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7화
“오랜만이야, 알.”
푸른 로브를 걸친 마법사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화려한 문장이 가득한 로브를 걸치고 있던 이가 발타자르를 향해 다가오며 로브의 후드를 젖혔다.
그러자 수려한 은발과 함께 창백한 안색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진페오 슈텔리앙.
황제파를 이끄는 거목이자 제국 최후의 충신이라 평가받는 내무대신 안티오플 슈텔리앙 후작의 차남이며, 동시에 젊은 나이에 물의 마탑의 부탑주의 자리에 오른 천재였다.
진페오는 발타자르가 제도 아카데미에 수학할 당시 함께 했던 동기이며 뼛속까지 귀족 의식이 스며 있는 제도에서 보기 드문 ‘진짜 귀족’이었다.
“이게 몇 년 만이야?”
진페오가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자 발타자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더니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군.”
친우와의 재회에 반가운 마음을 내비치는 진페오와 달리 별다른 반응이 없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진페오가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들어 올렸던 두 팔을 내리곤 발타자르의 손을 맞잡았다.
“여전하네. 그 노인네 같은 말투도 그렇고.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마주 잡은 손을 흔드는 진페오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그의 등 뒤로 대기하고 있는 물의 마탑의 마법사들과 수행원들을 쭉 훑어보더니 말했다.
“수행원이 제법 많은 것 같은데.”
발타자르의 말에 진페오가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버지께서 워낙 과보호를 하셔야지. 괜찮다고 하는데도 저리 딸려 보냈지 뭐야.”
“수행원치고는 귀족들이 제법 보이는걸.”
진페오와 함께 온 이들의 행렬 끝에는 정장 차림의 수행원들이 다수 보였는데 그들 중에 눈에 띄는 몇이 보였다.
나름 숨긴다고 숨긴 것 같았지만 중앙 귀족 특유의 오만함까지는 지워내지 못했다.
“오해하지 마. 저 치들은 내 일행이 아니니까. 알잖아. 제도에서 알력다툼이 심하다는 건. 내가 네 친우에다 이번 방문을 이끄는 책임자이다 보니 혹여나 자네가 아버지의 파벌에 들어갈까 염려하여 딸려 보낸 이들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마.”
그런 것 치고는 발타자르에 이목을 집중시키기보다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회포는 나중에 풀기로 하고 일단 일부터 하자.”
말하며 진페오가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펼쳐 보였다.
“3군 총사령관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후작은 황명을 받들라.”
진페오의 말과 동시에 서찰에 찍혀있는 황제의 인장을 발견한 발타자르가 한쪽 무릎을 굽히며 예를 취했다.
“제국의 충실한 종. 알레한드로 발타자르가 철의 제국 프락시온을 다스리시는 위대한 혈통의 명을 받듭니다.”
발타자르가 읊조리자 거리를 가득 메운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굽히며 극상의 예를 취했다. 진페오가 눈에 이채를 띄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관이 펼쳐지며 곧이어 진페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동안 제국을 위해 헌신한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노라. 또한, 겨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불순한 이들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에버나스 지방의 치안을 확립한 공로를 인정하여 에버나스 지방의 통치권을 승인하며 후작위에서 공작위로 승작한다. 이를 제국의 태양. 레오노플 프락시온 3세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진페오의 말에 발타자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에버나스 지방의 통치권은 이미 예상한 것이지만 승작 건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후작으로 승작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공작으로 승작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도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승작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공작이라는 것이 어디 흔한 것도 아니고 현재 제국에서 공작가는 개국공신의 가문뿐이었다.
비록 발타자르가 야만족의 침공을 승리로 이끌고 에버나스 지방을 통치하게 되었다고 해도 절대 오를 수 없는 작위였다.
만약 이런 식으로 쉽게 공작위에 오를 수 있었다면 뭐하러 제도 대신들이 후작위에 머물러 있겠는가.
‘설마 벌써 제국 내전의 조짐이 보이는 것인가?’
발타자르가 알고 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흐름으로 흘러가는 데다 제도의 상황을 알 수가 없으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축하한다.”
진페오가 서찰을 접어 발타자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발타자르가 두 손으로 진페오가 내민 서찰을 받아 품 안에 갈무리했다.
“출세했네.”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별 감흥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진페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계속 이렇게 세워둘 거야?”
“따라오게.”
발타자르가 진페오와 그의 일행들을 이끌고 온두라스의 내성으로 향했다.
* * *
밀튼이 미리 준비를 끝마쳐 놓은 덕분에 진페오와 그 일행들이 내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연회가 열렸다.
곳곳에서 술잔이 오고 가며 담화가 이어졌다.
발타자르와 진페오는 연회장의 상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서로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크- 좋다.”
와인을 단숨에 비워낸 진페오가 발타자르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너 북부로 간 후로는 연락 한 번 안 했잖아. 그런 녀석이 갑자기 3군 총사령관이니, 마스터니 하면서 유명세가 제도에까지 퍼져 나가서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진페오가 타박하자 발타자르가 무표정한 얼굴로 와인 잔만 매만졌다. 그러더니 이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런 변방까지는 어쩐 일로 온 것인가?”
“너도 알다시피 오스왈드. 그 영감이 혁명단 측에서 모습을 드러냈잖아. 그것 때문에 제도가 발칵 뒤집어져서…….”
“내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지 않나.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견제인가?”
발타자르가 자신을 바라보는 진페오의 시선을 마주 응시하며 묻자 진페오가 끄응- 하고 신음성을 토해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허공에 마법진이 떠오르더니 이내 투명한 막이 발타자르와 진페오를 둘러쌌다.
주변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가 엿듣는 것을 염려하여 차단 마법을 펼친 듯싶었다.
“미안.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괜찮네. 그보다 어서 말해보게.”
발타자르가 답을 재촉하자 진페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뭘 생각하는 것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아니야. 사실 제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물론 그게 오늘내일 일은 아니었으니 크게 이상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연일 선제후들이 보낸 이들이 대신들과 접촉하고 황궁에 머물러야 할 황자와 황녀들이 슬금슬금 민생 시찰을 빌미로 각 지방으로 흩어져 내려가고 있다는 거야.”
가만히 진페오의 말을 듣고 있던 발타자르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내전인가.”
“그럴 가능성이 커. 그래서 아버지께서 폐하와 독대하신 후에 무리를 해서 널 승작시킨거야. 대신들의 이목이 로마노프 공작가와 혁명단에게 집중되어있는 데다 네가 몇몇 대신들에게 뇌물을 듬뿍 먹인 덕에 어찌어찌 통과할 수 있었지.”
이제야 뜬금없이 공작으로 승작시킨 이유가 짐작되었다. 황제는 발타자르를 황태자의 배후로 세우려는 생각인 것이 분명했다.
다른 황자들이 저마다 선제후 혹은 대신들을 뒷배로 둔 반면 황태자는 황제와 슈텔리앙 후작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지지세력이 없었다.
그마저도 다른 세력들에 비해 그 힘이 압도적으로 열세이고.
그러던 차에 발타자르가 북부에서 로마노프 공작가를 제치고 급부상하기 시작하니 그에게 힘을 실어주어 황제파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 분명했다.
“대체 뭘 믿고 날 밀어주려는 것인가? 내가 대신들의 편에 서면 어쩌려고?”
발타자르가 묻자 진페오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했고, 아카데미 시절의 네 생활기록부. 그리고 제도의 대신과 얽힌 악연과 그 이후의 행적들로 판단한 거야. 물론 이것만 가지고선 이런 무리수를 둘 이유가 되지는 않지만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사실 선택지가 너 말고는 없었다는 이유도 커.”
발타자르가 생각에 잠기며 손가락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가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단순히 친우에 대한 의리나 제국에 대한 충성심으로 황제의 파벌에 들어가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황제는 대신들의 꼭두각시 신세이고, 황태자는 그것이 싫어 대신들과 마찰을 빚다 그들의 눈 밖에 나버렸다.
황제파에 들어간다는 것은 제도 대신들과 선제후들의 대척점에 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파벌은 그것을 감수할 만큼의 이득을 발타자르에게 주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황제가 만들어놓은 이 판은 발타자르가 황제파에 들어가지 않을 경우 그에게 여러모로 불리하게 작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작질을 부리다니.’
이것은 황제가 발타자르의 목에 목줄을 채워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꼭두각시라도 황제는 황제라 이건가.’
비록 안건은 슈텔리앙 후작이 낸 것이겠지만 결정하고 시행한 것은 결국 황제였다. 꼭두각시 황제라고 무시하고 있었는데 이젠 평을 조금 달리해야 할듯싶었다.
발타자르에게 아무런 접촉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렇게 돌연히 공작으로 승작시킨 것은 발타자르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선제후들이나 대신들이 보기에 발타자르가 황제와 손을 잡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황제의 입장에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설치해둔 것이지만 발타자르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대신들과 선제후들이 마냥 손 놓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했잖아. 그들은 지금 로마노프 공작가와 혁명단에만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더 묻는다고 답해줄 기색이 아닌지라 발타자르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어차피 물어볼 사람은 많으니까.
발타자르가 턱을 괴고 연회장 곳곳에 퍼져 저마다의 무리를 이루며 담화를 나누고 있는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제도 대신들이나 혹은 선제후들이 보낸 사람들이 분명했다. 진페오가 답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저들에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
“그건 그렇다 치고. 내게 바라는 것이 뭔가.”
“우리 쪽에서 예측하기론 늦어도 3년. 빠르면 1년 이내로 내전이 발생할 거라고 보고 있어. 네가 해줄 일은 그전에 북부의 실권을 틀어쥐는 거야. 물론 우리 쪽에서 대신들을 견제하고 적절히 지원도 해줄 생각이고.”
이건 그나마 반가운 이야기였다.
어차피 혁명단의 봉기가 끝나게 되면 로마노프 공작가와는 북부의 패권을 놓고 싸워야 했다.
발타자르가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반드시 로마노프 공작가는 발타자르를 향해 검을 들이밀 테니 말이다.
“알겠네.”
“그럼. 우리 측 파벌에 들어오는 거지?”
발타자르는 답하지 않고 진페오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것을 긍정의 답변이라 생각한 진페오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단숨에 잔을 비워내었다.
* * *
그날 밤.
연회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파하고 발타자르는 집무실로 돌아와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데, 열린 창문 사이로 무언가가 침입했다.
은신술이 제법 높은 수준에 오른 듯 겉으로 보기에는 그림자가 일렁일 뿐인지라 무심코 넘어가기 쉬웠지만, 발타자르의 감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챙-
재빠르게 검을 뽑아 든 발타자르는 침입자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검을 내던졌다.
“컥-”
검이 단박에 침입자의 어깨를 뚫고 벽에 박혔다.
동시에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발타자르가 다가가 침입자의 얼굴을 가린 복면을 벗겨내자 인간과 고양이를 반쯤 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얼굴이 드러났다.
“묘인족이군. 이곳에 침입한 목적이 무엇이냐.”
발타자르의 물음에 묘인족 침입자가 품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발타자르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들고는 펼쳐 보인 발타자르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서찰 안에는 발타자르가 공작위에 오름으로써 가해질 제약들이 상세히 작성되어 있었다.
누가 보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황제와 발타자르가 손을 잡는 것을 경계한 누군가가 보낸 것임은 확실했다.
발타자르가 묘인족의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았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묘인족의 목을 베어내었다.
싸늘한 주검이 된 묘인족을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싸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지간히도 얕보인 모양이군. 설마 꼭두각시 황제가 날 호구로 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