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4화
튜토리얼 지역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특전으로 오필리아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이계로 향하는 문을 통과하는 순간 주변이 짙은 어둠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드러난 것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파충류의 눈동자였다.
[네가 용사인가?]
오필리아의 머릿속으로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에 그녀는 다급히 마법을 시전하며 밝은 빛을 흩뿌리는 구체를 소환해 내었다. 그러자 주변의 어둠이 한결 옅어지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상대의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악어의 얼굴에, 인간의 몸.
맹수의 것을 닮은 손을 가진 거대한 괴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냐!”
오필리아가 두려움에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모습이 우스웠던지 목소리의 주인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 몸은 마계 서열 30위의 포르네우스 후작일세.]
그의 말에 오필리아가 주문을 영창하며 소환수들을 소환하곤 전투태세를 취했다.
“네 녀석! 마왕이구나!”
포르네우스는 잠시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위대하신 마신의 은총으로 잠시 허락된 시간을 헛된 싸움으로 낭비하는 무례를 저지를 수는 없지.]
그가 가볍게 손을 휙- 하고 휘두르자 그녀가 소환했던 소환수들이 일거에 쓸려 나갔다.
“히끅-”
그 압도적인 힘에 오필리아가 딸꾹질을 하며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포르네우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 겁먹을 것 없네. 자넬 해치고자 이 자리에 초대한 것은 아니니까.]
포르네우스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어디서 꺼낸 것인지 모를 술병을 쥐곤 흔들어 보였다.
적의가 없어 보이는 그 모습에 오필리아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잔하겠나?]
“필요 없어. 보아하니 날 죽일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날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뭐야?”
오필리아의 물음에 포르네우스는 술병째로 술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이내 손으로 슥- 입가를 문지르며 말을 꺼냈다.
[간교한 천신天神이 수작질을 부려 협정을 위반하고 그대들을 한발 먼저 중간계로 보냈으니 우리도 그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자넬 이렇게 초대한 걸세.]
사실 오필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용사들보다 한발 먼저 중간계로 향하게 된 용사들은 모두 마왕들과 독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본래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천신이 협정을 위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르네우스의 말에 오필리아는 흥미가 생겼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나보고 당신들을 도우란 소리야? 미안하지만 만약 내가 당신들과 손을 잡는다고 해도 난 계약에 묶여 있어서 마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없어.”
오필리아의 말에 포르네우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가능하네.]
“그게 무슨……?”
오필리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포르네우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오필리아가 몸을 움찔거리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어느샌가 포르네우스의 길쭉한 손톱이 그녀의 가슴팍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자네의 영혼. 그것을 내게 바친다면 계약은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지. 내가 원하는 조건이 바로 그것이라네. 자네가 내 힘을 필요로 하는 순간. 힘을 빌려주지. 대신 자네의 영혼을 내게 주는 걸세.]
웃기지도 않는 제안이었다.
포르네우스가 자신을 해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든 그녀가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다.
“마왕에게 영혼을 바치다니. 그 뒤에 어떻게 될 줄 알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보험 하나 정도는 들어놔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그녀는 일말의 여지를 남겨두기로 했다.
“하지만 뭐, 생각은 해보지.”
오필리아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포르네우스가 미소지었다.
그녀가 자신의 제안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었다.
[내가 예언 하나 할까?]
포르네우스가 다른 용사들을 내버려 두고 굳이 오필리아를 선택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오만하고 삶에 대한 집착이 무척이나 강했다.
그녀의 오만한 성정은 필시 분쟁을 일으킬 것이고, 그로 인해 한 번쯤은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때문에, 다른 마왕들이 그녀보다 우수한 용사들과 독대를 원했을 때도 그만은 오필리아와의 독대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었다.
“……예언?”
[그래. 예언. 자네는 머지않아 내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될걸세.]
포르네우스의 말에 오필리아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도 않아. 얘기 다 끝났으면 이제 그만 보내줘.”
그녀의 말에 포르네우스는 손을 휙- 하고 내저었다.
그러자 어둠이 스멀스멀 흘러와 그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의식 속에 포르네우스의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음에 보세.]
그리고 다시 어둠에 휩싸인 그녀가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어느 시골의 자그마한 마을이었다.
* * *
오필리아와 마츠시마의 사망 후 전세는 다시 3군에게로 기울었다.
그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혁명단은 요새를 점거하고, 골렘을 부리는 용사를 앞세워 맹렬히 항전하였으나 마스터임을 드러낸 발타자르를 앞세운 3군의 총공세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이후 3군은 거침없이 무위를 선보이는 발타자르의 지휘 아래 차례로 인근 요새들을 하나씩 함락시켜 나갔고 결국 베른 요새 앞에 군을 포진시켰다.
“대장. 온두라스에서 전령이 왔어요.”
절벽의 정상에 위치한 베른 요새를 올려다보던 발타자르에게 트리스탄이 다가와 말했다.
그녀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든 발타자르는 서신을 쭉 훑어보더니 실소를 터뜨렸다.
“좋은 소식이에요?”
트리스탄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토벌대가 대패하였다는군.”
서신은 신시아가 보낸 것이었는데, 그 안에는 최근 로마노프 공작가의 동향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최근 로마노프 공작가는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하여 혁명단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격전지는 센피단 지방으로 로마노프 공작가에서는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을 것을 진작에 깨닫고선 파벌끼리 군을 나누어 진군을 개시했다.
처음에는 토벌대가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듀락 후작령에서 혁명단이 총력전을 걸어오자 이에 맞서 여러 갈래로 나뉘었던 토벌대가 듀락 후작령에 모여 응전을 개시하였고, 대패하였다.
패전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크게 두 가지를 손꼽아 보자면 하나는 통일되지 않은 지휘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 최고의 아크메이지, 현자 오스왈드 간다르바의 참전이었다.
비록 토벌대가 혁명단을 상대로 그동안 승리를 거듭하며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 올라 있고, 전력 또한 막강하다고는 해도 병력의 수가 배 이상 많은 혁명단을 쉬이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마스터를 보유하지 못한 토벌대에 비해 혁명단에서는 오스왈드를 비롯해 그의 제자들이 대거 참전하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지휘계통이 통일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결국 토벌대는 대패하며 센피단 지방에서 군을 철수시키기 시작했고 민란이 일어난 이후로 줄곧 최전선에서 혁명단의 공세를 막아내었던 듀락 후작가 역시 자신들의 영지를 버리고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제 센피단 지방이 혁명단의 손에 떨어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혁명단의 기세가 무시무시하네요. 저희가 상대한 녀석들은 죄다 약골들뿐이던데. 물론 저번에는 제법 상대할 만한 녀석들이 나오기는 했는데 걔넨 갤러해드 아저씨가 다 잡아먹어 버렸구요.”
피잉-
트리스탄이 말하며 시선을 발타자르에게 고정한 채로 화살을 쏘았다.
그러자 화살이 푸른 궤적을 그리며 베른 요새의 성벽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병사의 미간을 꿰뚫었다.
제법 먼 거리임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사격 실력이었다.
“지금까지야 그랬겠지. 하지만 오스왈드 간다르바가 이끄는 혁명단의 주력과 싸우게 된다면 생각이 달라질 걸세.”
사실 혁명단의 수장에 오스왈드가 있는 이상 토벌대의 패배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다만 의외인 점은 오스왈드의 참전 시기가 생각보다 이르다는 것이었다.
토벌대가 전력으로는 앞서고 있다고 해도 병력의 우세와 오스왈드의 제자 마법사들이 참전한다면 제법 큰 피해를 입겠지만 중앙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물론 마법사가 등장한 시점에서 중앙의 개입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혁명단에서는 오스왈드를 참전시키는 강수를 두었다.
덕분에 그의 등장으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저 그런 마법사도 아니고 무려 제국 최고의 아크메이지가 혁명단 측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중앙의 개입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혁명단의 입장에선 중앙의 개입은 최악의 상황이나 마찬가지인 것인데 그것을 자처했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조만간에 제국 전역에서 여러 군웅들이 북부로 몰려들겠지.”
로마노프 공작가가 대패하면서 힘을 크게 잃은 지금. 북부에서 혁명단을 토벌할 수 있는 세력은 발타자르의 세력뿐이었다.
오스왈드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중앙에서 발타자르에게 황명을 내려 혁명단을 토벌하도록 명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스왈드의 등장으로 상황이 급변한 지금은 발타자르에게만 황명을 내릴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이것이 발타자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했다.
더 이상 북부에서 발타자르에 비견될 세력이 없어진다는 것.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혁명단 토벌에 큰 공을 세워야겠지만 그것은 문제없었다.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하겠네.”
발타자르의 말에 트리스탄이 힘차게 대답했다.
“네! 맡겨만 주세요!”
* * *
이날 베른 요새는 3군의 손에 떨어졌다.
미르딘이 온두라스에 농민 봉기를 일으켜 후방을 교란시키고 기묘한 책략들을 선보이며 3군의 공세를 잘 막아내는 듯싶었지만, 발타자르가 개입하면서 모두 무산되어 버렸다.
온두라스에서 일으킨 봉기는 캐러독과 가웨인이 이끄는 사냥개들에 의해 모두 목이 달아나 효수되었으며 미르딘의 책략들은 발타자르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이후 단신으로 성벽 위로 난입한 발타자르가 혁명단을 휩쓸면서 성벽에 공백이 생겨났고, 연이어 성문과 성벽에서 밀고 들어오는 3군의 병력을 막지 못해 패배하였다.
결국, 미르딘을 비롯한 수뇌부들과 혁명단의 병사 3만이 포로로 잡혔으며 3군은 에버나스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은 물론 북부 전역으로 진군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오랜 세월 북부를 지배했던 로마노프 공작가를 능가하는 거대 세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