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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56화 (56/183)

공작이 회귀함 56화

성질이 다른 마나하트는 공존할 수 없다.

무수히 많은 학자가 주장하는 이론이었다.

기사, 마법사, 정령사.

인간을 초월한 이적을 발휘하는 이들의 힘의 근원은 마나이다.

따라서 이들은 체내에, 정확히는 심장의 반대편에 마나를 축적하는데 이 마나가 일정량 이상 쌓이게 되면 제2의 심장이라는 마나하트Mana Heart가 생성된다.

그리고 그렇게 생성된 마나하트는 사용법에 따라 천천히 변화를 일으키는데 이 변화의 끝에 최종적으로 세 가지의 마나하트로 변화하게 된다.

마스터의 오러하트Aura Heart.

아크메이지의 서클하트Circle Heart.

세이비어의 트리하트Tree Heart.

이렇게 변화된 마나하트들은 한가지 사용법에 특화되어있기에 다른 방식으로는 사용이 불가하다. 예를 들자면.

로열랭크의 기사는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지만, 마스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마도사는 오러를 익힐 수 있지만, 아크메이지는 오러를 익힐 수 없다.

대정령사는 마법을 익힐 수 있지만, 세이비어는 마법을 익힐 수 없다.

이렇듯 각 분야의 정점에 이른 이들은 다른 분야의 능력을 익힐 수 없었다.

단, 한 분야의 정점에 이르기 전.

그러니까 마나하트가 최종적인 변화를 일으키기 전에는 다른 분야의 능력을 익힐 수는 있으나 어느 한 분야도 정점에 이를 수 없었다.

이것은 대륙에 존재하는 그 어느 종족이라도 동일했다. 기나긴 대륙의 역사 동안 두 분야의 정점에 이른 사례는커녕 한 분야의 정점에 이른 이가 다른 분야의 능력을 익힌 사례조차 없었다.

지금은 멸종한 용을 제외한다면.

때문에, 비비안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진행했다고 하더라도 이 계약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한데 지금.

이루어질 수 없는 계약이 성사되었다.

세상을 온통 새하얀 빛으로 물들이며, 비비안과 발타자르의 가슴에서 솟아난 백색의 실들이 서로 엮이고 엮여 굵은 동아줄을 이루었다.

동시에 발타자르의 체내에도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오러하트가 새하얀 구체로 변화하더니 이리저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뒤틀리던 오러하트는 이내 왕관 모양으로 변화했다.

왕관 모양의 마나하트에는 세 개의 홈이 있었는데 이중 가장 좌측의 홈을 제외한 두 개의 홈에는 각기 붉은색과 녹색을 띠는 마나의 결정체가 박혀 있었다.

크라운 하트Crown Heart.

비록 불완전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달리 드래곤하트라 불리는 마나하트가 발타자르의 체내에 형성되었다.

“대단하군.”

발타자르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내었다.

신체를 점검해 본 결과 마나의 밀도가 한층 농밀해졌고 총량 역시 늘어나 있었다.

전신에선 끊임없이 마나가 순환하며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한동안은 요양해야 할 것만 같았던 왼팔 역시 완전히 회복되었다.

이 정도 기운이라면 최상위 마왕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발타자르가 마나를 끌어올리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오러블레이드가 솟구쳤다.

“죽여라!”

때마침 갈라호른이 공격을 가해왔다.

수십 개의 마법들이 쏘아지고, 남아 있던 발키리들이 일제히 발타자르를 향해 돌진해 왔다.

일격.

단 일격이었다.

발타자르가 가볍게 내지른 일격에 스물에 달하던 발키리들이 금빛 가루로 산화했으며, 수십 개의 마법들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이에 당황한 갈라호른이 도망치려 했지만 어느샌가 그의 앞에 도착한 발타자르가 갈라호른의 목을 움켜쥐었다.

“컥-”

“갈 땐 가더라도 마무리는 짓고 가야지.”

오러블레이드가 단숨에 갈라호른의 심장을 꿰뚫었다.

순간, 갈라호른의 피부가 유리 깨지듯 쩍- 하고 갈라지더니 이내 발키리들이 그랬듯 금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탁-

버드나무 위로 착지한 발타자르가 자신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스터가 정령왕과 계약을 했다라…….’

회귀 전의 기억을 통틀어도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일반 정령과 계약하는 것조차도 유례가 없는 일일진대 정령왕급의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적이라고 포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일이었다.

‘내가 회귀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그것 말고는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회귀 자체도 말도 안 되는 일이기에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었지만 이런 일까지 벌어지니 더 이상은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회귀로 인해 벌어진 일인듯하니 회귀와 연관 지을 수 있는 것은 모두 조사해 봐야 할듯싶었다.

‘가문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봐야겠군.’

발타자르가는 프락시온 제국이 왕국이던 시절 국경을 접했던 망국의 왕가였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특별할 것 없는 가문이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문서로 그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구전으로라도 전해 내려왔어야 하는 데 발타자르는 그의 아버지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들은 것이 없었다.

때문에, 조사한다고 무언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 한 번쯤 조사해 봐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비비안이 발타자르에게 다가왔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생긋-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얄미웠으나 마냥 미워할 수도 없었다. 의도치 않았다고는 하나 그녀 덕분에 기연을 얻었으니 말이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무를 수도 없겠지. 단. 일방적인 계약이었던 만큼 이쪽도 조건이 있소.”

“좋아요. 말해봐요.”

비비안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발타자르가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린을 지켜줄 것.”

발타자르의 말에 비비안이 곧장 넵튠을 불렀다.

“넵튠.”

그러자 넵튠이 비비안이 자신을 부른 의도를 알아채고는 칼같이 거절했다.

“싫습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지도 않고?”

“뻔하죠. 저 인간 여아와 계약해 달라고 부탁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싫습니다. 그리고 그릇도 작아서 저와 계약했다간 어설픈 마나하트가 깨져서 인간 여아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넵튠의 말대로 아이린은 아직 정령왕과 계약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편법은 있었다.

“조건을 걸고 가계약을 하면 되잖아. 그럼 계약자에게 무리가 가지 않고, 소모되는 마력은 마나석으로 충당하면 되니까.”

비비안이 말하는 것은 가계약이었다.

가계약은 영구적인 정식 계약과는 달리 소모적인 성향이 강했는데 특정 조건에서만 소환할 수 있는 계약인 만큼 계약자에게 아무런 부담도 없으며 소모되는 마력은 마나석으로 대체가 가능했다.

정식으로 계약한 것보다는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혹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줄 정도는 충분했다.

“세 번. 딱 세 번만 위험에서 지켜주는 것으로는 안 될까?”

비비안이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하자 그녀에게 지은 죄가 있던 넵튠은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대신. 말씀대로 딱 세 번뿐입니다.”

결국, 넵튠은 딱 세 번. 위험한 순간에 도움을 주겠다는 조건 아래 아이린과 계약을 맺었다.

“이제 만족하나요?”

비비안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묻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던 것과 조금 다른 방향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발타자르가 피치 못할 상황에 자리를 비울 경우 아이린을 지켜줄 대비책을 마련했기에 발타자르는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상황도 정리된 것 같으니 이제 떠나세.”

발타자르의 말에 일행들이 떠날 준비를 하는 가운데 비비안이 발타자르를 부르며 물었다.

“아 참. 당신 이름이 뭐예요?”

아이린을 말 위에 앉혀주던 발타자르가 그런 비비안을 힐끔 바라보곤 짧게 답했다.

“알레한드로.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 * *

국경 요새 비프로스트.

겨울 전쟁이 끝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평소에는 병사들의 훈련 소리만이 가득하던 요새가 오늘따라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병사들이 황급히 성벽으로 향하고, 화살과 기름 등 수성에 필요한 물자들이 쉴새 없이 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벽 위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 하나가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선임병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등병님. 정말 야만족이 쳐들어올까요?”

후임병의 물음에 선임병이 피식 웃어 보였다.

변변한 실전 경험 한 번 없는 후임병과 달리 선임병은 겨울 전쟁에서 살아남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왜? 겁나냐?”

선임병이 놀리듯 묻자 후임병이 발끈하며 답했다.

“아닙니다! 겁은 무슨요! 야만족 놈들 따위 오기만 하면 제가 혼쭐을 내줄 겁니다.”

후임병의 치기 어린 대답에 선임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힘내봐. 그리 쉽지는 않겠지만.”

나름대로 경고의 의미를 담은 답이었지만 후임병은 선임병의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하지 못하곤 선임병이 그의 말에 호응해 준다고 생각해서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야만족들이 아무리 강해 봐야 변변한 무장도 못 한 미개한 놈들이잖습니까. 겨울 전쟁이야 방심했다가 진 것이지 제대로 준비하고 상대했다면 겨울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겁니다. 수적으로 압도하던 야만족들이 저희 3군에게 대패하여 북부로 도망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후임병은 야만족을 무슨 원시 부족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선임병 역시 겨울 전쟁에 참전하기 전까지는 야만족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막상 상대해 본 야만족들은 하나같이 일당백의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맹목적으로 싸우는 그들은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겨울 전쟁에서 승리한 지금도 야만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물론 그들도 인간이라 창에 찔리면 죽고, 칼에 베이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같았다.

따라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선임병은 후임병을 한번 다그칠 필요성을 느꼈다.

“놈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건 좋은데. 무시하진 마라.”

“……예?”

“주위를 둘러봐. 너 같은 신병들 말고 선임병 중에서 긴장하지 않는 놈들이 몇 되나.”

선임병의 말에 후임병이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여유로워 보이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 있었다. 심지어 장교들과 기사들조차도 말이다.

아니, 자세히 보니 몇 안 되는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도 주변 사람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지만, 눈은 성벽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그제야 성벽을 뒤덮은 정체 모를 무게감이 후임병의 어깨를 짓눌러 왔다.

“컥-”

그 압박감에 후임병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팡- 팡-

선임병이 그런 후임병의 등을 몇 대 후려치며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주었다.

“인마. 정신 차려. 벌써부터 분위기에 휩쓸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간신히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후임병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제 목을 매만졌다.

“이게…… 무슨?”

“새끼. 용감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인마, 조심해. 지금이야 내가 옆에서 신경 써줄 수 있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네 몸은 네가 챙겨야 해. 방금 넌 먹힌 거야.”

“……먹히다니요?”

후임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묻자 선임병이 답을 하려다 말고 성벽 너머를 응시했다. 동시에 성벽에 적막이 찾아왔다.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침묵 속에서 조금씩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임병이 무심코 바닥을 바라보자 성벽이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선임병에게 물으려는 순간 선임병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건 곧 알게 될 거야. 온다.”

선임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벽 곳곳에서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우─

동시에 사방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다!”

“야만족이다! 놈들이 쳐들어 왔다!”

“궁수들 사격 준비!”

“방패병들은 빨리 자세 잡아!”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자리를 잡고 전투준비를 끝마쳤다. 이어서 고수들이 북을 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 소리가 후임병의 심장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후임병이 깜짝 놀라 제 가슴팍을 움켜쥐는데 방금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무언가가 후임병을 짓눌렀다.

후임병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을 짓누르는 것의 정체를.

그것은.

전쟁의 광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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