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6화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광장은 무척이나 활기찼다. 마침 광장에 볼일이 있던 발타자르는 홀로 광장의 분수대에 앉아 크레이프를 먹고 있었다.
아이린은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고 있는 중이었기에 함께 오지 못했다. 물론 시간이 있다고 해도 발타자르의 볼일 때문에 데려오지는 않았을 테지만.
오랜만에 둘러본 거리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분위기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고, 분수대의 주변으로는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느긋이 바라보며 달콤한 크레이프를 먹고 있던 발타자르의 머리맡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저씨가 우리 애들한테 빵 사 준 사람 맞죠?”
언젠가 들었던 것만 같은 질문이 들려오자 발타자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코트를 걸치고 있는 여인이 미소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나워 보이는 눈매에, 금빛 눈동자.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이 인상적인 여인.
신시아였다.
그녀는 근래에 들어 무척이나 빠르게 성장하였는데, 이제는 앳된 티는 거의 사라지고 어엿한 숙녀로 변해 있었다.
“신시아.”
발타자르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신시아가 냉큼 그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일은 할 만한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신시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그냥 그래요. 매일같이 정신없죠.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고 사람은 부족하고.”
“그런 것 치고는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던데.”
“그거야 다 제가 잘나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신시아가 씨익 웃으며 너스레를 떨자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아이들은?”
“로젠은 가웨인 경 밑에서 훈련받고 있고, 다른 애들은 도시 여기저기에 취직해서 제 정보원이 되어주고 있죠. 다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이거.”
신시아가 품에서 주섬주섬 두루마리 편지를 한 통 꺼내어 발타자르에게 내밀었다.
“저번에 부탁하신 로마노프 공작가의 근황들이에요.”
발타자르가 편지를 받아 들며 펼쳐 보이자 신시아가 옆에서 설명을 덧붙였다.
“보시는 것처럼 지난번 토벌대를 주도했던 이슈카 공자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실각하면서 파벌이 3개로 나뉘었어요. 빌로스, 애슐리, 웨즈. 이렇게 세 명이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들이에요. 몇몇 권세 있는 가문을 등에 업었던 후보자들은 모두 행방불명되거나 혁명단 토벌 당시에 사망했구요.”
편지, 아니, 보고서에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근황이 보기 좋게 요약되어 있었다. 제법 내용이 많아 이 자리에서 모두 읽기에는 무리가 있어 발타자르는 주로 굵직한 사건들만 훑어보았다.
“실각 후에 이슈카 공자는 변두리로 좌천되었고 그의 세력들은 세 후보들이 사이좋게 나눠 가졌는데 그건 표면상으로 볼 때나 그렇고 실질적으로 이권이 될 만한 것들은 대부분 애슐리 공녀가 독차지했어요.”
회귀 전과는 사뭇 다른 흐름이었다.
본래 이때 실각하는 것은 이슈카가 아닌 세실이었으며 그녀가 실각함으로써 애슐리 역시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물론 덕분에 로마노프 공작가가 몰락할 때 목숨을 부지하여 제도 사교회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지만.
애슐리가 실각 되었다면 그녀를 회유하여 당분간 신시아의 옆에 붙여둘 생각이었던 발타자르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신시아에게 물었다.
“자네가 볼 땐 어떤가. 이들 중에 누가 차기 공작이 될 것 같은가?”
발타자르의 물음에 신시아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제 생각을 꺼내었다.
“대체적인 평가만 놓고 보면 공작가의 군권을 쥐고 있는 빌로스 공자나 제도에 있는 대신의 지원을 받는 웨즈 공자가 유력해 보이지만 제 생각엔 애슐리 공녀가 가장 유력해 보여요.”
신시아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흥미 어린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웨즈 공자는 대신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지만, 그 반발로 공작가 내부 여론에서 좋지 않은 평을 받고 있고 빌로스 공자의 경우에는 세력은 탄탄하지만, 그들을 이끄는 빌로스 공자 본인이 정치적 능력이 썩 뛰어나지 않은 편이죠. 반면 애슐리 공녀는 두 공자에 비해 세력은 조금 뒤처질지는 몰라도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니 지금의 세력 차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말하던 도중 신시아는 목이 탔는지 발타자르가 사 두었던 과일 음료를 들어 보이며 그에게 ‘마셔도 돼요?’ 하고 물었다.
이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숨에 음료를 쭉 들이마시며 잔을 비워내더니 말을 이어갔다.
“황명으로 혁명단의 토벌을 천명한 시점에서 제국 전역에서 군웅들이 연일 공작가를 방문하는 덕분에 공작가에서는 주기적으로 연회가 벌어지고 있는데, 솔직히 이건 애슐리 공녀를 위한 판이나 다름없죠.”
발타자르는 속으로 감탄했다.
잠시 못 본 사이에 정말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다.
애슐리를 그녀의 스승으로 붙여주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제 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두어도 알아서 잘 자라고 있으니 지원만 적절하게 해준다면 회귀 전의 그녀처럼 높이 날아오르리라.
“그리고 애슐리 공녀의 수족인 빈스 남작이 최근 들어 제도를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을 보면 슬슬 제도와도 접촉 중인 것 같으니 제 짐작이지만 조만간 공작가의 후계구도가 또 한 번 크게 뒤바뀔 것 같아요. 물론 대비도 해둔 상태구요. 공작가의 덩치가 크다 보니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잡음이 많이 나오던걸요?”
제 딴에는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하는데 그 모습이 우스웠는지 발타자르가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먹여주었다.
따악-
“악!”
신시아가 양손으로 제 이마를 감싸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곤 이내 발타자르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아파요!”
얼마나 아팠는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신시아를 보며 발타자르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직 그런 웃음을 짓기에는 한참 일러.”
“그럼, 말로 했으면 되잖아요!”
빽- 하고 신시아가 소리치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린 아가씨한테 다 이를 거예요.”
신시아가 빨갛게 달아오른 제 이마를 문지르며 입술을 삐죽였다.
“글쎄…… 그래도 린은 내 편일 텐데?”
자신만만한 발타자르의 목소리에 신시아가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내버려 둔 채 발타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툭툭 털었다. 그 모습을 보던 신시아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곤 말했다.
“슬슬 시간이 다 되었나 보네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건물의 지붕 위로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어느샌가 광장 주변으로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도열하며 길을 만들었다.
동시에 거구의 사내. 갤러해드가 지휘관용 코트를 한쪽 팔에 걸치고선 모습을 드러내며 발타자르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손님들이 곧 도착하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신시아의 말대로 시간이 다 되었다.
손님들을 마중하러 갈 시간이었다.
“고생하게.”
발타자르가 갤러해드에게서 코트를 건네받아 걸치곤 신시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인사하자 그녀가 발타자르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아저씨도요.”
* * *
발타자르와 함께 군용 게이트 앞에서 물의 마탑의 마법사들을 기다리던 갤러해드가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었다.
“주군.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게.”
“어째서 마법사들이 공작가가 아닌 이곳으로 오는 것입니까?”
갤러해드의 질문에 발타자르가 군용 게이트로 시선을 옮기며 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경고일세.”
“경고…… 말입니까?”
“그렇네. 근래에 들어 우리 쪽 세력이 급성장을 거듭하니 혹여나 허튼 마음을 먹을까 싶어 무력시위를 하려는 것이지.”
“그런 것이라면 물의 마탑이 아니라 불의 마탑의 마법사들을 보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의 마탑은 제국 5대 마탑 중 하나로 마법사들이 으레 그렇듯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큰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
특히 이 물의 마탑의 마법사들은 치유 마법에 특화된 이들로 화력 면에서는 다른 마탑들에 비해 뒤처질지 모르나 보조하는 측면에서는 단연 발군의 힘을 자랑하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 그들을 얕잡아 봐서는 안 되었다.
비록 그들이 치유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들도 엄연히 마법사이며 제국 5대 마탑의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성세를 누리는 집단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마법사는 마법사였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 날려 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법사가 무서운 것이고, 그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중앙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 마탑을 보내는가는 중요치 않다네. 중요한 것은 마법사가 이곳을 방문한다는 사실이니 말일세.”
“그렇다면 혹시 물의 마탑주가 직접 오는 것입니까? 혁명단 측에도 아크메이지가 존재하니 이쪽에서도 아크메이지를 동원하는 것이 순리에 맞지 않겠습니까?”
갤러해드의 말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상식적으론 타당한 생각이지만 어디 제국이 상식적으로 움직이는 곳이던가.
“설마. 그럴 리가.”
마법사는 중앙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권력의 핵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설령 북부가 혁명단의 수중에 떨어지고, 제국 전역에 혁명의 불길을 퍼뜨린다고 해도 아크메이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왜? 그들은 제도를 지켜야 하니까.
제도에 머무는 황족들과 대신들의 목숨이 제국 신민 수천만의 목숨보다 더 중요하니까.
그 정도로 황실은, 제국 정계는 썩었다.
그러니 황태자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현 황제의 사후에 황위를 놓고 내전이 벌어진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 달랑 마법사들만 보내는 것입니까?”
“아니. 최소한 부탑주 정도 되는 이가 인솔해서 오겠지. 그래야 모양새가 좋으니까.”
물론 마법사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비롯해 다수의 수행원도 함께할 것이고 그중에는 분명 온두라스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세작들과 감시를 명목으로 제도의 관료들도 여럿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발타자르가 기사들과 병사들을 소집하여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것이고.
“오는군.”
발타자르와 갤러해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군용 게이트가 밝은 빛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군용 게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서서히 잦아들자 프락시온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독수리가 새겨진 깃발이 펄럭이며 모습을 드러내었다.
기수들이 하나둘 게이트를 빠져나오기 시작하고 뒤이어 비프로스트 요새에서나 느껴질 법한 한기와 함께 푸른 로브를 걸친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국 5대 마탑 중 하나.
물의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온두라스에 방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