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40화
발타자르 군에서 선제 사격을 가해오자 혁명단 측에서도 성벽을 방패 삼아 대응 사격을 개시했다.
양측에서 화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발타자르의 진영에서 일단의 무리가 진영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철갑으로 뒤덮인 군마가 이끄는 수송 마차들이 선두에서 앞장서고, 그 뒤로 기마대가 바짝 뒤쫓았다.
빠르게 내달리는 수송 마차가 이리저리 거칠게 흔들리고, 수송 칸에 병사들 대신 가득 담긴 흙이 마차의 흔들림에 의해 조금씩 흘러내렸다.
“큭- 서둘러 마차를 향해 화살을 쏴라! 말을 노려라!”
발타자르의 노림수를 간파한 틸레난이 해자를 향해 달려오는 수송 마차를 보곤 황급히 소리쳤다.
틸레난의 지시에 혁명단 측의 궁수들이 수송 마차를 이끄는 말을 향해 화살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틸레난의 오판이었다. 차라리 수송 마차의 후미에 따라오는 기마대를 노리는 것이 옳은 판단이었다.
피비빙─
순식간에 족히 수백 발은 넘는 화살들이 달려오는 수송 마차를 이끄는 말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말들이 기사들의 군마에나 씌우는 판금 갑을 두르고 있다는 점과 혁명단 측의 궁수들이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았던 점 등의 요인으로 화살들은 말들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했다.
개중에 눈먼 화살이 판금 갑의 틈새로 파고들어 몇 마리의 말들을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전체를 놓고 보자면 아주 미미한 피해였다.
콰앙─
이윽고 수송 마차가 해자에 고꾸라지며 흙과 수송 마차의 잔해들로 해자를 가득 메웠다. 그러자 이어서 수송 마차의 뒤를 따라오던 기마 무리가 말에 실어 놓은 흙주머니를 성벽 아래로 내던졌다.
“젠장! 놈들이 토성을 쌓고 있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라! 놈들이 성벽 아래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궁수들은 뭐 하는 거야! 어서 기병들을 향해 쏘지 않고!”
다급해진 틸레난이 노호를 터뜨리며 병사들을 다그쳤다. 이에 병사들이 다급히 성벽 아래로 기름과 짚더미들을 쏟아내곤 불을 붙였다.
성벽을 아래에 불길이 일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틸레난의 오판이었다. 성벽 아래에 가지고 온 흙 주머니를 모두 던진 기마대는 제 할 일을 끝마치자마자 유유히 진영으로 복귀했고 파판성의 성벽 아래에는 흙 주머니가 제법 높게 쌓인 채로 불길에 덮여 있었다.
이런 상황이 두어 차례만 더 반복된다면 성벽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제길! 창병과 방패병은 앞으로! 궁수들은 후열에서 사격을 계속한다!”
병사들을 지휘하며 틸레난이 발타자르의 진영을 노려보았다. 양측 모두 병사들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혁명단 측의 지형적 이점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 * *
“이것 참. 생각보다 적의 지휘관이 무능한가 봅니다. 차라리 시작부터 기병들을 견제했다면 이렇게 빨리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가웨인이 성벽과 같은 높이로 쌓아진 흙주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틸레난이 수송 마차를 노린 것이 결정적 패인이었다.
물론 그랬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조금의 시간이라도 더 벌 수 있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틸레난은 수송 마차를 가장 큰 위협이라 느꼈는지 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그것이 몇 차례 반복되자 결국 성벽으로 향하는 길이 열려 버렸다.
“하지만 적의 주력이 북문에 집결했으니 제법 치열한 전투가 되겠군요.”
비록 발타자르의 전술에 의해 북문에 적의 주력을 불러 모으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번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네.”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그의 말이 이어졌다.
“길이 열렸으니 더 이상 시간 끌 것 없이 한 번에 몰아친다. 총공세를 준비하게. 선두는 군타낙스 기사단이 맡는다.”
발타자르의 지시에 가웨인이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길이 열렸으니 기마가 제힘을 모두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깜빡했습니다.”
* * *
뿌우우우─
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발타자르 군이 일제히 진격을 개시했다. 선두에는 풀 플레이트로 무장한 군타낙스 기사단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빠르게 돌진을 감행했다.
그 뒤로 기마대와 보병들이 함성과 함께 지축을 뒤흔들며 돌진하니 흡사 검은 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에 혁명단 측에서는 화살을 쏘아 보내며 발타자르 군의 돌진을 저지하려 시도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군타낙스 기사단의 선두에서 말을 몰아 돌진하는 갤러해드의 바스타드 소드에 선명한 오러가 치솟았다.
이어서 군타낙스 기사들이 일제히 오러를 뿜어내자 그들의 주변으로 오러의 폭풍이 휘몰아치더니 이내 군타낙스 기사단을 휘감았다.
새하얀 빛을 발하며, 돌진하는 군타낙스 기사단을 향해 화살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지만 그들의 몸에 채 닿기도 전에 오러의 폭풍에 휘말려 바스러졌다.
마스터조차 정면 대결을 기피하는 오러의 폭풍을 휘감은 기사단의 돌진이 시작되자 그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충격 대비!”
[충격 대비!]
순식간에 파판 성의 성벽까지 치달은 갤러해드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타낙스 기사단이 성벽에서 방패병을 앞세워 창을 내지르는 혁명단의 병사들과 충돌했다.
꽈아앙─
충돌과 동시에 거친 폭음이 퍼져 나가며 군타낙스 기사단의 앞을 막아섰던 병사들이 방패나 창 따위의 병장기와 함께 폭발하듯 터져 나가 허공 위로 붉은 피를 흩뿌렸다.
“겁먹지 마라! 숫자는 우리가 우세하다! 창병들은 말을 견제하고, 기사들은 창병들 사이에서 기회를 노려 적의 기사들을 쓰러뜨려라!”
순식간에 북문의 우측 성벽에 주둔했던 병력이 무너져 내리자, 틸레난이 겁에 질린 병사들을 추스르며 지시를 내렸다.
일반적인 기병대였다면 충분히 합리적인 판단이었지만 상대는 오러의 폭풍을 휘감은 기사단이었다.
마스터 혹은 그들과 같이 오러의 폭풍을 휘감은 기사단의 돌진이 아니라면 그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군타낙스 기사단이 성벽을 따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질주해 나아가자 성벽 위에 주둔 중이던 혁명단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성벽 아래로 떨어지거나, 기사단의 돌진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며 곤죽이 되어버렸다.
“도, 도망쳐!”
멀리서 아군의 병사들이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 혁명단의 병사들이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황급히 성벽 아래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 머저리들이! 몸을 던져서라도 막아! 이대로 가다가는 다 죽는단 말이다!”
틸레난이 황급히 도망치는 병사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이미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공포에 몸을 맡긴 병사들의 귀에는 그의 외침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다수가 농민들로 구성된 병력이다 보니 사기가 낮았고, 대다수가 혁명단의 기치를 품에 안고 있지도 않으며,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단순히 먹고살기 위하여 혁명단에 가담한 이들이 대다수이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히이이잉─
틸레난이 성벽 아래에서 병장기를 내팽개치며 황급히 도망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분통을 터뜨리는데 문득 그의 귓가에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틸레난이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텅 비어버린 성벽을 올라오고 있는 기마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틸레난과 그의 수하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선 성벽 위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계단을 따라 달려가며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패주하는 혁명단의 병사들을 뒤쫓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하…… 하하…….”
변변한 싸움조차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틸레난이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남문을 제외한 모든 성문과 성벽들이 무너져 내리고, 병사들은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투항하거나 도주하는 것을 택했다.
처음의 자신만만하게 품었던 야망은 오간 데 없고 그저 이것이 모두 꿈이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간절해졌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틸레난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망연자실한 그의 머리맡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자네가 이곳의 지휘관인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틸레난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낯이 익숙한 사내가 있었다. 붉은 십자가 혁명단의 총회의 때 종종 언급되던 인물.
“발타자르 후작…….”
3군 총사령관.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그가 있었다.
* * *
파판 성의 전투는 생각보다 허무한 결말을 맞이했다.
성벽이 낮고, 해자가 얕다는 점도 패인 중 하나였지만 가장 큰 패인은 성벽 위에서 날뛰는 군타낙스 기사단의 돌진을 막지 못한 점이 컸다.
흙주머니로 이루어진 길을 따라 성벽 위로 난입한 군타낙스 기사단은 양 떼 속에 스며든 늑대처럼 거침없이 날뛰었고, 혁명단의 병사들은 고작 500명의 기사를 막지 못해 성벽들이 차례차례 무너져 내렸다.
이후 텅 빈 성벽으로 기마대가 뒤따라 도착하며 성벽 아래에서 패주하는 병사들을 추살하고, 성문을 열어젖히니 사방에서 발타자르 군의 보병대가 물밀 듯 밀고 들어와 혁명단의 병사들 대다수가 항전을 포기하고 투항하거나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제국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전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한 패배였다.
한 가지 우스운 점은 이 전투로 사망한 혁명단 측의 병사들은 1만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사망자의 대다수가 성벽 위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이 아닌 도주하는 와중에 그 뒤를 추격하는 기병대와 남문 인근에서 매복 중이던 트리스탄의 병력에 의해 발생한 것이었다.
그렇게 전투는 허무하게 끝이 났고, 혁명단은 5만의 병사 중 1만이 사망하고 3만이 포로로 잡혔다. 운이 좋아 살아 도망친 이가 1만이 채 되지 않는 처참한 패배였다.
* * *
성벽 위에서 포로로 잡힌 혁명단의 잔당들을 내려다보며 가웨인이 말했다.
“생각보다 허무하네요.”
그러자 창끝에 머리가 내걸린 틸레난의 수급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답했다.
“저들 대다수가 일평생 병장기를 잡아본 적이 없는 이들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지. 게다가 저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너무 무능했네.”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성벽에 등을 기대고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희로서는 천운이었지요. 혁명단이 전부 이런 꼴이라면 이 전쟁은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무시할 수 없네. 제국 역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 민란일세. 혁명단의 대다수가 농민들이라고 해도 그들을 지휘하는 이들까지 농민일 리는 없을 걸세. 지금이야 운이 좋아 무능한 적장을 만난 탓에 손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다음번에도 이러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되네.”
발타자르의 말대로 붉은 십자가 혁명단이 일으킨 이 민란은 북부에 거주하는 농민들 대다수가 가담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규모가 거대했다.
아무리 그들의 무장이 빈약하다고는 해도 그것을 압도할 정도의 병력을 확보하였으며, 지금도 그 숫자가 무시무시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개중에는 이 민란을 기회라 여기고 가담한 몰락 귀족이나 방랑기사들의 숫자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그들의 수뇌인 오스왈드 간다르바는 제국 최고의 아크메이지였다.
이번 전투가 쉽게 끝났다고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도 결국 승리하는 쪽은 제국이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다가올 마신의 강림에 대비하고, 썩을 대로 썩은 제국을 예전의 찬란했던 과거로 되돌리겠다는 기치를 내걸은 혁명단이지만 결국 반란군일 뿐이었다.
심지어 이 민란이 지속될수록 식량 수급에 난항을 겪으며, 그들이 힐난했던 악덕 영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농민들을 약탈하는 행위를 벌이게 되니 조직이 제대로 유지될 리가 없었다.
종내에 그들은 토벌대에게 연패를 거듭하며,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리는 허무한 결말 밖에는 남지 않을 것이었다.
“그보다 저들은 어찌하실 요량이십니까?”
가웨인이 성벽 아래의 포로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온두라스로 보내야지. 안 그래도 인력이 많이 부족했던 차에 잘 되었지.”
“저들을 관리하는데도 적잖은 인력이 투입되어야 할 텐데요?”
“그렇게까지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면 될 문제일세.”
“어떻게 말입니까?”
가웨인이 묻자 발타자르가 답했다.
“우선 저들 중에 책임자를 몇 뽑아 관리를 맡기면서 여러 가지 편의를 봐주는 걸세. 그리고 혹여 저들 중에 불순한 마음을 먹고 있는 이가 나온다면 책임자의 목을 베고 밀고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자에게 책임자의 자리와 큰 포상을 내리면 저들끼리 알아서 서로를 감시할 걸세.”
발타자르의 말에 가웨인이 감탄했다.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들려는 것이군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 * *
이날 3군이 진격을 개시한 지 불과 하루 만에 파판이 함락되었으며, 다음날 멜리우스와 리스펄 남작령 역시 십삼좌의 경고를 무시한 지휘관들이 3군을 상대로 대회전을 벌였고 대패하면서 혁명단과 3군의 첫 전투는 3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