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39화
군세를 일으킨 발타자르는 군을 총 넷으로 나누었다.
1진과 2진에 각기 베디비어 델피앙과 캐러독 모그샤트를 책임자로 두고 2만 5천씩의 병력을 주어 리스펄, 멜리우스 방면으로 진격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온두라스의 수석 행정관인 밀튼에게 1만의 병력을 주어 보급대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타자르 본인은 병력 3만의 3진을 이끌고 파판 영지로 진격해 나아갔다.
총 병력 9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3군이 대대적인 진군을 개시하자, 혁명단은 그에 맞서 세 남작령에 병력을 급파하며 각 영지당 4만에서 5만에 달하는 병력을 주둔시켰다.
단순히 병력의 수만 놓고 보자면 혁명단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3군은 겨울 전쟁을 거치며 단련된 정병이었으며 양질의 무구로 무장한 정예병들인 것에 반해, 혁명단은 숫자만 많을 뿐 병사들의 훈련 상태나 무장의 상태가 상대적으로 부실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타자르의 군대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발타자르의 군은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고 혁명단 측은 성벽을 끼고 수성을 하는 쪽이었다.
병법에 이르기를 공성전을 시도해 보려면 공격하는 측은 수비하는 측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이 필요하며, 최소한 3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다. 그 정도로 공격하는 측이 많은 부담을 안아야 하는 전투가 바로 공성전이었다.
또한, 그렇게 시간과 노력을 들여 3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더라도 병력의 막대한 손실을 각오해야만 했다.
수비하는 측은 이미 준비된 튼튼한 방어 시설을 이용해서 전투를 수행하기 때문에 손해를 덜 입지만, 공격하는 측은 견고한 성벽과 탑, 그리고 해자 등의 방어 시설을 극복하면서 공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공성전은 야전과는 달리 전장 자체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기동력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없었고, 성이나 요새가 이미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공성전은 전술적인 재능보다는 꾸준한 보급으로 아군의 피해를 관리하고 사기를 진작시키며, 적군의 현황을 파악하고 적의 지원군과 보급을 차단하는 등의 행정적인 능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 이것 역시 양측에 막대한 물자를 소모하게 만들어 어떤 이들은 공성전을 돈지랄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보고받은 대로 성벽이 낮고 해자가 깊지 않군요.”
가웨인이 굳게 닫힌 파판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애초에 비프로스트 요새와 그 인근의 산성들을 제외하면 인근의 성들은 공성전을 상정하고 지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여 기본적인 성의 형태는 유지하였지만, 실용성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그래도 쉽지는 않겠는데요?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아요.”
트리스탄의 말에 가웨인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럴 땐 마법사가 없는 것이 무척 아쉽군요.”
마법사만 있었다면 저 낮은 해자를 단숨에 메우고, 성벽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만큼 전장에서 마법사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하는 존재였지만 그러하기에 그들은 모두 중앙의 강력한 통제를 받고 있었다.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는 존재들이니만큼 기사보다 더 위협적이라 판단하였기에 대대로 프락시온 황실에서는 철저하게 마법사들을 관리하였고, 때문에 황실이 주관하는 전쟁이 아니고서야 전장에서 마법사를 보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쉬워하는 가웨인에게 파판성 앞에서 진영을 구축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말했다.
“애당초 부릴 수 없는 이들을 아쉬워해 봐야 무엇하겠는가.”
“어찌하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고립시켜 물자를 소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만. 적의 수가 수이니만큼 물자의 소모도 빠를 테고, 아무리 많은 물자를 비축해 두었다고 해도 그것에는 한계가 있으니 얼마 버티지 못할 텐데요.”
가웨인의 말은 정론이었다.
적들을 성안에 고사시키는 것이 아군의 피해를 줄이면서 가장 효율적으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물론 적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적의 지원군이 도착하여 앞뒤로 포위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지속적인 정찰로 충분히 대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렵게 갈 필요가 있겠는가? 병사들을 시켜 수송 마차에 흙을 가득 채워놓도록 하게. 또한, 기병들에게 흙주머니를 최대한 많이 준비해 두도록 하고.”
“예? 흙은 왜……?”
“성벽이 높고 해자가 깊다면 모를까 저리 낮고 얕으니 최대한 이용해야지 않겠나?”
발타자르는 흙을 가득 실은 수송 마차를 돌진시켜 그대로 해자를 메우게 한 후 기병들로 하여 흙주머니를 성벽 아래에 내던져 길을 만들 생각이었다.
파판 성의 상태가 일반적이었다면 무모한 전술일 수도 있겠지만 성벽이 낮고 해자가 얕은 파판 성이기에 시도해 볼 수 있는 전술이었다.
“아 참. 그리고 남문은 최소한의 경계병만 두고 생로를 열어두게.”
사방에서 숨통을 조여가면 자칫 쥐가 고양이를 무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에 행하는 조치였다.
생로가 없다면 위급한 상황에서 사람은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겠지만 살길이 있다면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것을 본능적으로 택하는 점을 노린 것이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가웨인이 발타자르를 향해 경례를 올리며 그가 지시한 것들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갔다.
“그리고 트리스탄.”
간만에 전쟁다운 전쟁을 하게 돼서인지 잔뜩 들뜬 트리스탄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대장!”
“자네는 발 빠른 이들을 선별하여 남문 인근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패주하는 적들을 추살하게.”
“알겠습니다!”
지시를 끝마친 발타자르가 트리스탄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다시 파판 성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3군을 응시하는 혁명단의 병사들이 보였다.
농민들을 끌어모아 급조한 군대답게 숫자나 지리적 이점을 선점하고서도 사기가 형편이 없었다.
‘밤이 오기 전에 파판 성에 입성할 수 있겠군.’
발타자르가 차가운 시선으로 파판 성의 성벽을 훑어보더니 이내 말을 몰아 언덕을 내려갔다.
* * *
파판 성의 혁명단을 지휘하는 삼십이좌三十二座 틸레난은 몰락 귀족으로 본래는 제도의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전도유망한 기사였다.
하지만 제도 대신에게 뇌물을 적게 바쳤다는 이유로 그의 아버지가 좌천되면서 그의 가문은 몰락하였고, 부모님은 그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이후 틸레난은 방랑기사가 되어 북부를 전전하였는데 도적 떼에게 습격을 당한 마을을 도와주던 중에 오스왈드 간다르바를 만나게 되었다.
제국 최고의 아크메이지이자 현자로 불리는 그는 손짓 한 번으로 수백에 달하던 도적 떼를 일거에 쓸어버리는 이적을 보여주었다.
이후 틸레난은 다가올 환란을 대비하기 위해 썩어빠진 중앙을 개혁하겠다는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그의 검이 되기를 자처하니 오스왈드를 보필하는 삼십육좌三十六座 중 하나가 되어 삼십이좌의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혁명에 앞장서며 스스로의 용맹함을 증명하더니 결국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던 파판 영주 일가를 모두 축출하고 성을 점령하였다.
“무시무시하군.”
틸레난은 성벽 너머로 보이는 3군의 위용에 혀를 내둘렀다. 허름한 천 옷과 부실한 무구로 무장한 혁명단의 병사들과는 달리 3군의 병사들은 전원 흑색의 철갑과 질 좋은 무구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십삼 좌의 말씀대로 숫자만 믿고 정면 대결을 고집했다가는 필패를 면치 못했겠어.”
십삼좌는 에버나스 지방을 책임지는 혁명단 내에서도 고위 인사로 지략과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3군 총사령관 알레한드로 발타자르가 다스리는 온두라스를 치기 위해 병력을 준비 중이던 틸레난은 발타자르가 선공을 취해 왔다는 소식에 밀정을 급파하여 그들의 병력 규모를 염탐하였다.
이후 총원 9만에 달하는 대군 중 3만을 이끌고 이곳 파판으로 향했다는 첩보를 접한 틸레난은 그가 이끄는 병력의 수가 발타자르의 군대보다 월등히 많은 2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만만해하며 미리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여 발타자르와 전면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그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십삼좌가 이를 제지하였다.
결코 발타자르의 군대와 전면전을 벌여선 안 된다는 엄명에 틸레난은 불만스럽기가 그지없었으나 기사도 정신이 뼛속까지 스며 있는 그로서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수성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막상 발타자르의 군대를 눈앞에 목도하니 십삼좌의 말에 따르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삼십이좌님. 모든 준비가 끝났습니다.”
성벽마다 병력을 배치하기 위해 떠났던 수하가 돌아와 틸레난에게 보고했다.
“물자는 넉넉하겠지?”
틸레난의 물음에 수하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농성을 한다고 해도 10일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되었다. 십삼좌께서 사흘 내로 지원군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으니 우린 이곳을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틸레난의 눈앞에는 벌써부터 십삼좌가 보낸 지원군과 파판 성에서 주둔 중인 병력들이 발타자르의 군을 포위하여 그들을 몰아치는 장면이 생생하게 재연되었다.
‘북부의 영웅인 발타자르 후작을 쓰러뜨림으로써 나는 또 한발 앞으로 나아가 북부 전체에 이름을 떨치리라.’
공명심에 타오르던 틸레난에게 수하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한데 남문에서 조금 수상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혹시나 발타자르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틸레난이 다급히 물었다.
“남문에서? 어서 말해 보거라.”
“예. 그것이 현재 적들이 남문에 주둔시켰던 병력을 물리고 있었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틸레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군에 비해 병력의 수가 적으니 세 방면의 공략에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이로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병력을 넉넉히 주둔시키고 나머지는 대기 병력으로 두어 언제든 전황이 불리해지는 곳에 투입 시킬 수 있도록 준비시켜 두거라.”
“알겠습니다.”
수하가 틸레반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떠나가자 틸레반이 재차 발타자르 군의 진영을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북부의 영웅이라고 해도 수적 열세와 지형의 불리함을 극복하기는 힘들 테지.”
틸레반의 자신만만한 눈동자가 발타자르의 진영을 휩쓸었다.
* * *
둥- 둥- 둥-
혁명단과 발타자르 군이 적막 속에서 대치하는 가운데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적막을 깨뜨렸다. 심장을 절로 격앙시키는 북소리와 함께 병사들의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진영의 중심에서 파판의 성벽을 바라보던 발타자르에게 가웨인이 다가와 보고했다.
“장군.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말하는 그의 몸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는데 보다 빠르게 발타자르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가웨인 역시 흙을 나르는 일에 동참했던 것으로 보였다.
“궁수들이 견제 사격을 시작하면 일제히 출발시키게.”
“알겠습니다.”
가웨인의 대답에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 중이던 장교 하나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궁수대. 사격 준비이이─!”
장교의 외침에 기수들이 힘차게 깃발을 흔들었다.
깃발이 이리저리 나부끼며 선두에서 대기 중이던 장교의 시선을 사로잡기가 무섭게 전장 곳곳에서 장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궁수대 사격 준비이이─!]
화살이 일제히 활시위에 장전되며 활시위가 끊어져라 뒤로 당겨졌다.
휙-
이윽고 수송 마차와 기병들이 준비를 끝마치자 들어 올렸던 발타자르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져 내렸다.
“발사!”
[사격 개시이이─!]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 보내고, 화살이 하늘을 뒤덮더니 이내 소나기처럼 파판 성벽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뿌우우우─
“진격! 진격하라아─!”
동시에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흙을 가득 실은 수송 마차와 말에 모래주머니를 가득 매단 기마대가 파판 성을 향해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발타자르군의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전쟁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