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1화
붉은 십자가 혁명단의 수장 오스왈드 간다르바를 보필하는 삼십육좌의 일익을 맡고 있는 십삼좌 미르딘 윌트는 연이어 들려오는 패전 소식에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세 남작령은 발타자르 후작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인가?”
미르딘의 물음에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첩보 부대를 이끄는 발터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또한 세 남작령 인근의 영지 네 곳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길어 봐야 삼일 이내에는 모두 점령당하고 곧장 이곳 베른 요새로 진격해 올 것이라 예상됩니다.”
발터의 대답에 미르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면 대결을 하지 말라고 그리 일렀건만.”
진즉에 3군의 위험성을 깨닫고 있던 미르딘은 세 남작령을 지키고 있던 지휘관들에게 절대 3군과 야전에서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파판을 지키던 삼십이좌 틸레난을 제외한 나머지 지휘관들은 병력의 수적 우세만 믿고선 그의 말을 어기고 야전에서 3군과 일전을 벌였고 대패하였다.
아무리 병력의 다수가 농민들이라고는 해도 미르딘의 말대로 농성을 벌였다면 최소한의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었을 것이었다.
파판이야 발타자르 후작이 직접 군을 이끌고 진군해 왔다고 하니 논외로 치더라도 말이다.
결국, 그 여파로 제대로 된 방어 준비를 끝마치지 못한 인근의 네 곳의 영지들 역시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3군의 맹공에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 베른 요새가 절벽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기에 농성에 무척이나 유리한 지형이라는 점이었다.
“인근의 요새 네 곳의 공략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
“순조롭게 진행 중입니다. 세 곳은 오늘 내로 함락할 수 있을 것 같고 남은 한 곳은 저항이 조금 거세기는 하지만 용사님들께서 투입되신 곳이니 금방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대화 도중 용사가 거론되자 지도만 물끄러미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던 미르딘이 고개를 들고선 발터를 바라보았다.
“그들에 대한 감시는 확실하게 하고 있겠지?”
“예. 감시역으로 한 명당 서른 정도를 붙여 두고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래. 한순간도 그들에게서 눈을 떼서는 아니 되네. 그들이 비록 다가올 환란에서 이 대륙을 구원할 운명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자들인지라 언제 어디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르니 말일세.”
“걱정 마십시오. 철저하게 감시 중입니다.”
발터의 확답에 미르딘이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재차 지도를 바라보았다.
“이곳이 뚫리면 3군이 에버나스 지방을 벗어나 센피단, 올리오 지방으로 진군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니 필히 이곳에서 그들을 막아야 하네.”
북부는 크게 세 개의 지방으로 분류되는데 최북단의 에버나스 지방을 중심으로 그 아래 각기 센피단과 올리오 지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현재 혁명단은 센피단 지방에서 로마노프 공작가와 연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비록 혁명단의 규모가 크다고는 해도 병력의 질에서 차이가 났기에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최근 올리오 지방에서도 혁명의 불길이 번져 나가 로마노프 공작가에서는 센피단 지방에서 병력을 철수시키고 있는 추세였다.
한데 여기서 3군이 에버나스 지방을 벗어나 센피단 지방으로 진군하게 된다면 혁명단은 3군과 로마노프 공작가라는 두 개의 거대 세력에게 협공을 당하는 형세가 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곳 베른 요새를 비롯한 인근 요새들을 지켜내야만 했다. 자칫하다간 혁명의 불길이 그 빛을 제대로 발하기도 전에 사그라들게 될지도 모르기에 더욱더.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온두라스에서 혁명의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가 왔으니 지금쯤이면 온두라스에서 혁명의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을 겁니다. 그들로서는 거점지인 온두라스를 포기할 수 없을 테니 병력을 나눌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게 나뉜 병력으로는 결코 이곳을 공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것입니다.”
발터의 말에 미르딘이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답했다.
“자네 말대로 일이 계획대로 풀렸으면 좋겠군.”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행하였으니 결과는 오직 신의 뜻이리라.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미르딘이 사색에 잠겼다.
* * *
네 영지를 점거하고 베른 요새까지 진격하는 데 최소 삼 일은 걸릴 것이라는 발터의 예상과는 달리, 발타자르가 이끄는 3군은 그보다 이틀 먼저 베른 요새 인근에 당도해 있었다.
발타자르는 온두라스에서 온 편지를 읽고 있었는데 입가에 미소가 가득한 것이 누구에게 온 것인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아가씨께서 무어라 쓰셨기에 그리 즐거워하십니까?”
가웨인이 묻자 발타자르가 읽고 있던 편지를 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빨리 보고 싶다고 하는군.”
발타자르가 건네준 편지를 읽던 가웨인은 발타자르가 말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 적혀 있자 그가 편지를 잘못 건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지에는 온두라스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으며, 조만간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장군. 편지를 잘못 주신 것 같습니다만.”
가웨인이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제대로 준 것 맞네.”
“온두라스로 돌아가란 말씀이십니까?”
“그렇네. 캐러독과 함께 서둘러 온두라스로 향하게. 사냥개들을 붙여줄 테니 가서 정리하고 있게나.”
“사냥개들을 말입니까?”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무언가 탐탁잖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냥개들이란 야만족 출신 중에서도 흉폭하고 잔혹한 이들만 따로 선별하여 모아둔 부대였다.
캐러독의 맹견들이라고 불리는 그들은 캐러독과 발타자르가 아니라면 통제를 따르지 않기에 3군에서도 유명인사들이었다.
가웨인의 성정과는 잘 맞지 않는 이들이기에 평소에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과 함께 온두라스로 향하라고 하니 꺼림칙한 기색이 역력했다.
“옆에서 캐러독을 잘 통제하게나. 그냥 풀어두었다간 멜리우스 남작령 때처럼 크게 사고를 칠지 모르니까 말이야.”
멜리우스 남작령 공략을 맡은 캐러독은 야전에서 대회전을 걸어온 혁명단 4만의 병력을 문자 그대로 도륙을 해버렸다.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않고서.
물론 혁명단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발타자르가 그의 성정을 알면서도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아 마음껏 날뛴 것이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사고를 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온두라스에서 같은 일을 벌였다간 민심을 크게 잃을 것이 뻔했기에 가웨인을 붙여두려는 것이었다.
캐러독이 말을 듣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가웨인도 속해 있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지금 바로 출발하게.”
* * *
하필로텐 요새 공략을 책임지고 있는 알케넌은 성벽 위에서 날뛰는 이들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성벽 위에서는 죽은 이들이 벌떡 일어나 동료들을 향해 달려들고, 거대한 크기의 골렘들이 성벽을 후려치고, 성벽 위로 혁명단의 병사들을 수송했다.
그 외에도 쌍둥이로 추정되는 거한들이 각기 도끼와 망치를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적의 주력인 기사들을 사방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용사, 용사 하더니 괜히 용사가 아니었네.”
지지부진하던 하필로텐 요새 공략에 용사 넷이 참전하는 순간 요새 공략이 급속도로 진척되고 있었다.
철옹성 같던 성벽 위로 용사들이 진입하는 순간 혁명단의 병사들이 하나둘 뒤따라 오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이르러서는 성벽 위에서 전투가 한창이었다.
이 속도로 보건대 몇 시간 안에 하필로텐 요새를 함락시킬 수 있을 듯싶었다. 알케넌이 흡족한 얼굴로 전투가 한창인 성벽을 바라보는데 그의 등 뒤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알케넌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어깨에 화살을 맞은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말을 몰아 그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털썩-
순식간에 알케넌의 코앞에 도착한 병사가 말 위에서 굴러떨어지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봐, 괜찮나? 무슨 일이기에 이 꼴이야!”
알케넌이 쓰러진 병사를 흔들며 묻자 병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3군이…… 오고 있습니다.”
간신히 제 임무를 완수해낸 병사가 그대로 혼절했다. 알케넌은 병사를 내버려 둔 채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지금 당장 척후대를 보내라! 사소한 것 하나 빠지지 말고 싹 다 보고해! 어서!”
알케넌이 지시를 내리는 순간 그의 귓가에 심장을 울리는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에 알케넌은 척후대를 보내기에 너무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뿌우우─
언덕 아래의 지평선 너머.
검은 물결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요, 용사! 용사들을 불러와라! 지금 당장!”
* * *
혁명단이 하필로텐 요새를 공략 중이라는 첩보를 접한 발타자르는 곧장 군을 이끌고 하필로텐 요새로 향했다.
요새로 향하던 중 혁명단의 인근을 순찰하던 정찰병들을 발견하곤 곧장 사살했지만, 개중에 한 녀석이 운 좋게 살아남아 도망쳤다.
하지만 발타자르는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필로텐 요새는 지척의 거리에 있었고 도망친 녀석이 본대에 이 소식을 전할 때쯤엔 혁명단은 이미 앞뒤로 포위당한 형국이 되어 도망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발타자르의 짐작대로 3군이 하필로텐 요새에 도착했을 때 혁명단은 한창 요새 공략에 열중이었다.
이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타자르가 진격령을 내렸다. 혁명단 측에서도 발타자르의 군대를 막기 위해 요새를 공략 중이던 병력 일부를 돌려 응전에 나섰지만 무의미한 저항일 뿐이었다.
군타낙스 기사단과 기마 무리가 그들의 진영을 휘젓고 이어서 보병들이 밀려들었다.
순식간에 혁명단은 앞뒤로 포위당한 상태가 되어 빠르게 와해 되어 갔다. 이 상황이 지속된다면 얼마 가지 못해 패배할 것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3군과 혁명단이 접전을 벌이던 전장의 한복판에서 싸늘한 주검이 되었던 이들이 되살아나더니 3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시에 쌍둥이 거한들이 나타나 3군의 진영을 휩쓰니 전세가 다시 역전되어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거대한 망치와 도끼를 장난감 다루듯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쌍둥이 거한들도 제법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체들을 일으켜 세우며, 흑마법을 부려 기사들을 견제하는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문제였다.
“……사령군주.”
3군의 후미에서 이를 지켜보던 발타자르는 쌍둥이 거한들과 마법사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쌍둥이 거한들은 수많은 소년과 소녀들을 간살한 음적, 마츠시마 형제였다.
검은 로브의 마법사는 가장 찬란히 빛나는 일곱의 별들.
세븐스타 중 하나이며 흑마법의 정점.
망자의 도시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의 지배자.
사령군주死靈君主 오필리아였다.
회귀 전 마츠시마 형제는 방계라고는 해도 황녀를 겁간하는 만행을 저질러 발타자르의 손에 목이 달아났으며, 오필리아는 북부의 센피단 지방에서 네크로필리아라는 망자의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센피단 지방 일대에 강력한 저주를 걸어 역병 지대로 만들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네크로필리아를 건설하기 위해 그녀가 저지른 만행을 발타자르가 크게 지탄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서 발타자르 공작가의 몰락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최후의 결전에서 연합군의 뒤를 찌른 배신자 중 하나였다.
하나같이 살려둘 가치가 없는 이들이었다.
도원경으로부터 붉은 십자가 혁명단이 용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는데 저들이 혁명단에 몸을 담고 있을 줄이야.
“……죽여야겠군.”
발타자르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손익계산을 끝마쳤다.
3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만 맡고 있을 당시에는 그가 마스터임이 드러날 경우 중앙에서의 간섭과 통제를 피할 길이 없었기에 그동안은 마스터임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북부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는 에버나스 지방을 손에 넣은 현재에 이르러서는 중앙에서도 쉬이 손댈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기에 마스터임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하여 발타자르는 가장 효율적인 상황에서 꺼내 놓기 위한 비장의 한수로 남겨놓고 있었는데 지금 그 비장의 한 수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마스터임을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오필리아의 목숨은 그것을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탓-
순식간에 허공으로 치달은 발타자르가 허리를 비틀며 검을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백색을 띠는 일반적인 오러와는 확연히 다른 존재감을 흩뿌리며 발타자르의 검에서 붉은빛을 발하는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가 솟구쳤다.
오러 블레이드의 색이 점점 선명해지며 핏빛을 띠기 시작하자 발타자르의 검이 휘둘러지며 전장을 강타했다.
꽈아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