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5화
로마노프 공작가의 토벌대가 대패하고, 발타자르가 에버나스 지방을 손에 쥐게 된 이후 혁명단을 비롯해 북부의 세 지방을 장악한 세력들이 서로 숨 고르기에 들어가며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동안 중앙에선 대신들이 황제를 움직여 혁명단을 토벌할 것을 천명하니 제국 5대 마탑 중 한 곳인 물의 마탑에서 참전을 선언하고 각 지역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군웅들이 저마다의 야심을 품에 안고 하나둘 북부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국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시시각각 혁명단의 숨통을 조여오는 가운데 혁명단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무언가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 * *
에버나스 지방을 손에 넣은 이후 발타자르는 온두라스에 칩거하며 내부 정비에 힘썼다.
우선 그동안 비축해 두었던 겨울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들을 처분하며 막대한 자금을 확보했다. 그렇게 끌어모은 자금으로 에버나스 지방 전역의 파손된 도로들을 정비하는 것에 힘썼다.
무너진 성벽들과 산업 시설들을 복구하였으며 서부에서 막대한 양의 식량과 모종들을 들여와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임대하여 주었다.
덕분에 에버나스 지방의 전역에서 연일 크고 작은 공사가 진행되었지만, 포로로 잡힌 혁명단의 잔당들이 넘쳐났기에 인력 수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또한, 개중에 특출난 재주가 있는 자들은 간단한 인성 검사 이후 등용하여 중히 쓰니 발타자르의 통치 아래 에버나스 지방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가고 있었다.
* * *
‘오늘은 이만하고 쉬어야겠군.’
수북이 쌓여 있던 서류들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발타자르가 기지개를 켜며 몸을 풀었다.
그 순간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각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발타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밀튼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그의 품 안에는 서류 뭉치가 가득했는데 발타자르가 그것을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의 서류 업무는 해도 해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발타자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밀튼이 들고 온 서류뭉치를 집무실 한쪽에 내려놓고는 서류들을 분류하며 말했다.
“지시하신 대로 서부에서 식량을 대량 매입했으며 이 서류들은 그와 관련된 계약서들입니다. 또 이쪽 서류들은 이번에 마무리된 에버윈 상단의 내부정리에 관한 업무 보고서입니다.”
말을 마친 밀튼이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방 곳곳에는 서류 뭉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 모습에 밀튼이 쓰게 웃었다.
“각하께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다 자업자득이지. 그보다 차 한잔하지.”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이곤 밀튼에게 자리를 권했다.
밀튼이 소파에 쌓인 서류들을 슬쩍 밀어내며 자리를 잡고 앉자 발타자르가 찻주전자와 찻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식량 매입에 어려움은 없던가?”
발타자르가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물었다.
“예. 센피단 지방을 피해서 돌아와야 하다 보니 상행 경로가 길어졌다는 점만 제외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가.”
발타자르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밀튼이 말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물어보게.”
“어찌하여 식량을 사재기하듯 끌어모으시는 겁니까?”
밀튼의 의문은 타당한 것이었다.
비록 전쟁의 여파로 농지들이 손상되었으며, 백성들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임대해 주고 있기는 했지만,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에버나스 지방은 명색이 북부 최대의 곡창지를 보유한 곳이었다. 비록 서부에 비해 생산량이 한참 뒤처진다고 해도 자급자족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밀튼에게 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식량을 확보해 두라고 지시했다.
그렇지 않아도 돈 들어갈 곳이 많은데 부족하지도 않은 식량을 매입하는 데 돈을 낭비한다고 생각되니 밀튼 입장에선 의아해할 만도 했다.
그런 밀튼에게 발타자르가 짧게 답했다.
“에버윈 상단의 인맥을 넓히기 위해서라네.”
내부정리를 통해 에버윈 상단은 새롭게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 이름값은 여전하지만, 인맥은 대부분 소실된 상황이었다.
쉽게 설명하자면 로마노프 공작가에서 발타자르에게로 넘어오면서 에버윈 상단의 거래처가 전부 사라진 상황인지라 새로이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 일을 벌였다는 소리였다.
‘사실 이유는 따로 있지만.’
본래 제국 서부는 7왕국 연합의 땅에 존재하는 세계수의 영향으로 그 주변 일대의 땅이 무척이나 비옥했다.
하지만 올해 추수철이 다가올 무렵.
세계수가 병들게 되고 그로 인해 제국 서부에는 제국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기근이 찾아오게 된다.
비옥하던 땅이 순식간에 메마른 불모지로 변하고, 잘 자라고 있던 농작물들이 시들기 시작하며 이내 생기를 잃어버리게 된다.
이로 인해 식량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영주들은 이 상황을 이용해 돈을 벌 궁리만 하니 백성들은 먹을 식량이 없어 굶주리며 고통받게 되고 결국 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발타자르는 이 대기근이 일어나기 전에 식량을 사재기하여 대량의 자금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걸 그대로 얘기했다간 그 누구도 믿지 않을 테니 이리저리 핑계를 대가며 식량을 끌어모으는 중이었다.
“각하께서 얼마나 에버윈 상단을 아끼시는지 잘 알겠습니다.”
밀튼이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에버윈 상단을 제게 맡기실 정도로 절 믿고 계시다는 것도.”
약간의 오해가 생긴 것 같았지만 발타자르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차만 홀짝였다.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빠르게 에버윈 상단을 정상으로 돌려놓겠습니다. 아니! 북부 최고의 상단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육십을 넘은 노신이 의욕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상단의 일로 회의를 해야겠다는 말과 함께 발타자르에게 인사하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열정적으로 변한 밀튼이 낯설기만 했다. 하지만 나쁜 변화는 아니니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을 보러 가야겠군.”
아직 많이 남은 서류들이 눈에 밟히기는 하지만 가끔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 * *
“그래서요. 엘이 도와줘서 정령이랑 계약했어요.”
발타자르는 간만에 서류 작업에서 벗어나 아이린과 가벼운 티 타임을 가졌다.
한동안 집무실에만 틀어박혀 있던 발타자르와 이렇게 오붓한 시간을 보내게 되니 기분이 좋았던지 의자 위에 앉은 아이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동안 그녀가 겪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아이린이 불의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하급이 아니라 중급이라고 했다.
정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한 번에 중급 정령과 계약을 맺다니.
발타자르는 속으로 적잖이 감탄하며 나중에 정령석을 구해 선물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번 보실래요?”
아이린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발타자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린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브리아. 나와줘!”
아이린의 외침에 허공에서 작은 불꽃이 일어나더니 이내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꼬마 마녀가 빗자루를 탄 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불의 중급 정령 브리아가 확실했다.
소환된 브리아는 불꽃 가루를 흩뿌리며 아이린의 머리맡을 날아다녔다.
“만져 보실래요?”
아이린이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발타자르에게 브리아를 자랑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는 것이 빤히 보이다 보니 발타자르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쓰게 웃으며 발타자르가 브리아를 향해 손을 뻗자 브리아가 멀뚱멀뚱 그 손을 바라보더니 이내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이린이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브리아는 망설이는 듯하더니 발타자르의 손 위에 내려앉았다.
순간 발타자르의 손바닥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브리아는 발타자르의 손바닥 위를 이리저리 걸어 다니더니 이내 쪼그리고 앉아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러곤.
[퉷-]
침을 뱉었다.
물론 정말로 침을 뱉은 것은 아니었지만 행동이 딱 그랬다.
“브리아! 뭐하는 거야!”
대번에 아이린이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소리쳤다.
이에 브리아가 아이린에게로 날아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뻥긋거렸다.
“뭘 잘했다고 변명하는 거야! 손 안 들어?”
아이린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선 소리치자 브리아가 입술을 삐쭉 내밀며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보던 아이린은 이내 쪼르르 발타자르에게로 다가가 울상을 지으며 사과했다.
제 딴에는 칭찬받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런 것인데 브리아가 다 망쳐 버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원래는 착한 아이인데…….”
발타자르는 울먹거리는 아이린을 보곤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무 혼내지 말렴.”
“그치만…….”
사실 브리아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는 발타자르의 손에 짙게 배어 있는 피 냄새 때문이었다.
물론 냄새를 맡는다고 맡아지는 일반적인 피 냄새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오랜 시간 손에 피를 묻히게 되면 발생하는 특유의 기운이었다.
그 기운은 정령들이 꺼려하는 기운이었고 때문에 브리아가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브리아는 그만 돌려보내고 함께 산책이나 하자꾸나.”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좋아요.”
때마침 손을 들고 있던 브리아가 아이린에게로 다가와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면서 슬쩍슬쩍 발타자르의 눈치를 보자 아이린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서 반성하고 있어.”
이에 브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처량한 눈빛으로 아이린을 바라보더니 이내 정령계로 사라졌다.
아이린은 그런 브리아가 내심 신경 쓰였던지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다고 생각한 발타자르가 번쩍 아이린을 품에 안아 들었다.
“꺅-”
깜짝 놀란 아이린이 작은 비명과 함께 발타자르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럼. 가 볼까?”
발타자르가 짓궂은 미소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 * *
“각하.”
어느새 잠이 든 아이린을 품에 안고 정원을 거닐던 발타자르에게 이번에 신설된 정보단체 ‘별의 구도자’의 암살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발타자르에게 두루마리 편지를 내밀었다.
“총관께서 급히 전하라 하셨습니다.”
편지는 금색의 실로 치장되어 있었는데 척- 보기에도 어느 고위 귀족이 보낸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 보낸 것인가?”
발타자르가 물었다.
“황실에서 내려온 공문입니다.”
암살자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공문을 받아들곤 펼쳐 보였다. 손에 들고 있던 공문을 찬찬히 훑어내리던 발타자르는 어느 한 지점에서 시선을 고정하곤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공문을 처음부터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물의 마탑이라…….”
공문에는 물의 마탑이 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그들이 3군에 배속되어 독립부대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해 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간만에 친우를 보게 생겼군.”
발타자르가 피식 웃어 보이며 공문을 암살자에게 돌려주곤 흘러내린 아이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말했다.
“밀튼에게 가서 근시일 내로 귀한 분들이 찾아올 것이니, 손님 접대할 준비를 해두라 이르게.”
“알겠습니다.”
암살자가 발타자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곤 꺼지듯 자리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