 실전 경험도 좋지만 이렇게 진짜 전쟁도 아닌 일에 병사들을 잃기에는…….”

“가웨인.”

발타자르가 가웨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혁명단의 봉기가 종막을 알릴 때. 제국은 또 한 번 크게 흔들릴 걸세.”

발타자르가 처음으로 용사와 마왕들의 등장.

그리고 제국 내전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원경과 같은 용사라 불리는 이계의 존재들이 이 땅을 방문할 것이고, 베른 요새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던 마왕들 역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할 걸세. 그들의 등장으로 제국의 세력 구도는 크게 뒤흔들릴 테고, 그렇게 되면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현재의 균형이 깨지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이것은 막연한 예언이나 선견지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벌어질 일이었고, 발타자르가 몸소 겪었던 일들이었다.

마왕과 용사들의 등장으로 균형이 깨지고, 혁명단의 봉기로 혼란스러운 정국이 안정되기도 전에 다시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제국 전역에서 생사를 건 전투가 연일 벌어지고, 프락시온 제국이 중앙을 제패하기 이전의 시대처럼 난세가 펼쳐지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네. 그리고 우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미래를 대비해야만 하지. 물론 그들의 희생을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포장하는 것은 아닐세. 하지만.”

그리고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길어야 3년. 빠르면 1년 이내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다.

“희생이 두렵다고 어설프게 준비를 했다간 더 큰 희생이 뒤따르는 것은 물론. 우리 모두가 그 혼란스러울 미래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네.”

사실 회귀한 이후로 발타자르는 권신이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은 막연한 생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아이린을 만나고 회귀 전 그의 멍청한 판단으로 죽거나, 뿔뿔이 흩어진 가신들을 하나둘씩 만나게 되고 난 이후로는 결심할 수 있었다.

권력자가 되겠노라고.

그들을 품에 안고, 그들을 지켜줄 수 있을 그런 강력한 권력자가 될 것이라고 결심했다.

“따라서. 그들은 강해져야만 하네. 그것이 피로 얼룩진 길이라고 해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남아야만 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가져야만 했다.

그렇기에 에버나스 지방을 손에 넣은 것이고, 끊임없이 세력을 불려 나가는 것이었다.

목적이 뚜렷해진 발타자르에게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신병들의 실전 경험이 끝나는 대로 군을 일으킬 걸세.”

그리고 지금.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리고 혁명단과의 전투로 그 기가 쇠한 로마노프 공작가를 찍어누르고 북부를 장악할 걸세.”

이번 야만족과의 전투로 신병들의 실전경험이 끝나는 대로 발타자르는 군을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칼날의 끝에 있는 것은 혁명단이 아닌 로마노프 공작가였다.

“북부 제패. 그것이 현재의 목표라네.”

* * *

야만족의 맹렬한 공세에도 제1관문을 지키는 신병들은 굳건히 관문을 지켜내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힘겨워 보였다.

물자는 떨어져 가고, 지원군은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령을 보내도 2관문에서 야만족의 본대가 몰아치고 있어 따로 병력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아, 하아……. 오늘도 간신히 막아냈네.”

야만족들이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던 병사 하나가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몰골은 몹시도 처참했다.

온몸이 피로 얼룩져 있으며, 방패에는 수십 발의 화살이 박혀 있었다. 또한, 그가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검은 군데군데 날이 파여 있어 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1관문이 이 정도면 야만족의 본대를 막고 있는 2관문은 대체 얼마나 치열하다는 거야.”

더 이상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던 병사는 야만족의 시체를 베게 삼아 그대로 누워 버렸다. 동료 병사가 그런 병사를 발로 툭툭 치며 말했다.

“이봐. 그러다 놈들이 다시 쳐들어오면 일어날 수나 있겠어?”

동료 병사의 말에 병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살려면 일어나야지. 하지만 지금은 너무 힘드니까 이대로 쉴 거야.”

그러자 동료 병사 역시 드러누운 병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힘드네.”

“힘만 들어? 난 죽을 것 같은데.”

“예비 병력도 죄다 투입된 턱에 제대로 쉴 시간이 없네. 쉴 시간이 없어.”

병사들이 서로 불평을 털어놓는 가운데.

성벽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씨발!”

이에 병사들이 욕설을 내뱉으며 재빠르게 일어나서는 능숙한 움직임으로 방진을 펼쳤다.

동시에.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물러났던 야만족들이 재차 공격을 감행해 왔다.

“저 새끼들은 지치지도 않나!”

병사가 악에 받친 듯 소리치며 달려오는 야만족들을 향해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점점 야만족들이 성벽에 가까워지고,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발사하려던 순간.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성벽을 강타했다.

“뭐야! 어느 멍청한 놈이 성문을 연 거야!”

“성문이 열렸다!”

“이게 무슨 헛소리야!”

성문이 열렸다는 소리에 성벽에 혼란이 찾아왔다.

정면에서 달려오는 야만족들이 언제 관문에 숨어들어 성문을 열어젖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병사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죽음.

성벽을 끼고서도 힘겹게 상대하던 야만족들을 난전에서. 그것도 이렇게 지친 상태에서 상대하기란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성벽 위를 엄습해 오는 가운데 또다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지, 지원군이다!”

“야만족이 성문을 연 것이 아니라 아군이 연 거였어!”

“사령관께서 지원군을 이끌고 오셨다!”

그 말에 병사 하나가 황급히 성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사령관의 기를 펄럭이며 일단의 무리가 성문을 빠져나가며 빠른 속도로 진격하고 있었다.

발타자르가 직접 군타낙스 기사단을 이끌고 야만족의 본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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