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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55화 (55/183)

공작이 회귀함 55화

그날은 비비안이 그녀의 계약자를 기다린 지 100년이 되던 해였고, 처음으로 넵튠과 비비안이 크게 싸웠던 날이었다.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넵튠의 눈에는 비비안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너무나도 한심해 보여 날카로운 말들로 그녀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고, 그녀는 그저 울기만 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당시의 넵튠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그녀와 싸우고 나서야 넵튠은 좀 더 부드러운 말로 그녀를 설득했어야 했다는 후회를 했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다.

하여 넵튠은 그녀에게 사죄하고자 무리를 해가며 중간계에 현신한 후 그녀의 계약자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그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남긴 회고록이라고?”

넵튠이 비비안의 계약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보 단체에서 넵튠에게 책 한 권을 건네주었다.

“예. 초대 듀락 후작 각하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분의 회고록입니다.”

“수고했네. 이건 수고비이네.”

넵튠은 정보원에게 보석 하나를 건네준 후 책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러곤 곧장 비비안이 있을 정령의 호수로 향했다.

‘계약자는 20년 전에 죽었고, 남은 것은 이 회귀록 하나뿐이라는 건가?’

정령의 호수로 향하던 넵튠은 계약자의 죽음을 비비안에게 전해준다면 그녀가 더 이상의 기약 없는 기다림을 계속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에 즐거워했다.

그렇게 정령의 호수로 향하던 넵튠은 문득 그녀의 계약자가 남긴 회고록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얼마나 좋은 인간이기에 그녀가 그토록 애달프게 기다릴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던 넵튠은 가던 것을 멈추곤 품에서 책을 꺼내어 듀락 후작의 회고록을 탐독했다.

[만약 정령과의 계약을 생각한다면, 물의 정령이 아닌 다른 계통의 정령과 계약할 것을 추천한다.

…중략… 물의 정령은 너무 심약하고 유순하다. 전투에는 일절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발목을 잡을 때도 많았다.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을 때는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으나 그 계약은 오히려 내게 독이 되었다.

정령왕과의 계약으로 인해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으며 전투가 일어날 때면 매번 다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며 말리기 일쑤였다.

하여 나는 프락시온 왕국의 정복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 그녀를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의 숲에 봉인해 두고 …중략… ]

초입부는 시시콜콜한 그의 성장 과정이 적혀 있었고, 중반부부터 종종 비비안이 언급되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하나같이 비비안을 힐난하는 내용뿐인지라 화를 참지 못한 넵튠이 신경질적으로 책을 휙휙 넘겨대었다.

그렇게 넘기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장에 도달했고, 회고록의 마지막 장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쓰여 있었다.

[나는 물의 정령왕과의 계약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넵튠이 신경질적으로 책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빌어먹을 인간 놈이. 감히!”

넵튠은 한시라도 빨리 비비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후 그녀의 계약을 파기하고, 듀락 후작가에 지독한 저주를 내리리라!

황급히 정령의 호수에 도착한 넵튠에게 비비안이 다가와 대뜸 사과의 말을 건네었다.

“미안해. 넵튠. 넌 날 위해서 한 말인데 내가 너무 무심하게 말했어.”

울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상냥히 말하는 비비안을 넵튠은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래도 그에 대해서 너무 나쁜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사람이 아니었다면 중간계가 이토록 아름다운지도 모른 채 평생 정령계에 틀어박혀 감정 없이 살아가다 다른 왕들처럼 신계로 올라갔을 테니까. 나에게는 무척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야.”

이곳에 올 때만 해도 비비안에게 진실을 이야기해 주고 듀락 후작가에 큰 벌을 내리리라 결심했던 넵튠은 말문이 턱- 하고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람 덕분에 널 이렇게 만날 수 있기도 했잖니? 세상에 이런 일은 처음일 거야. 초대 정령왕과 후대 정령왕이 한자리에 있다니.”

넵튠은 순간 두려워졌다.

즐거워하는 비비안을 다시 눈물짓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말하지 않을수도 없다고 생각한 넵튠이 용기를 내어 말문을 텄다.

“저…… 비비안.”

“왜 그래?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무척이나 행복해하는 얼굴로 그녀의 계약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비비안과 눈동자를 마주하자 간신히 솟아났던 용기가 다시 자취를 감추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넵튠이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겁쟁이였다.

* * *

“…….”

넵튠의 이야기가 끝나자 비비안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거짓말이라며 그의 말을 부정하지도.

그것이 사실이냐고 되묻지도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듯 멍하니 넵튠의 얼굴을 응시하기만 했다.

넵튠은 그런 비비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고개만 푹 숙여 보였다.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정적을 깬 것은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린이었다. 그녀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씩씩대며 말했다.

“오라버니한테 말씀드려서 꼭 혼내주라고 말할 거에요.”

아이린의 말에 비비안의 공허한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아이린이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그랬는데요. 맞았으면 열 배로 갚아 주라고 했어요. 보통 때린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맞은 사람만 기억하니까. 때린 기억을 떠올릴 때까지 죽도록 때려줘야 한대요.”

아이린이 비비안을 향해 내뻗은 손을 꽉 쥐어 보이며 허공에 붕붕- 주먹질을 했다.

“이렇게. 이렇게요.”

그 모습이 귀여웠는지.

아니면 어처구니없었는지.

공허하던 비비안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비비안이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는 아이린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마음은 정말 고마워요.”

그녀가 애써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이지만 무척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전 괜찮아요.”

비비안의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지 않아 보여요. 너무 힘들어서 다 포기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러지 말아요.”

아이린의 말에 풀썩- 무릎을 꿇은 비비안이 양손에 쥔 아이린의 손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 전 그저 짐이었나 봐요. 그와 함께한 시간이 무척 행복했는데. 그는 괴로웠나 봐요.”

비비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린이 그런 비비안의 얼굴을 품에 안으며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울지 말아요. 비비안이 왜 울어요. 나쁜 건 그 사람인데.”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아이린에게 사과하는 것인지.

혹은 그녀의 계약자에게 사과하는 것인지 모를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비비안이 아이린을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 * *

“인간. 네 녀석이 얼마나 버틸지 궁금하구나!”

갈라호른이 발타자르를 향해 마법을 퍼부었다.

발타자르가 날아드는 마법들을 쳐내기가 무섭게 발키리들이 일격을 가해왔고, 발타자르는 그것들을 쳐내며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촤아악-

수면 위로 긴 선을 그으며 착지한 발타자르가 힐끔 버드나무를 바라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난리 났군.’

진즉에 아이린과 계약했어야 할 비비안이 아이린을 끌어안은 채 몸을 옅게 떨고 있었다.

‘계약이 진행되었으면 일이 좀 더 쉽게 풀렸겠지만.’

발타자르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격렬한 전투로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더 이상 오러하트에서 마나를 뽑아내었다간 몇 달간 요양해야 할 판이었다.

물론 상대 쪽도 그리 무사하지만은 않았다.

일백에 달하던 발키리들도 이제는 스물 남짓밖에 남지 않았고 갈라호른도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몹시 지쳐 있었다.

‘무리를 하는 수밖에.’

결정을 내린 발타자르가 검을 휘둘러 발키리 둘의 목을 따내곤 허공을 박차 뒤로 물러났다.

촤아아악─

순식간에 아이린이 있는 버드나무 위로 착지한 발타자르가 자세를 잡고 비명을 지르는 오러하트를 한계까지 쥐어짜 내며 마나를 끌어올렸다.

기왕 무리하기로 결심한 것.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으리라.

그렇게 결심한 발타자르가 땅을 박차고 튀어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언제까지고 아이린을 끌어안고 있을 것만 같았던 비비안이 아이린을 놓아주고는 손을 뻗어 발타자르의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하나만.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당장 갈라호른과 발키리들을 향해 나아가야 했지만, 옷깃을 잡은 비비안의 표정이 너무나도 애달파 보여 발타자르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대체 제가 뭐라고 그렇게 다쳐 가면서까지…….”

비비안의 말에 발타자르가 묻고 싶다는 것이 고작 그거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말했잖나. 그대가 꼭 필요하다고.”

“전 싸움에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 없어요.”

“알고 있네.”

“오히려 당신에게 짐이 될지도 몰라요.”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제가 왜 필요한 건가요? 아무런 쓸모도 없는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전투를 벌이는 사이 비비안의 자존감이 무척이나 떨어져 있었다.

발타자르는 날아드는 공격을 쳐내곤 한숨을 내쉬며 가볍게 떨리는 왼팔을 억지로 움직여 비비안의 멱살을 잡고는 그대로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했더니. 비비안. 당신은 그 모습 그대로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네.”

언제 어디서고 아이린의 옆에서 그녀를 지켜주는 것.

발타자르가 그녀에게 기대하는 몫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냥 옆에만 있게. 그걸로도 충분하니.”

애초에 그녀의 성정을 알고 있는 발타자르는 그녀에게 전투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그녀를 원하는 이유는 혹시 모를 상황에서 아이린을 보호해 줄 대비책으로 그녀를 원하는 것이었다.

“설마 이것조차 못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발타자르가 도발하듯 말하자 비비안이 그를 빤히 응시했다.

그런 비비안의 멱살을 놓아주며 발타자르가 재차 갈라호른과 발키리들을 향해 뛰쳐나가려는데 이번에는 비비안이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신. 나와 계약해요.”

발타자르의 멱살을 잡아챈 그녀는 무언가 결심이 선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썩 달갑지 않은 제안을 내뱉었다.

“미안하지만 나보다는 내 동생과 계약을 하는 것이…….”

“싫어요. 지금 정했어요. 제 계약자는 오직 당신뿐이에요.”

뜬금없는 그녀의 제안에 발타자르가 거절하려 했지만, 비비안이 그녀답지 않은 단호한 말투와 함께 발타자르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발타자르의 상체가 비비안을 향해 기울어졌다.

이어서 비비안이 발끝을 들어 올리고, 순간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판단하지 못한 발타자르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져갔다.

쪽-

이윽고,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더니 비비안의 입술이 발타자르의 입술과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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