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8화
“꺄아아악!”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하녀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들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황급히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자 보이는 것은 침상 위에서 심장에 칼이 꽂힌 채로 숨을 거둔 사내의 시체였다.
진페오의 수행원 중 한 명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런 저항의 흔적도 없는 것으로 보아 잠이 든 사이에 암살자가 다녀간 것 같았다.
제도에서 손님들이 왔기에 평소보다 한층 더 삼엄한 경비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이거 곤란한데…….”
진페오가 시신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는 자인가?”
방안을 둘러보던 발타자르가 묻자 진페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무대신 채드윅 골드하먼의 수하야.”
“채드윅이라면 선제후 채드윅? 그자는 슈미트라 교단의 주교 아닌가.”
비록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니 채드윅이 정식으로 항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 일로 발타자르를 압박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발타자르가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는 힐난 어린 눈길로 바라보자 진페오가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네가 부담을 느낄까 봐 그랬어. 미안해.”
진페오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어차피 귀족들의 정체에 대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기에 진페오를 지그시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물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지금 다 말하게.”
“정말 이게 전부야. 정체를 숨기고 날 따라온 귀족 중 일부가 대신들과 선제후들의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숨기는 건 없어. 이걸 숨긴 것도 앞서 말했다시피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서였고. 내가 뭐하러 우리 파벌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네게 이걸 숨겼겠어.”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는 진페오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재차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심장에 검이 꽂힌 시체만 제외한다면 여느 객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저항의 흔적이나 침입의 흔적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실력이 좋은 녀석인지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았군.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잠입할 정도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 당장은 크게 손 쓸 수가 없으니 일단 경비를 강화하고 주변인들을 탐문 수사 하는 것이 좋겠네.”
“그래. 그렇게 하자.”
고개를 끄덕이는 진페오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깜빡했다는 듯이 물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토벌대의 진군 시기가 언제랬지?”
“뭐야. 어제 말했잖아. 한 달 뒤라고 말이야. 토벌대와 연계해서 정확히 시일을 맞춰 진군해야 하니까 그 전에 베른 요새로 향해야겠지. 그러니까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라고. 그보다 시간도 넉넉한데 우리 사냥이나 갈까? 예전에는 종종 애들끼리 모여서 사냥 다니곤 했잖아. 아! 그립다.”
아카데미 시절을 떠올리며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진페오를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짧게 답했다.
“사냥이라…… 좋지.”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범인에 대한 단서를 찾기는커녕 하루 간격으로 살인 사건이 벌어졌고, 그 대상은 하나같이 제도의 대신들과 선제후들이 진페오의 수행원으로 위장시켜 보낸 그들의 수족들이었다.
“미치겠네.”
진페오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파의 사람들은 멀쩡한 것에 반해 대신들이 보낸 이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면치 못했다. 이는 자칫 황제파의 소행이라고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야!”
이 상황이 답답했던지 진페오가 소리를 버럭 지르며 살인 현장을 돌아다녔다.
연쇄살인이 5일째 되던 날.
결국, 참다못한 진페오가 발타자르에게 허락을 받아 마법사들과 함께 온두라스 내성 곳곳에 알람 마법과 경계 마법을 설치해 두었지만, 범인은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살인을 계속해 나갔다.
여전히 흔적은 남기지 않았고 그렇게 지금까지 살해당한 귀족들은 총 일곱 명이었다.
진페오를 따라온 귀족들이 서른 명이니 이제 스물세 명이 남았다. 거기서 황제파의 귀족을 제외한다면 대신들과 선제후들의 사람들은 열다섯 남짓.
하루에 한 명씩 살해당한다는 것을 가정하면 3군이 베른 요새로 진군하는 시기와 일치했다.
“알.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어찌하려고?”
“오늘 밤은 귀족들을 한곳에 모아둬야겠어. 그리고 당분간은 제도와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통제하는 게 좋겠어.”
“반발이 심할 텐데?”
진페오가 강수를 두기로 결정했다.
이에 발타자르가 이견을 제시하자 진페오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들도 죽기 싫다면 순순히 따라주겠지.”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지 그의 눈동자엔 살기가 흘러넘쳤다.
“분명 대신들이나 선제후 중에 수작질을 부리는 놈이 있는 것 같은데 꼬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진페오는 범인의 배후에 대신 혹은 선제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 넌 괜찮아? 제도에서 연일 항의 문서가 날아온다던데.”
얼굴에서 살기를 지운 진페오가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묻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쩔 수 있나. 이곳의 주인은 나고. 저들은 손님인데.”
“하아…… 놈들이 널 견제하려고 이러는 건지도 모르겠네. 미안하다. 괜히 네게 피해를 준 것 같아.”
“괜찮네.”
발타자르가 한숨을 내쉬는 진페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넌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까. 이럴 땐 화도 좀 내고 해야 하는 건데.”
“원한다면 그래 줄 수도 있네만.”
발타자르의 서늘한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자 진페오가 흠칫- 거리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꼭 그렇게 해달라는 건 아니고. 자자, 일 얘긴 이쯤하고 우리 린이나 보러 가자. 계속 봐야지 봐야지 하면서 일 때문에 못 봤잖아.”
진페오가 너스레를 떨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지금쯤이면 수업도 끝났을 테니.”
* * *
“안녕.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
진페오가 쪼그려 앉아 아이린과 시선을 맞추며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이린이 인사하곤 진페오가 어색했던지 힐끔힐끔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며 그의 등 뒤로 숨었다.
발타자르가 그런 아이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품에 안아 들었다.
“이런. 우리 숙녀분께선 내가 부담스러운 것 같은데? 하긴. 내가 워낙 잘생겼으니 부담스러워할 만도 하지.”
진페오가 너스레를 떨며 다리를 펴고 일어났다.
“알. 네가 애지중지할 만해. 이대로만 잘 자라준다면 나중엔 사내들이 린의 얼굴을 보려고 줄을 서겠어.”
아이린은 진페오의 칭찬에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며 그대로 발타자르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손님 앞에서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발타자르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 오냐오냐 키우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지만 진페오는 발타자르의 친우이기도 했고, 나중에 아이린이 크고 나면 이런 어리광을 보기가 힘들 테니 지금이라도 마음껏 봐두고 싶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었다.
“부럽네. 나도 이런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는데.”
발타자르 남매의 모습이 보기가 좋았던지 진페오가 부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자넨 위아래로 형제들뿐이었지. 아마?”
“그래. 다들 귀여운 구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항상 이렇게 뚱한 표정만 지으면서 돌아다니는데. 어휴. 오죽하면 어머니께서 늦둥이라도 좋으니 딸 하나 낳고 싶으시다고 노래를 부르실 정도라니까.”
진페오가 한탄하듯 말하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후작 부인께선 여전하신가 보군.”
“생각과 마음이 젊어야 몸도 젊어진다는 지론이시니까. 오십을 넘으신 지금도 소녀 같으셔. 아참.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너희 남매에게 줄 선물을 주셨는데.”
아이린을 만나러 가는 길에 진페오가 숙소에 들러 무언가가 담긴 가죽 주머니를 들고 가기에 뭔가 싶었더니 슈텔리앙 후작 부인의 선물이었던 듯했다.
“자. 이건 우리 숙녀님 꺼.”
진페오가 가죽 주머니에서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목걸이를 꺼내어 아이린에게 내밀었다.
아직 아이라도 여자아이는 여자아이인지 아이린이 눈을 빛내며 진페오가 내미는 루비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어서 받아. 나 팔아프다.”
진페오의 너스레에 아이린이 황급히 두 손을 뻗어 루비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어?”
“네! 무척 예뻐요.”
아이린이 방실방실 웃으며 답하자 진페오가 흐뭇한 얼굴로 아이린을 바라보더니 이내 발타자르의 선물도 꺼내 보였다.
“그리고 이건, 네 것.”
이어서 진페오가 꺼낸 발타자르의 선물은 책이었다.
“이게 뭔가?”
발타자르가 묻자 진페오가 능글맞은 표정과 함께 발타자르의 손에 책을 쥐여주었다.
“펴 봐.”
진페오의 말에 발타자르가 책을 펼쳐 보이자 보이는 것은 아리따운 영애들의 사진과 그녀들의 인적사항이었다.
“보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영애가 있으면 말해. 어머니께서 엄선하신 제도 영애들이니까.”
진페오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발타자르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선물도 다 줬으니. 우리 차나 한잔할까?”
더 놀렸다간 발타자르가 화를 낼 기세인지라 진페오가 화제를 돌리며 정원에 준비된 테이블로 향했다.
발타자르가 그런 진페오의 뒤 모습을 노려보는데 발타자르의 품에 안겨있던 아이린이 흥미 어린 눈동자로 책을 바라보더니 한 영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전 이분이 마음에 들어요!”
동시에 발타자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 * *
밤이 되자 연회가 열렸다.
진페오의 말대로 무작정 사람들을 모아두었다간 여러 말이 나올 것이 분명하기에 취한 조치였다.
연회장 안에는 진페오의 수행원들로 북적였다.
물의 마탑의 마법사들과 귀족들이 연회를 즐겼고,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딸려온 병사들과 기사들은 연회장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다.
발타자르는 진페오와 잠시 어울려주다 바람을 쐬러 가겠다는 핑계로 연회장을 벗어나 테라스로 향했다.
“아저씨.”
테라스에서 연화장을 바라보던 발타자르에게 신시아가 다가왔다.
“준비는 다 끝났어요.”
“수고했네.”
“그런데 정말 하실 거에요?”
“내키지 않는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신시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위험부담이 크잖아요.”
“그렇다고 내 사람들이 고생하여 쟁취한 에버나스 지방을 엄한 녀석들에게 나누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나.”
며칠 전 발타자르의 숙소에 잠입한 묘인족이 건넸던 서찰에 적혀있던 것. 그것은 황제가 발타자르를 공작으로 승작시키며 내건 조건들이었다.
황제는 발타자르의 승작 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에버나스 지방에 비어있는 영지의 영주를 대신들과 선제후들의 사람을 앉히기로 협약을 맺었다.
발타자르에게는 아무런 언질조차 주지 않고선 말이다. 황제 딴에는 나름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생각하는 듯싶었지만, 발타자르는 그걸 그냥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하여 그날 밤 신시아를 불러 그녀에게 살생부를 넘겨주며 암살자들을 움직이도록 지시했다.
암살자들의 검은 황제파의 귀족들만 비껴갔고, 그로 인해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학살극에 대해 제도에서는 발타자르를 규탄하기보다는 황제를 압박하는 것으로 노선을 정했다.
지금쯤 황제파는 대신들과 선제후들의 압박에 정신이 없을 것이었다.
진페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발타자르는 자신을 호구로 본 황제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순간 연회장에서 소란이 일었다.
[황제 폐하를 위하여!]
[프락시온 제국 만세!]
[간신들의 앞잡이들을 몰아내자!]
곳곳에서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에 있는 이들을 마구잡이로 칼로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발타자르가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은 얼굴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는 연회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날 호구로 봤으니. 호구처럼 행동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