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36화
사실 이번 암살자들의 습격만 가지고선 웨즈를 실각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그가 이 일을 사주했다는 확증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3군 총사령관을 그것도 로마노프 공작가에서 초대한 손님이 야밤에 암습을 당했다는 것은 큰 문제였다.
당장 3군을 움직여 로마노프 공작을 친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을 벌였다간 로마노프 공작가 역시 마냥 손 놓고 당하지는 않을 것이고 전쟁이 확산된다면 제도의 대신들이 이 일에 개입할 명분을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3군을 움직이는 것은 하책중의 하책이었다.
때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리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성에 주둔중인 병사들은 이슈카가, 기사들은 빌로스가 각기 나누어 지휘권을 장악 중이었다.
그 말인즉슨 이번 암습을 웨즈가 사주한 일이라고 해도 그 책임을 이슈카와 빌로스에게 물을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로마노프 공작가의 코앞에서 그들이 초대한 손님이 그것도 3군의 총사령관이 암살자들의 대대적인 습격을 받았다.
이것은 분명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고 그 책임을 질 사람은 내성의 경비를 책임지는 이들이었다.
따라서 내성의 경비를 책임을 지고 있는 이슈카와 빌로스 중에서 한 사람은 필히 이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여기서 발타자르의 입맛대로 책임을 물을 자를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선택이었다. 무조건 이슈카를 실각시켜야 했다.
‘이슈카는 웨즈를 이용해 날 제거하거나 혹은 그를 제거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이 일로 웨즈를 압박해 들어간다면 겉으로는 내 편을 들어주며 웨즈를 실각시키려 들 테지만 뒤로는 온두라스의 일과 웨즈의 일을 거론하며 나를 경계해야 한다는 여론을 키워나갔겠지.’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발타자르의 가정으로 이번 일과 이슈카가 전혀 관계가 없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슈카의 입장에선 억울할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 일을 빌미로 이슈카를 실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니 발타자르가 할 일은 이 기회를 살려 이슈카를 실각시키는 일이었다.
‘이슈카가 실각되면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은 가속화될 것이 뻔하다. 겉으로야 빌로스가 차기 공작 후보로 확실시 여겨지겠지만 그가 공작위에 오른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애슐리나 웨즈 같은 이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을 테지.’
괜히 애슐리가 발타자르와 자신을 엮으려고 드는 것이 아니었다. 발타자르를 그녀의 파벌로 끌어들이려는 의도 이전에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제 목숨을 부지할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일로 이슈카를 압박한다면 이슈카는 웨즈를 제물로 삼아 빠져나가려 할 테고 웨즈 역시 살기 위해 이슈카를 향해 이를 드러낼 테지.’
그렇게 된다면 이슈카는 어쩔 수 없이 약점을 드러낼 테고, 약점을 드러낸 이슈카를 물어뜯기 위해 다른 이들 역시 이슈카를 맹렬히 비난하며 그의 실각을 노릴 것이었다.
따라서 이 일로 발타자르에게 가장 위협이 될 이슈카를 실각시키고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을 본격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공작가의 내전과 붉은 십자가 혁명단의 봉기로 북부가 한참 혼란스러워질 때 발타자르의 세력을 크게 키울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이다.
“가웨인.”
“예. 장군.”
“군타낙스 기사 스물을 붙여주겠네. 기사들과 함께 이곳에 남아 린과 신시아를 지키고 있게. 그리고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자네 판단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가웨인에게 지시를 내린 발타자르가 갤러해드를 바라보았다.
“갤러해드. 자네는 나와 함께 로마노프 공작가로 향해야 하니 지금 즉시 군타낙스 기사단을 소집하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갤러해드가 별채 주변에 흩어져 경비를 서고 있는 군타낙스 기사단을 소집하기 위해 떠나가자 발타자르가 애슐리 공녀에게 말했다.
“공녀. 안내를 부탁해도 되겠소?”
발타자르의 말에 애슐리 공녀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물론이지요.”
* * *
“아우. 어제 렉시벨이랑 종일 뒹굴었더니 허리가 다 뻐근하네.”
내성의 중심에 위치한 로마노프 공작가의 입구를 지키던 병사 하나가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옆의 동료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렉시벨이라면 저기 온두라스의 아비게일에 비견되는 색녀 아닌가! 어찌 자네가 그 콧대 높은 그녀와…….”
동료의 물음에 허리를 두드리던 병사가 씨익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흐흐. 어느 여자든 내 물건을 본다면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지.”
“자세히 좀 말해보게.”
“흐음. 오늘따라 목이 마른데…….”
“아. 알겠네. 퇴근하고 내가 술 한잔 크게 살 테니 어서. 어서 말해주게.”
“약속한 걸세? 사실 어제 창관에서 렉시벨과 한번 하려는데 고것이 자꾸 빼지 뭔가. 그래서 내가 바지춤을 쫙 내리고 내 물건을 보여줬지. 어떠냐. ‘이래도 네가 나랑 안 하고 버틸 수 있겠냐.’하고 말이야. 그랬더니 고것이 단박에 눈이 돌아가선 방으로 날 끌고 가지 뭔가.”
“그, 그래서?”
“그래서…… 응? 저게 뭐지?”
어젯밤 렉시벨과 질펀한 하루를 보낸 것을 마치 무용담처럼 신나게 이야기하던 병사가 어둠 사이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왜 이야기를 하다 마는가!”
잔뜩 흥분해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동료 병사가 화를 내자 무용담을 늘어놓던 병사가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저, 저기 보게.”
“대체 뭔데 그렇게…… 억!”
그제야 다가오는 무리들을 발견한 병사가 황급히 소리쳤다.
“비상! 비상!”
땡땡땡- 하고 요란하게 종소리가 울리며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과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갑작스레 울려 퍼진 비상종 소리에 휴게실에서 쉬고 있다가 헐레벌떡 뛰어나온 경비대장이 공작가를 향해 다가오는 무리를 발견하곤 소리쳤다.
“정지! 정지!”
경비대장의 외침에도 일단의 무리는 멈추는 기색 없이 천천히 공작가를 향해 다가왔다. 이윽고 그들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경비대장은 선두에 선 이들을 알아보곤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후작 각하! 애슐리 공녀님!”
허리를 숙이고 있는 경비대장에게 애슐리가 웃어 보이며 말했다.
“고생이 많으세요. 안에 볼일이 있으니 문 좀 열어주시겠어요?”
애슐리의 말에 경비대장이 숙였던 허리를 펴며 물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두 분께서 어찌…….”
경비대장의 물음에 애슐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이 생겨서 급히 이슈카 오라버니를 뵈어야 하니 어서 문을 여세요.”
그 살벌한 기세에 경비대장이 몸을 움찔거리며 답했다.
“문을 여는 것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원칙대로 뒤에 무장하신 분들은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경비대장의 대답에 애슐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챙챙-
그러자 몇몇 기사들과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경비대장을 비롯한 동료들의 목에 검을 겨누었다. 애슐리 공녀가 생긋- 웃으며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이만 문을 열어주시겠어요?”
* * *
손쉽게 로마노프 공작가의 정문을 통과하자 발타자르는 애슐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이슈카 오라버니나 빌로스 오라버니처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저도 따르는 이들이 제법 된답니다.”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애슐리 공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일이 이렇게 진행될 것을 미리 알고 준비해 놓은 것처럼 외부의 세력이 무장한 채로 공작가의 내부를 활보하고 다녀도 막아서는 이들이 없었다.
정확히는 막아서는 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애슐리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들을 견제하며 길을 열어 주었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될수록 발타자르는 점점 그녀가 탐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이성적인 욕심이 아닌 인재욕이었다.
‘신시아가 성장할 때까지 대체할 만한 인물로 제격이긴 한데…….’
물론 신시아는 지금도 충분히 잘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전성기 시절의 그녀와 비교한다면 부족한 점이 많은 것도 사실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애슐리라면 신시아에게 좋은 스승이 되어줌은 물론이고 그녀가 성장할 때까지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인재였다.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북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발타자르에게 인재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속내가 검은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이 단점을 감수할 정도로 매력적인 인재임은 분명했다. 로마노프 공작가가 몰락한 이후에도 속이 검은 이들이 득실거리는 제도 사교회에서 여왕으로 군림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뭐.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나중에 기회를 봐서 접근해 봐야겠군.’
후에 로마노프 공작가가 몰락한다면 그때 애슐리에게 자신의 아래로 들어올 것을 권유해 보기로 결심하곤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이슈카의 거처로 향했다.
* * *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도 모른 채 이슈카는 그의 수족인 세뮨타 백작과 함께 민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 리스펄, 파판, 멜리우스 이 세 남작령은 진즉에 함락 되었단 말이지?”
“예. 또한 그 인근의 영지들도 길어야 사흘 내로 함락될 것 같았습니다.”
세뮨타 백작의 대답에 이슈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민란의 규모가 너무 컸다.
그동안 민란의 조짐이 줄곧 보이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한두 군데 영지에서 일어나겠거니 하며 내심 무시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그것이 실수였다. 설마 북부 전역에서 민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줄이야.
“일단 빼앗긴 세 남작령은 발타자르 후작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문제없을 테고 진짜 문제는 이곳인데…….”
이슈카가 한숨과 함께 푸른색의 장기말과 붉은색의 장기말이 뒤엉킨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은 푸른색의 장기말 하나가 붉은색의 장기말에게 포위된 모습이었는데 그곳은 발타자르 후작을 포함하여 북부에 단 셋뿐인 후작 중 하나인 이슈카의 장인이며, 그의 강력한 지지자.
듀락 후작의 영지였다.
북부를 대표하는 강력한 무가이기에 그리 쉽게 함락되지는 않겠지만 적의 수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인근 영지에서도 민란이 일어난 통에 지원도 쉽지가 않았다.
“골치 아프군.”
이대로 듀락 후작을 내버려 둔다면 그의 세력이 크게 위축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리를 해가며 듀락 후작가를 지원하자니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이슈카의 세력을 크게 위축시키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나.”
내키지는 않지만 발타자르 후작에게 좀 더 이권을 내어주고 그의 도움을 얻어 듀락 후작가를 구하는 수밖에 없었다.
온두라스에 이어 인근의 세 남작령.
그리고 듀락 후작가를 구원해 주는 대가를 받아 급 성장할 발타자르 후작의 세력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달리 수가 없었다.
벌컥-
이슈카가 발타자르의 손을 빌리기로 결정을 내린 그때. 기사 하나가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히며 난입했다.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이리 호들갑이냐.”
세뮨타 백작이 기사를 타박하였지만, 기사는 세뮨타 백작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다급하게 이슈카에게 보고했다.
“바, 발타자르 후작이 군타낙스 기사단을 이끌고 지금 이리로 향하고 있는 중입니다!”
“뭐라!”
이슈카와 세뮨타 백작이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 시각에 발타자르 후작이 왜!”
이슈카의 호통에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 애슐리 공녀님과 함께 이동 중인 것까지만 확인하고 오는 길이기에…….”
이슈카는 순간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설마. 웨즈 이 빌어먹을 놈이……!”
연회가 끝이 나고 따로 불러 발타자르 후작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그리 타일렀건만 웨즈가 결국 일을 벌인 듯했다.
“세뮨타 백작. 자네는 지금 바로 발타자르 후작에게로 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게. 그리고 너는 서둘러 병사들과 기사들을 소집하거라.”
이슈카의 지시에 세뮨타 백작과 기사가 짧게 대답하곤 황급히 방안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이 방을 빠져나가고 이슈카는 자리에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