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54화
“인간 따위가 감히!”
비비안을 포위하고 있던 천사들이 일제히 발타자르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채 날아드는 천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파아앙─
대기를 찢는 파공음과 함께 가장 앞서 달려들던 천사 하나의 미간에 화살이 관통했다.
곧이어 화살들이 연달아 천사들을 향해 날아들며 그들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이에 천사들이 급히 정지하며, 날아드는 화살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트리스탄이 그런 천사들을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디가? 졸개는 졸개끼리 붙어야지?”
그녀의 도발에 수석 천사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비천한 인간 놈들이……!”
천사들이 방향을 선회하여 트리스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트리스탄은 휘하의 기수들을 이끌고 아이린과 비비안에게서 멀어지며, 그들을 정령의 호수 바깥으로 유인했다.
갈라호른이 이끌고 온 천사들이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정령의 호수를 벗어나자 발타자르가 비비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을 시작하게.”
말과 동시에 호수 아래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내 호수 바닥에 고꾸라졌던 갈라호른이 솟구쳐 올랐다.
갈라호른은 물에 흠뻑 젖은 3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노기 어린 음성으로 소리쳤다.
“인간이여! 신의 위엄에 도전한 죄. 죽음으로 사죄하라!”
날개 앞에 황금빛 구체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총 6개의 구체에서 금빛 섬광이 솟구치며 일제히 발타자르를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앙─
발타자르가 재빠르게 자리에서 뛰어오르며 쏘아지는 금빛 섬광을 피해내자 방금 전까지 발타자르가 서 있던 얼어붙은 호수의 표면이 유리 깨지듯 박살 나며 호수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여파로 얼어붙었던 호수의 수면이 일제히 갈라지기 시작하자 가웨인이 재빠르게 아이린을 안아 들며 남은 일행들과 함께 버드나무 위로 몸을 피했다.
파앙- 파앙-
갈라호른의 일격을 피해낸 발타자르는 허공을 박차며, 마치 땅 위를 질주하듯 갈라호른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갈라호른의 날개에서 쏟아지는 금빛 섬광이 재차 발타자르를 향해 쏘아지고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졌다.
콰아아앙-
오러블레이드와 금빛 섬광이 맞부딪치며 환한 빛무리와 충격파가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상위 서열의 마왕에는 조금 못 미치고. 중위 서열. 그중에서도 최상위권인가.’
갈라호른의 일격을 맞받아친 발타자르는 정령의 호수 인근의 지면으로 착지하며 갈라호른의 전력을 파악했다.
‘마법사. 그것도 아크메이지급의 마법사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군.’
전투 방식이나, 전력으로 판단하건대 아크메이지를 상대하는 방식으로 상대한다면 될듯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지근거리에서 맞붙어 마법을 구현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몰아쳐야만 했다.
하지만 발타자르의 생각을 간파라도 한 듯이 갈라호른이 허공으로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로 수십 개의 마법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도자 갈라호른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오라. 신계의 징벌자들이여.”
마법진이 빛나며 그 안에서 수십 마리의 백조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내 하얀 빛무리와 함께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순백의 판금 갑옷으로 무장하고, 푸른 화염을 휘감은 창을 손에 쥔 여기사의 모습으로 변한 백조들이 갈라호른을 호위하듯 그의 주위에 포진하며 발타자르를 향해 일제히 창날을 겨누었다.
무수히 많던 용사 중에서도 단 한 명의 용사만이 소환할 수 있었던 발키리Valkyrie였다.
“인간이여. 지금이라도 네 잘못을 뉘우치고 속죄한다면, 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마.”
갈라호른의 말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듯싶었다.
발키리들은 개개인이 무위가 고위기사에 필적하며, 그들의 합격진은 어지간한 하위 서열의 마왕조차 쓰러트릴 정도로 강력했다.
거기에 더해 그들의 호위를 받는 갈라호른까지 생각한다면 저들을 상대로 승리할 확률은 무척 낮았다.
‘조력은…… 무리겠군.’
트리스탄과 그녀의 기수들은 갈라호른이 이끌고 온 천사 무리를 상대하고 있었고, 가웨인은 비비안과 아이린을 호위하고 있었다.
넵튠이 나서준다면 숨통이 조금 트이겠으나, 그의 기색으로 보건대 이 싸움에 개입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단. 용서의 대가는 네놈의 죽음뿐이다!”
갈라호른의 사형 선고가 떨어지며, 발키리들이 일제히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쒜에에엑─
순식간에 발타자르를 포위한 발키리들이 대기를 찢어 갈기며, 사방에서 창을 찔러왔다.
발타자르는 오른발을 축으로 삼아 몸을 회전시키며 양손으로 맞잡은 검을 휘둘렀다.
발타자르의 검이 폭풍처럼 휘둘러지며 찔러오는 발키리들의 창들을 모조리 튕겨내었다.
순간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만 흘러갔다.
튕겨 나온 창으로 인해 발키리들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고, 한 바퀴 회전했던 발타자르의 몸이 재차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며 휘청이는 발키리들의 허리를 일격에 갈라 버렸다.
콰아아앙─
십 수명의 발키리들이 순식간에 금빛 가루로 변하며 사라지기 시작하고, 갈라호른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초고위 마법.
꽈르르릉─
‘하늘의 단죄’가 뇌성과 함께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제길!”
발타자르가 마법이 떨어지는 방향을 보곤 이를 악물었다.
‘영악한 놈.’
마법은 계약을 진행 중이던 비비안과 아이린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에 발타자르가 황급히 모든 힘을 쥐어 짜내며 땅을 박차고 튀어나가며 갈라호른의 일격을 간발의 차이로 막아내었다.
꽈아아앙─
오러블레이드와 ‘하늘의 단죄’가 맞부딪치며, 발타자르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촤아악-
어찌어찌 막아내기는 하였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위 마법을 정면에서 막아낸 여파로 왼쪽 어깨가 망가져 버렸고 오러하트에도 큰 무리가 갔다.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해낸 발타자르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었다.
“인간이여. 지금이라도 순순히 죄를 시인하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네 녀석의 일행들은 무사히 보내주겠노라.”
갈라호른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피를 토해내는 발타자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퉷-”
이에 발타자르는 입안에 남아 있던 핏물을 뱉어내곤 갈라호른을 올려다보며 답했다.
“말했지 않나? 경고는 딱 한 번뿐이라고.”
오러하트가 공명하며 재차 발타자르의 검 위로 오러블레이드가 솟구쳤다.
“미련한 녀석이군.”
갈라호른이 가볍게 손을 휘젓자 남아있던 발키리들이 재차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들었다.
챙- 챙- 챙-
순식간에 수십 번의 공방이 오고 갔다.
발타자르는 오른팔밖에 쓸 수 없는 상황임에도 능숙한 검놀림으로 발키리들의 공세를 막아내었다.
간간이 갈라호른이 견제를 위한 마법을 쏘아 보내고 있었지만 대부분 하위 마법인지라 큰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위 서열의 마왕을 쓰러뜨릴 수 있는 만큼 발키리들은 신계에서도 고위 전력으로 분류되는데 그런 이들을 소환하는 것에 큰 힘을 소모한 데다, ‘하늘의 단죄’라는 초고위 마법까지 연달아 펼친 것 때문에 더 이상의 고위 마법은 시전이 불가했기 때문이었다.
‘녀석도 더 이상의 고위 마법을 펼칠 힘이 없나 보군.’
하긴. 중간계에 내려오며 힘에 제약을 받았을 것이 분명한데 아크메이지 조차 연달아 펼치면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하는 초고위 마법을 연달아 펼쳐 보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
‘왼쪽 팔만 멀쩡했더라도 일격에 베어버리는 것인데…….’
발타자르가 왼팔을 움직여 보았다.
주먹이 쥐어지긴 하지만 격한 전투에서 힘을 쓰기에는 한없이 부족했다. 이에 발타자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갈라호른이 더 이상의 큰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고는 해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기든 지든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 요양을 해야 할 듯싶었다.
* * *
아이린과 계약을 진행하던 비비안은 갈라호른의 마법이 날아들자, 곧장 계약을 중단하며 갈라호른의 일격을 막아내려 하였다.
계약을 도중에 중단하는 바람에 힘을 끌어올리는데 잠깐의 공백이 생겼고, 그 찰나의 순간에 갈라호른의 마법이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막아야 해!’
가웨인이 서둘러 비비안과 아이린의 앞으로 나섰고, 넵튠은 오직 비비안의 주위로만 물의 방벽을 펼쳤다.
비비안을 제외한 이들은 전혀 고려치 않은 그 행동에 비비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넵튠을 불렀다.
“넵튠!”
“비비안. 미안하지만 인간들이 어찌 되든 상관없습니다.”
가웨인만으로는 갈라호른의 마법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 직감하는 순간.
간발의 차이로 발타자르가 도착했고, 갈라호른의 일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발타자르는 갈라호른과 발키리들의 협공에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비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넵튠. 정말 이럴 거야?”
“네. 이럴 겁니다. 비비안. 전 당신이 더 이상 인간들에게 속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말했잖아. 난 속은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로 기다리는 것이라고요? 아뇨. 제가 볼 때 당신은 그 간악한 인간에게 속은 것입니다. 당신은 그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요.”
더 이상 참지 못한 비비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넵튠!”
그동안 자신이 그만 계약자를 놓아주라 누차 얘기해도 듣지 않던 그녀가 웬 인간 놈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 오랜 세월 고집했던 계약을 파기하고,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으려는 것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던 넵튠이 언성을 높이며 소리쳤다.
“당신이 미련하게 오랜 세월 당신의 계약자를 기다리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제가 그에 대해 알아보지 않은 줄 아십니까! 당신이 위험할까 봐 두고 갔다는 그가 전쟁 이후 어떻게 살았는지! 그가 자신의 회고록에 당신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듣는다면 당신도 그에게 속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넵튠의 말에 비비안이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넵튠은 순간 아차 싶었다. 그동안 그녀의 마음이 다칠까 싶어 줄곧 숨겨왔었는데.
멍청한 놈!
넵튠은 스스로를 욕하며 조심스레 비비안을 불렀다.
“비비안. 제가 헛소리를…….”
넵튠이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낮게 가라앉은 비비안의 목소리가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비비안. 그러니까…….”
마치 영혼을 잃은 것만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넵튠을 바라보며 묻는 비비안에게 넵튠이 재차 말이 헛나왔다 변명하려 했지만 성난 비비안의 고성이 이어졌다.
“무슨 말이냐고 묻잖아!”
그 모습에 넵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넵튠이 그동안 숨겨왔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당신의 계약자는. 당신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돌아오지 못할 상황에 처했던 것도 아니었고요.”
넵튠이 눈을 질끈 감으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