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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37화 (37/183)

공작이 회귀함 37화

발타자르가 애슐리와 함께 이슈카의 거처로 향하던 중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나타났다. 이슈카의 수족인 세뮨타 백작이었다.

“후작 각하.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기사들을 이끌고 공작가를 활보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세뮨타 백작의 물음에 발타자르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타낙스 기사 하나가 수급 하나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별채를 습격했던 암살자들의 수급 중 하나였다. 군타낙스 기사에게서 수급을 건네받은 발타자르가 세뮨타 백작의 발 앞에 수급을 던졌다.

세뮨타 백작은 한동안 말없이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암살자의 수급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모르는가?”

발타자르가 세뮨타 백작을 지그시 바라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모르겠군요. 처음 보는 자입니다. 혹 후작 각하께서 공작가에 난입하신 것과 이자가 연관되어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연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세뮨타 백작은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이자는 방금 전에 내가 머물던 별채를 습격한 암살자 중 하나라네.”

발타자르의 말에 세뮨타 백작이 끄응- 하고 신음성을 토해내었다. 그제야 발타자르가 무슨 이유로 공작가에 난입한 것인지 알아차린 세뮨타 백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니, 이슈카 공자님은 모르는 일입니다.”

세뮨타 백작의 말에 애슐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건가요? 내성의 경비를 책임지는 것은 이슈카 오라버니와 빌로스 오라버니세요. 한둘도 아니고 수백에 달하는 암살자들이 후작 각하를 노리고 암습을 가했는데 몰랐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가요?”

애슐리의 말에 세뮨타 백작은 순간 ‘당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떤 식으로든 문책을 피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상황이 정확히 어찌 돌아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세뮨타 백작이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모른다고 잡아떼는 것뿐이었다.

“정말 저희 측에선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내성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암살자들이 후작 각하의 암습을 시도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만. 저희는 수비대장으로부터 어떠한 보고도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그거야 이슈카 오라버니와 얘기해 보면 될 일이지요.”

발타자르는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웨즈가 이번 암습을 감행하였고 그 뒤에 이슈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가만히 돌아가는 상황들을 바라보니 애슐리가 무척 미심쩍어지기 시작했다.

돌이켜 보면 웨즈와 이슈카의 밀회를 목격하여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해 황급히 수하들을 이끌고 온 것치고는 타이밍이 무척 절묘했다.

그 이후로도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애슐리의 사람들이 길을 열어주는 점도 그렇고 수상쩍은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일단 그냥 지켜봐야겠군.’

만약 그녀가 이 일의 진짜 배후라고 해도 발타자르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일로 발타자르는 그에게 위협이 될 이슈카를 실각시킬 수 있으며, 온두라스를 비롯한 인근의 영지 여럿의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었다.

또한, 그 외에도 여러 자잘한 이권들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일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지 발타자르에게는 이득이었다.

“세뮨타 백작.”

두 사람의 언쟁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발타자르가 세뮨타 백작을 불렀다.

“예, 후작 각하. 말씀하시지요.”

“시간을 끄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할 테니 이만 이슈카 공자에게 안내하게.”

발타자르의 말에 세뮨타 백작은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음을 직감하곤 발타자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내하겠습니다.”

* * *

세뮨타 백작의 안내로 이슈카의 거처에 도착한 발타자르는 거처의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단의 무리와 마주쳤다.

완전 무장을 한 기사들과 병사들 수백이 거처의 앞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북부에서 이름을 떨치는 유명한 기사들도 더러 보였다.

그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수하를 불러모았구나 싶었다.

“갤러해드. 자네는…… 응?”

갤러해드에게 지시를 내리려던 발타자르는 호승심이 끓어오르는지 갤러해드가 손을 달싹거리는 것을 보곤 피식 웃었다. 아마 트리스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 테지.

“주군?”

발타자르가 말을 하다 말고 피식 웃고만 있자 갤러해드가 발타자르를 불렀다.

“아, 미안하군. 잠시 딴생각이 들어서 말일세. 자네는 군타낙스 기사들과 함께 이곳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게. 애슐리 공녀도 수하들을 대기 시키도록 하고. 세뮨타 백작 자네도 사람들을 물리게.”

발타자르의 말에 애슐리가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제 수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들 들으셨죠?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애슐리가 수하들을 물리자 세뮨타 백작 역시 한숨과 함께 손짓하며 거처를 지키던 수하들을 물렸다.

“물러나거라.”

이윽고 세 세력이 이슈카의 거처 앞에 나뉘어 정렬하자 발타자르가 말했다.

“자, 여기는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들어가세.”

발타자르가 애슐리, 세뮨타 백작과 함께 이슈카의 거처로 들어갔다.

* * *

발타자르를 비롯한 두 사람이 이슈카의 거처에 들어서자 회의용 테이블의 상석에 앉아 있던 이슈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후작 각하.”

그는 무척이나 지친 얼굴이었다.

눈 밑에 그늘이 져 있고,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발타자르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이슈카가 서 있는 상석으로 향했고, 이슈카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자, 다들 앉게.”

마치 제자리인 양 자연스레 상석에 앉은 발타자르가 말하자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타자르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애슐리가, 우측에는 이슈카와 세뮨타 백작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발타자르가 이슈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대충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네.”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시작부터 이슈카가 항복을 선언했다.

현재 상황에서 무어라 말한들 그에게 한없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른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면 시작하기로 하세.”

발타자르의 말에 그가 언급한 ‘다른 손님들’이 누구인지 짐작한 이슈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애슐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법이구나.”

“어머, 무엇을 말인가요?”

이슈카의 말에 애슐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이슈카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언제부터였느냐.”

“저는 오라버니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언제부터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두 사람의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자 발타자르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똑똑- 하고 두드리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남매간의 우애는 일이 끝난 후에 나누어도 되지 않겠소? 그보다 손님들이 도착한 것 같은데.”

발타자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열리며 빌로스와 웨즈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야밤에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빌로스가 성큼성큼 걸어와 애슐리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슈카는 빌로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웨즈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웨즈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슈카의 눈치를 보며 빌로스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것을 보니 이번 일은 이슈카도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자자. 손님들은 모두 도착한 것 같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세.”

발타자르가 손뼉을 짝짝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툭 터놓고 말하겠네. 지금 난 별로 기분이 좋지 못하네. 내 동생을 빌미로 로마노프 공작가에 초대한 일부터 시작하여 야밤의 암습까지. 하나같이 불쾌한 일들뿐이었네.”

이슈카의 거처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발타자르는 곧장 이슈카를 실각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애슐리에 대한 의심이 커져만 가자 이슈카를 실각시키는 것보단 이득만 취하고 발을 빼기로 결정했다.

애슐리와 웨즈, 그리고 빌로스의 삼파전이 벌어질 경우보다는, 여기 있는 네 사람이 서로 물고 물리는 치열한 싸움을 유도하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자, 제시해 보게. 자네들이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발타자르의 말에 애슐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는가?”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슐리가 떨떠름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부채로 제 얼굴을 가렸는데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와는 상반되게 이슈카는 발타자르가 입을 열 때만 해도 긴장하던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말이 끝나자 안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각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가 간신히 살길이 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우선 후작 각하께서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한 점에 대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각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연회장에서 했던 제안에 더해서 온두라스 인근의 다섯 영지와 도튼 철광의 소유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이슈카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지도에서 자신이 내어줄 영지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가리켰다. 하나같이 발타자르의 세력권 인근의 영지들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슈카는 그의 세력권에 있는 영지들을 포기할 생각인 것 같았다.

“제법 후한 조건이군그래.”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애슐리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다.

“비록 내성의 경비를 책임지는 것은 오라버니 두 분이시지만 로마노프 공작가의 일원으로서 저도 책임이 없지는 않으니 이곳 두 영지와 에버윈 상단을 내어드릴게요.”

에버윈 상단이라면 로마노프 공작가가 보유한 세 개의 거대 상단 중 하나였다. 그녀가 내어주려는 두 영지는 제쳐놓고서라도 에버윈 상단을 내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막심한 손실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어떻게든 발타자르의 마음을 돌려야만 했다.

만약 이대로 일이 어영부영 마무리된다면 이슈카의 분노를 피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좋군. 하나같이 좋은 제안들뿐이니 고민되는군.”

말하며 발타자르가 슬쩍 빌로스를 바라보았다.

빌로스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가장 발타자르를 혹하게 만들 만한 제안을 하는 이가 가장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기병 2천과 보병 5천. 그리고 이곳 다섯 요새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빌로스가 가리키는 다섯 요새는 3군이 무너지는 만약의 상황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하여 지어진 요새들이었다. 또한, 3군이 주둔 중인 곳에서 북부의 내륙지방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빌로스의 제안에 이슈카가 황급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슈카나 애슐리의 제안이 발타자르의 세력을 키워주는 일이기는 했지만 이건 숫제 발타자르에게 칼자루를 쥐여주는 격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만약 발타자르가 다른 마음을 품고 북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운다면 그저 눈뜨고 그의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이 미친놈이……!’

하지만 이슈카는 빌로스를 말리지 못했다.

지금 당장은 제 목이 간당간당한 상황이니 복장이 터지기는 하지만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웨즈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황급히 말을 꺼냈다.

“저, 저는! 후작 각하가 승작하실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겠습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제도에 저와 친분 있는 대신분들이 많으십니다.”

앞선 제안들에 비해 실속이 없는 제안이었다. 솔직히 들을 가치도 없었다. 하지만 웨즈의 제안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발타자르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자 웨즈는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발타자르에게 내어줄 만한 것들을 생각하다 적당한 것을 떠올리곤 말했다.

“본래는 제도에 진상할 물건이었습니다만, 엘프족 노예 둘을 드리겠습니다. 후작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엘프족은 그 미색이 무척이나 아름답고 구하기도 힘든 것들이라 탐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잡아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손을 대지 않았으니 후작 각하의 입맛에 맞게…….”

더 들어볼 가치도 없었다.

발타자르가 손을 들어 올리며 주저리주저리 떠벌리는 웨즈를 제지했다.

“알겠네. 일단 고민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으니 잠시만 조용히 해주게.”

정말 큰마음을 먹고 한 제안임에도 발타자르가 썩 내켜 하는 것 같지 않자 웨즈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 암살자! 제가 따로 키우던 암살자들이 있사온데 그들을 드리겠습니다.”

이건 숫제 자신이 이번 암습의 범인이라고 실토하는 꼴이었다. 애슐리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멍청한 줄은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안 그래도 발타자르가 생각과는 다른 행보를 보여 골치가 아픈 차에 웨즈의 이 발언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었다.

“암살자라?”

발타자르가 흥미를 보이자 웨즈가 신이 나서 말했다.

“예! 아주 쓸 만한 놈들입니다. 제게 놈들을 통제할 수 있는 통제장치가 있는데 이것만 있다면 각하께서 원하실 때 언제든 목표를 소리 없이 제거할 수 있습니다. 각하께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낼 놈들이니 밑에 두고 쓰시면 무척 만족하실 겁니다.”

“그렇군.”

발타자르가 씨익 웃으며 네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의 말 한마디에 오늘 밤 로마노프 공작가의 후계 구도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이니, 다들 긴장감이 역력한 기색으로 발타자르를 주목했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이걸 어찌한다. 제안들이 하나같이 매력적이라 어느 하나를 택하기가 어려운데…….”

툭툭-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던 발타자르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지금 한 제안들을 모두 내게 주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아 참. 웨즈 공자가 제안한 승작 건은 필요 없네.”

이건 숫제 날강도나 다름이 없었다.

이들이 한 제안들은 하나같이 큰 손실을 감수하고 한 제안들인데 그것을 그냥 날로 먹겠다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네 사람이 한동안 말이 없자 발타자르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곤 말했다.

“뭐…… 싫다면야 이 자리에 누구 하나는 필히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겠지.”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합심하여 발타자르의 제안을 거부한다면 모를까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뜻 나서서 발타자르의 제안을 거절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말이 없자 발타자르가 테이블 한편에 놓여 있던 종이 뭉치를 테이블의 중심에 툭 던지며 말했다.

“고맙게도 다들 내게 큰 선물을 안겨주는 것에 이견이 없는 듯하니 각자 제안한 것들을 작성하고 수결하게.”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 중 가장 유력한 후보자들은 말없이 종이 뭉치를 바라보았다. 거절하자니 뒷일이 걱정되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자니 이건 정말 미친 짓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진퇴양난이었다.

“딱 십 분 주겠네.”

네 사람이 갈등하는 기색을 내비치자 발타자르가 시간제한을 선언했다. 그러자 하나둘 종이 뭉치에서 종이를 한 장씩 들고 가더니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 선택으로 로마노프 공작가가 본격적으로 발타자르를 견제하려고 들 것이 분명했지만 상관없었다.

이번 일로 빌로스를 제외하면 서로 간에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니 여태까지와는 전혀 성질이 다른 아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발타자르가 세력을 키워 나간다고 해도 거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설령 만에 하나의 경우로 로마노프 공작가가 서로 합심하여 발타자르를 견제하려고 해도 북부를 휩쓸고 있는 민란이 발타자르의 방패가 되어줄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큰 선물을 무더기로 품에 안게 된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그렇게 길고도 길었던 밤이 지나가고, 날이 밝아왔을 때 발타자르는 일행들을 이끌고 부모님의 묘를 들른 후에 온두라스로 돌아갔다.

아이린이 발타자르와의 나들이가 취소되자 무척 아쉬워했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실로 유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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