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53화
“구해주러 왔어요.”
비비안은 자신을 구해주겠다 말하는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자그마한 인간 아이는 어째서 자신을 구해주겠다고 하는 것일까?
이 아이가 보기에 자신은 이곳에 갇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자신은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이곳에 머물며 그를 기다리는 것인데.
“우리 꼬마 숙녀 분은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비비안이 소녀, 아이린에게 물었다.
“아이린. 아이린 발타자르예요.”
“그래요, 아이린. 아이린이 보기에 나는 이곳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나요?”
비비안의 물음에 아이린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발타자르의 말대로라면 분명 그녀는 이곳에 갇혀 있는 것이 맞지만, 그녀의 눈에 비치는 비비안은 전혀 이곳에 갇혀 있는 정령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치만…….”
아이린이 대답을 망설였다.
비비안이 천천히 아이린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발길이 닿을 때마다 룬의 마법으로 얼어붙었던 호수의 표면이 다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이에 트리스탄이 비비안의 접근을 제지하려 했지만 가웨인이 고개를 흔들며 그녀를 제지했다.
비비안에게 적의가 없어 보였고 발타자르가 애지중지하는 아이린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아이린의 앞에 도달한 비비안이 무릎을 굽히곤 아이린과 시선을 마주하며 생긋-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좋으니 말해줘요.”
무척이나 상냥한 비비안의 목소리에 망설였던 말을 내뱉었다.
“눈동자…….”
“눈동자요?”
비비안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눈동자. 당신의 눈동자는 너무 슬퍼 보여요.”
아이린의 말에 비비안은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당신은 이곳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아큐네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어요. 하지만 눈동자가 너무 슬퍼 보여요.”
아이린이 조심스레 손을 뻗어 비비안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길에 비비안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아이린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오라버니가 그랬어요.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고.”
그녀의 상냥한 미소에 가려져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아이린의 눈동자에 비치는 비비안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서글픈 빛을 띠고 있었다.
“제가 볼 때 당신은 겉으로는 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슬퍼하고 있는 것 같아요.”
비비안은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뺨을 통해 느껴지는 온기.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사람의 온기였다.
“제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저는 당신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아이린의 남은 한 손이 비비안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두 손이 비비안의 뺨을 감싸자 비비안이 감았던 눈을 뜨고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만약 제 생각이 맞다면. 도와주고 싶어요. 당신을.”
아이린의 말에 비비안은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비비안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을 내뱉었다.
“마음은 정말 고마워요. 아이린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아니, 맞아요. 사실 알고 있어요. 그가 이곳에 오지 못하리란 것은. 인간의 몸으로는 이 긴 세월을 견뎌낼 수 없으니까요.”
비비안의 말은 아이린의 말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면 앞으로도 돌아오지 않겠죠. 이렇게 마냥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죠.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곳에서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그의 죽음이. 그가 날 까맣게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현실이 되어 제 마음을 할퀴어 댈지도 모르니까요.”
아이린이 비비안의 뺨을 감싸던 손을 떼어내곤 허리춤에 손을 얹고서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겁쟁이세요.”
“맞아요. 전 겁쟁이예요. 그래서 기다림을 핑계로, 추억을 위안 삼아 이곳에 숨어 있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저랑 함께 가요.”
아이린이 비비안을 향해 손을 내뻗으며 말했다.
비비안은 내밀 어진 아이린의 자그마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손을 잡는다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이린의 말대로 그녀는 겁쟁이였다.
“미안해요.”
비비안이 눈을 질끈 감으며 처음이자 마지막일지 모를 도움의 손길을 외면했다.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염없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텐가.”
사내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넵튠을 내던지듯 툭- 내려놓고는 눈을 감고 있는 비비안을 응시했다.
비비안이 눈을 뜨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계약자와 닮은 모습을 한 사내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소녀와 닮은 외견인지라 비비안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이에 아이린이 웃으며 ‘우리 오라버니세요.’하고 답했다.
“함께 가세. 우리와 함께 이곳을 벗어나 그대의 계약자를 찾아보세. 아니, 인간의 몸으로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내진 못했을 테니 그의 후손이라도 찾아보세. 그리고 물어보게. 그가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는지. 혹은 자네를 까맣게 잊고 지냈는지.”
사내, 발타자르가 손을 내밀자 비비안은 그녀를 향해 뻗어진 이 두 남매의 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찌 남매가 하나같이 이렇게나 상냥할까 하고.
“만약 자네의 계약자가 자네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다면 그를 놓아주면 될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면. 그가 자네와의 약속을 잊었다면…….”
“만약 그렇다면요?”
비비안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씩- 웃으며 답했다.
“내가 대신 혼쭐을 내주지.”
그 말에 비비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씀은 고맙지만, 전 계약에 묶여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렇다면 계약을 파기하면 될 문제 아닌가.”
비비안은 그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본래 저는 새로운 물의 정령왕이 탄생한 순간 신계에 올랐어야 했어요. 그것을 계약을 핑계로 미루고 있는 것뿐이죠. 당신 말대로 계약을 파기하는 순간 저는 곧장 신계로 강제 송환될 거예요.”
“그게 걱정이라면 새로 계약을 맺으면 되는 것 아닌가. 마침 여기 좋은 계약자도 있고.”
발타자르가 아이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비비안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자면 계약을 파기하고 진행을 해야 하는데 신계에서 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어요.”
“내가 감당해 주겠네.”
“네?”
비비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발타자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비비안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계약을 파기하게. 그 직후 바로 계약을 진행하게나. 계약을 파기하며 벌어질 일은 걱정하지 말고 내게 맡기고.”
그녀가 오랜 세월 기다려온 계약자를 닮은 모습으로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비비안이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답했다.
“당신이 꼭 필요하거든.”
* * *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었던 계약을 파기할 준비를 하며 비비안은 힐끔-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계약자와 닮았구나 싶었다.
‘반…….’
비비안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계약자를 불러 보았다.
야속한 사람.
돌아오겠다는.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선 돌아오지 않았던 사람.
‘이젠 그를 놓아줄 때도 되었지.’
그녀의 욕심으로 오랜 세월 기다림을, 추억을 핑계 삼아 현실로부터 도망쳤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었다.
‘신계인가…….’
발타자르에게 뒤를 맡기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사실 큰 기대는 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신계의 부름에 불응했던 그녀를 신계로 송환하기 위해 마중 나올 이는 분명 상위계의 천사일 것이었다.
인간의 몸으로 천사를 상대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계약을 파기하려는 것은 당신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는 발타자르의 모습이 순간 그녀의 계약자와 겹쳐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서 이제는 계약자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슬프지만.
정말 가슴 아프지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였다.
파아앗-
그녀의 심장에서 백색의 실이 하늘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응시하며 비비안이 허공 위로 물의 낫을 소환했다.
손을 뻗어, 낫을 손에 쥔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낫을 휘둘러 실을 끊어버렸다.
뚝-
백색의 실이 끊어지기가 무섭게 눈이 부실 듯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정령의 호수를 뒤덮더니 빠르게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빛의 기둥이 솟아난 하늘에 거대한 문이 생겨나고, 원형의 모양을 한 문이 회전하더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이 솟구치는 서광과 함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온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발타자르의 말과 함께 열린 문에서 새하얀 깃털이 하나둘씩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새하얀 날개가 인상적인 천사들이 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가장 후미에서 백색 가운을 걸친 세 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비비안이 그 사내를 바라보더니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인도자. 갈라호른.”
중간계에, 천사가 강림했다.
* * *
“오랜만일세. 비비안.”
대천사. 갈라호른이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의 주위로 천사들이 비비안을 포위하며 그녀를 향해 창날을 겨누었다. 마치 죄인을 대하는 듯한 그 모습에 때마침 정신을 차린 넵튠이 갈라호른을 향해 소리쳤다.
“갈라호른!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갈라호른이 그런 넵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심하게 인간 따위에게 당하다니. 수치도 모르는가?”
“지금 그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비비안이 죄인도 아닐진대 어찌 죄인처럼 대하십니까!”
넵튠의 말에 갈라호른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비비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비안은 오랜 시간 신의 부름에 불응하였네. 감히 신의 부름을 거역한 이가 죄인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갈라호른!”
“시끄럽네. 더 이상 내 일을 방해한다면 자네에게도 죄를 묻겠네.”
가만히 정령왕과 대천사의 언쟁을 듣고 있던 발타자르가 끼어들며 말했다.
“지랄하는군.”
발타자르가 그답지 않게 분노로 얼룩진 얼굴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에 갈라호른이 발타자르에게로 시선을 옮기더니 눈에 이채를 발했다.
“오래전 소멸 된 신의 잔향이 묻어 있는 인간이라. 특이한 인간이로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갈라호른에게 발타자르가 화를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네 녀석이 뭐든 상관없어. 딱 한 번만 경고한다. 꺼져라.”
이에 갈라호른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호통쳤다.
“인간이여!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라! 이 몸은 신을 보필하는 일곱의 대천사 중 하나. 인도자. 갈라호른이니라!”
그의 호통에 발타자르가 실소를 터뜨렸다.
발타자르에게 천사에 대한.
신에 대한 경외심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마왕과 용사들이 이 땅을 휘젓고 다닐 때도 모습 한번 보이지 않던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이제 와 경외심을 느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분노를 불태우면 불태웠지.
갈라호른의 호통과 동시에 발타자르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이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움직임을 보지 못했던 갈라호른이 눈앞에 나타난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당황해하는데 발타자르가 그대로 손을 뻗어 갈라호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불의의 일격에 갈라호른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고 미처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발타자르가 그의 멱살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호수를 향해 집어 던졌다.
콰아앙-
발타자르가 얼어붙은 수면 위로 착지하며, 호수에 내리꽂힌 갈라호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경외심은 지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