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3화
오필리아의 외침과 동시에 해골 형상의 망령들이 허공에서 솟아나 그녀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그러곤 이내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그대는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목소리의 말에 오필리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시끄러워! 계약할 거면 어서 나와서 저 자식을 빨리 해치우라고!”
오필리아의 외침에 목소리의 주인이 ‘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지간히도 급한가 보군.]
조롱이 담긴 그 음성에 오필리아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닥쳐! 너 말고도 계약하겠다는 놈들은 많으니 그렇게 입으로만 나불거릴 거면 꺼져!”
오필리아의 말에 그녀를 휘감은 망령들이 소름 끼치는 비명을 토해내기 시작하였다.
[건방지기는. 뭐, 좋네. 덕분에 가장 먼저 이 땅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번만은 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지.]
그 말을 끝으로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구구궁-
천둥소리와 함께 하늘이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이고, 전장에 빛이 사라지며 짙은 어둠이 내리깔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오필리아를 감쌌던 망령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오며 회오리처럼 빙글빙글 제자리를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뼛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의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문의 중심에는 검은 기류가 맹렬한 기세로 소용돌이치며 그 안에는 고통에 찬 얼굴로 비명을 내지르는 망자들이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통칭 ‘마계의 문’이 이 땅에 강림했다.
* * *
발타자르는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계의 문을 바라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회귀 전에도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던 것을 이렇게 두 눈으로 목도하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마왕이라…….’
회귀 전에는 사흘의 낮을 휘감은 어둠의 끝자락에 모습을 드러내었던 이들이었다. 한데 그 마왕이 이리도 빨리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역시 용사와 마왕은 서로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군.’
고명한 학자들은 용사와 마왕의 등장이 혹시 신들이 이 땅에서 벌이는 대리전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했었다.
이야기가 너무 딱딱 맞아떨어지며 진행되니 되려 의심을 사게 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신의 강림을 위해 마왕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것을 막기 위해 용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너무 형편 좋은 이야기였다. 현실은 소설이 아니었다.
‘뭐, 아무렴 어떤가.’
생각은 딱 거기까지였다.
여기서 더 생각하고 고민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왕들의 등장은 확정적인 운명이었고, 바꿀 수 없는 미래였다.
발타자르는 마계의 문 앞으로 걸어가 팔짱을 끼고 지그시 문을 바라보았다.
문 너머로 불길한 기운이 새어 나오며 점점 주변의 공기를 잠식해 들어갔지만, 발타자르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마왕이 강림한다는 현실에도 딱히 두렵다거나 하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마왕이 모습을 드러낼지 호기심이 솟구치기만 했다.
‘기운을 보니 하위 서열의 마왕 같은데…….’
사실 발타자르가 이렇게 자신감을 내비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상위 서열의 마왕이 아니고서야 제아무리 마왕이라고 해도 마스터를 상대로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마왕들이 무서운 것은 지닌바 강력한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마계의 군세를 소환하고, 인간들을 현혹시켜 내분을 유도하는 점이 더 컸다.
그들은 때로는 인간과 손을 잡기도 하고, 배신을 하기도 하며, 협잡질을 일삼기도 했다. 개중에는 신의가 있는 자도 있으며, 간악한 자들도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들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이와 손을 잡고 현혹시켜 뒤통수를 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군.’
소용돌이가 점점 강렬해지며, 그 안에서 주변을 뒤덮은 어둠보다 더 짙은 어둠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계의 문에서 악어를 닮은 머리가 불쑥 솟아올랐다.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과 금색 빛을 띠는 눈동자가 쉼 없이 꿈틀거렸으며, 쩍 벌어진 입안에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사람의 형상을 한 이빨이 날카로운 예기를 번뜩이고 있었다.
서열 30위.
마계에서 수서족水棲族을 이끄는 포르네우스 후작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발타자르의 음성에는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포르네우스가 흥미와 호기심이 뒤섞인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호오? 이 몸을 아는가?]
발타자르의 머릿속에 포르네우스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눈동자를 마주 응시했다.
“알지. 아주 잘 알지.”
회귀 전.
포르네우스는 해수족 수만을 이끌고 동부의 해안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해왕海王.
그것이 그를 칭하는 별칭이었다.
당시 동부 해안을 장악했던 해적단들을 대거 토벌하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프리드리히 공작을 살해하고 그가 이끄는 군선 수백 척을 불살라 제국 동부를 공포로 물들였다.
덕분에 제국 내전에서 칼 프란츠 대공과 함께 가장 강성한 세력을 구축했던 프리드리히 공작가가 칼 프란츠 대공에게 항복하게 되었고 결국 제국 내전은 칼 프란츠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니 더욱 이 자리에서 죽여야겠지.’
칼 프란츠를 적대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가 독주하도록 내버려 둘 생각도 없었다. 프리드리히 공작이라면 발타자르가 나서지 않아도 알아서 칼 프란츠의 억제제가 되어 줄 것이었다.
그렇기에 포르네우스는 이 자리에서 죽어야만 했다.
더욱이 물이 없는 곳에서 포르네우스는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기에 제거하려면 지금이 적기였다.
발타자르는 마계의 문을 빠져나오는 포르네우스의 주둥이를 손으로 턱- 하고 움켜쥐었다. 순간 어처구니가 없다는 감정이 담긴 포르네우스의 눈동자가 발타자르를 응시했다.
그가 발타자르에 의해 강제로 닫혔던 입을 열려는 순간.
오러 블레이드에 휘감긴 발타자르의 검이 그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푸욱-
발타자르의 검이 포르네우스의 아래턱부터 시작하여 두개골을 관통하며, 마치 뿔이 돋아난 것만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꺽-”
포르네우스가 억눌린 비명을 토해내었다.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그가 발버둥을 치려 했지만, 고작 머리만 빠져나온 상황에서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다.
“한심하긴.”
발타자르의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포르네우스를 응시하더니 이내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꿰뚫린 그의 머리통에 큰 구멍이 생겨났다.
[네놈! 감히 이 몸이 누군 줄 알고…….]
발타자르의 머릿속에 포르네우스의 음성이 울려 퍼졌지만,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발타자르의 검이 포르네우스의 머리통을 꿰뚫은 채로 원을 그리며 휘둘러지자 그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절단된 그의 목에서 검 붉은 피가 쏟아져 나오며 발타자르의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타자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선 떨어져 내린 포르네우스의 머리통에 발을 올렸다.
포르네우스의 분노에 찬 눈동자가 발타자르를 응시하는 순간.
퍼억-
그의 머리가 터져 나가며, 그대로 곤죽이 되어버렸다.
한때 제국 동부를 공포로 물들였던 마왕의 최후치고는 무척이나 허망했다.
* * *
오필리아는 기껏 영혼까지 바쳐가며 소환한 포르네우스가 별다른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어 나가자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마왕이라며! 이 세계에선 용사 말고는 대적자가 없다고 했잖아! 내 영혼까지 가져갔잖아!’
속으로 포르네우스를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두려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계약에 의해 지구에서 이 세계로 넘어올 당시.
신은 분명 그녀에게 이리 말했었다.
이 땅에는 마왕과 대적할 자가 없으니 그대들이 가서 이 땅을 지켜달라고.
그런데 이게 뭔가.
용사인 그녀는 물론이고 마왕마저도 저 사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녀가 전력을 다했음에도 발타자르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으며, 마왕은 머저리같이 소환 도중에 목이 달아나며 즉사했다.
‘저런 놈이 있는데 대체 우리는 왜 끌어들인 거야!’
그녀 스스로가 선택하여 이 땅에 온 것이지만 오필리아는 이 땅으로 그녀를 초대한 신을 원망했다.
“사, 살려주세요!”
오필리아가 어느새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온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게요! 살려만 주세요! 저, 전 아주 쓸모가 많아요!”
그녀가 땅바닥을 기어 발타자르의 발에 매달렸다.
“용사라고 아세요? 신과의 계약으로 이 땅에 마신이 강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만간 용사들이 대거 이 땅을 방문할 거에요.”
발타자르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더 들을 것이 없겠다 싶어 이만 오필리아를 죽이려는데 그 낌새를 눈치챈 오필리아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요, 용사들은 아주 빨리 성장해요! 지금 그들은 튜토리얼 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이에요.”
이건 발타자르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면 그대는 왜 그 튜토리얼 지역이라는 곳에 있지 않고 이곳에 있는 것인가?”
처음으로 발타자르가 입을 열자 그가 흥미가 생겼다는 것을 깨달은 오필리아가 잘하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는 대답했다.
“저는 튜토리얼 지역에서 제법 우수한 성적을 받아 그 특전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일찍 이 땅에 오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용사 중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라는 것이죠.”
오필리아가 자신의 유용함을 어필했지만, 발타자르는 코웃음만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자네가 용사 중에 가장 강한 이다?”
발타자르의 싸늘하게 식은 눈동자가 오필리아를 응시하며 묻자 그녀가 몸을 움찔거리며 답했다.
“무, 물론. 저 말고도 몇몇 이들이 더 있기는 하지만 아주 적어요. 그리고 저는 그들보다 더 쓸모가 많아요. 여러 소환수를 부릴 수도 있고, 좀 더 성장한다면 앞서 보셨던 녀석들보다 더 강한 것들도 소환이 가능해요. 방금 전에 보셨다시피 마왕을 소환할 수도 있죠. 제가 마왕을 소환하면 당신이 소환 도중에 제거하면 아주 손쉽게 마왕들을 모두 무찌를 수 있을 거예요.”
마지막 말은 허세였다.
마왕이 그리 쉽게 소환되는 것이었으면 회귀 전 마왕들에게 그토록 고전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더는 쓸 만한 내용이 나올 것 같지 않자 발타자르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오필리아가 다급히 소리쳤다.
“원하신다면 제 몸도 마음도 모두 드리겠어요!”
더 들을 가치가 없었다.
분명 그녀의 외모는 엘프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엘프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살려둘 이유가 되지는 못했다.
퍼억-
발타자르의 발이 오필리아의 몸을 후려 찼다.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그대로 나자빠졌다.
그런 그녀의 몸 위로 발타자르가 한발을 턱- 하니 올리더니 그녀의 가슴에 검을 겨누었다.
“제, 제발…….”
발타자르의 검이 천천히 그녀의 심장을 찔러 들어갔다.
“꺽-”
오필리아가 입에서 붉은 피를 게워내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그녀의 얼굴을 적시고, 발타자르의 검이 마침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살…… 려…….”
오필리아는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발타자르는 그녀의 심장을 꿰뚫은 검을 비트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마침내 오필리아가 숨을 거두었고 발타자르는 검을 뽑아 들곤 그대로 그녀의 목을 베어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