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51화
군을 이끌고 비프로스트 요새로 향하던 발타자르는 이동 도중 아이린과 가웨인, 그리고 트리스탄과 소수의 호위 인원만을 추슬러 따로 떨어져 나왔다.
목적지는 베른 요새와 파판 영지 사이에 있는 리뮤안.
정확히는 리뮤안에 있는 숲의 중심부에 숨겨진 정령의 호수였다.
강력한 결계로 둘러싸여 인근에 사는 주민들조차 존재 자체를 몰랐던 곳이지만 듀락 후작가의 유일한 생존자.
란슬롯 듀락이 혁명단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던 중 우연에 우연을 거듭하여 정령의 호수 인근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듀락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정령의 검.
아론다이트Arondight가 결계를 해주 하며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이후 란슬롯은 맹약에 의해 비비안과 계약을 맺게 되고 최초의 정령 검사가 되어 그 이름을 대륙에 떨치게 된다.
정령의 호수는 최초의 물의 정령왕 비비안이 그녀의 계약자와 맺은 맹약에 의해 수 세기 동안 봉인되어 있는 곳이었다.
발타자르가 이 정령의 호수로 향하는 이유는 아이린 때문이었다.
앞으로 벌어질 난세에 아무리 발타자르가 신경을 써서 아이린을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아이린과 떨어져야 할 상황이 종종 발생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발타자르의 정적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을 테고 이때 혹시 모를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발타자르는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아이린이 비비안과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비비안과 계약만 맺게 된다면 마스터급의 강자가 찾아와도 제 한 몸 지키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물론 발타자르에게는 아론다이트가 없기에 비비안과 계약을 맺는 과정이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테지만 나름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정령의 호수로 향하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발타자르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아이린이 고개만 치켜들어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왜 그러니?”
발타자르가 고개를 숙여 그런 아이린을 바라보자 아이린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발타자르와 여행을 떠나는 것이 무척이나 기쁜지 아이린은 허공에 발을 휘휘 저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싱겁기는.”
발타자르가 그런 아이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데 덕분에 아이린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불의 중급 정령 브리아가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에 브리아가 발타자르를 향해 항의하듯 노려보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마나를 실어 손가락으로 허공을 툭- 하고 튕겼다.
삐이이-
마나가 실린 바람이 브리아를 휩쓸고 브리아가 쓰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휘말려 날아갔다. 그러자 브리아가 재빠르게 날아가는 모자를 낚아채 머리에 꾹 눌러쓰곤 연신 삑삑- 거리며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브리아! 뭐 하는 거야!”
아이린이 그런 브리아를 혼내자 브리아가 울상이 되어서는 손가락으로 발타자르를 가리키며 항변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되려 변명을 한다며 더욱 크게 혼이 날 뿐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가웨인이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장군. 너무 괴롭히시는 것 아닙니까?”
“귀엽지 않나.”
“귀여워하시는 방식이 너무 거치신 것 같습니다만.”
가웨인이 브리아에게 짓궂은 장난을 친 발타자르를 타박하는데 브리아를 혼내던 아이린이 불쑥 물어왔다.
“그런데 오라버니. 저희 어디로 가는 거예요?”
“리뮤안이란다. 그곳에는 정령의 호수라는 곳이 있는데 물의 정령이 나쁜 사람에게 속아 갇혀 있지. 우린 그녀를 구해주기 위해 가는 길이란다.”
“정말요?”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럼. 정말이고말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물의 정령왕을 물의 정령이라 표현한 것만 제외하면 진실은 진실이었다.
금방 돌아오겠단 말만 남기고서 비비안을 오랜 세월 정령의 호수에 얽매어 두었으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녀의 계약자는 나쁜 사람이었다.
또한, 비비안이 아이린과 계약을 맺게 된다면 정령의 호수를 벗어날 수 있게 되니 그녀를 구해주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했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정령을 구해주는 것은 아이린 너밖에 할 수 없단다.”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저만요?”
“그렇단다. 정령의 호수는 강력한 결계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데 이 결계를 해주 하기 위해서는 불의 정령의 힘이 필요한데 우리 일행 중에서는 불의 정령과 계약한 것은 린, 너밖에 없으니 물의 정령을 구하기 위해서는 네 힘이 꼭 필요하단다. 할 수 있겠니?”
이것은 물론 발타자르가 지어낸 이야기였다.
오랜 세월이 흘러 약화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결계는 강력했고 불의 중급 정령 수준으로는 결계에 작은 균열조차 낼 수 없었다.
사실상 아이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아이린에게 책임감을 가지도록 하는 이유는 정령과의 계약에는 계약자 본인의 강력한 의지가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정령왕일 경우에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저만 믿으세요. 제가 꼭 물의 정령을 구해줄게요.”
아이린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그 모습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던 발타자르는 그녀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옆에서 가웨인이 의심 가득한 눈길로 바라보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 * *
정령의 호수.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결계에 둘러싸여 대륙에 존재하는 그 누구도 존재조차 모르는 이곳은 사시사철 짙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호수의 중심에는 무척이나 거대한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넝실넝실 춤을 추며 잔잔한 수면 위를 이리저리 헤엄쳤다.
그러한 버드나무를 중심으로 반투명한 물고기의 형상을 한 물의 하급 정령 아큐네들이 허공 위를 헤엄치고 다녔다.
푸른 빛을 은은하게 흩뿌리며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큐네들의 빛은 마치 반딧불이의 빛처럼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정령의 호수를 밝혀주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수면 위로는 물의 중급 정령 스프리아들이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작은 소녀들의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었고 수면 아래에는 물의 상급 정령 엘핀들이 여러 종류의 고래의 모습으로 헤엄치거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며 장난을 쳤다.
그들만의 작은 연회였다.
버드나무 가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에게 무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가 인상적인 사내가 물속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다가갔다.
“비비안. 여전히 만날 수 없는 이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사내의 물음에 여인.
최초의 물의 정령왕이었던 비비안이 생긋- 미소 지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 넵튠. 안 올 것처럼 말하더니 결국 와주었네?”
사내, 물의 정령왕 넵튠이 한숨을 내쉬었다.
“천 년입니다. 비비안. 당신이 이곳에 얽매이고 제가 정령왕이 된 지도 천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언제까지 오지도 않는 이를 기다리고 계실 겁니까?”
걱정 어린 그의 물음에 비비안이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시간 참 빨리 흘러. 그 어수룩하던 꼬마 정령이 이렇게 어엿한 정령왕이 되다니 말이야.”
그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엉뚱한 말을 꺼내는 비비안을 바라보던 넵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 꼬마 정령이던 적 없습니다. 존재를 인지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쭉 이 모습 그대로였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수룩하다니요. 정령왕들 중 가장 유능한 제가 어수룩했던 시절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까칠하기 그지없는 말투로 답하는 넵튠이었지만 비비안은 그런 그가 몹시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여전히 귀엽네, 넵튠은.”
“비비안!”
넵튠이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였다. 이에 그들의 주위를 맴돌던 정령들이 화들짝 놀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얘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
비비안이 넵튠을 흘겨보며 말하자, 넵튠이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비비안.”
비비안이 그런 넵튠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넵튠. 기다림이란. 달콤한 꿈과도 같아. 언제 돌아올지 모르기에 불안하고, 초조하지. 혹시 그가 날 잊은 것은 아닐까? 혹시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서 그를 기다려야 할까.”
넵튠의 뺨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넵튠의 뺨을 타고 올라가더니 이내 그의 머리칼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한없이 기다리기만 하다 보면 온갖 나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지.”
말하는 비비안의 모습은 무척이나 처량해 보여 보다 못한 넵튠이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다면 비비안.”
넵튠이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비비안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간절하고 설레는 것이 기다림이란다.”
비비안이 넵튠의 머리를 꼬던 손을 떼어내곤 버드나무 가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수면 위로 작은 파문이 일며 그녀를 중심으로 동그란 원들이 하나둘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를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반갑다고 인사할까? 너무 늦게 왔다고 혼을 낼까. 그것도 아니면 그를 안아주며 고생했다고, 와주어서 너무 기쁘다고 말해줄까.”
비비안은 수면 위를 산책하듯 걸으며 양손을 맞잡았다.
“닿을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간절한 거야. 중간에 포기하기에는 그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했으니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꿈을 꾸는 소녀의 모습처럼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활기찬 목소리로 말하는 비비안은 넵튠이 보기에 애써 괜찮은 척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와의 추억이 있기에 힘들어도 난 그를 기다릴 수 있는 거란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넵튠은 더 이상 그녀의 기약 없는 기다림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하늘이 넵튠의 두 눈 가득 담겼다.
마치 비비안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밤하늘의 모습에 넵튠의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만 오면 절로 한숨이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응?”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이변이 찾아 왔다.
어둠만이 가득하던 밤하늘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지?”
넵튠이 일그러지는 밤하늘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쿵- 쿵-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균열은 더욱더 그 크기를 키워가고 수면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결계를 뚫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감히 어떤 자가!”
넵튠이 분노를 담아 일갈하는 것과 동시에 밤하늘이 갈라지고, 어둠을 밝히는 밝은 빛이 정령의 호수를 비추기 시작했다.
천 년의 시간 동안 어둠에 잠겨 있던 정령의 호수에 빛이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