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35화
“오라버니!”
별채로 돌아오자 정원에서 가웨인과 함께 발타자르를 기다리던 아이린이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서 한달음에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너무 서두른 탓인지 돌부리에 발이 걸렸고 아이린의 몸이 앞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땅바닥에 넘어지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녀가 넘어지려는 기미가 보이자마자 재빠르게 다가온 발타자르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기 때문이었다.
“위험하잖니.”
아이린을 품에 안아 든 발타자르가 그녀를 꾸짖자 아이린이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곤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그치만 너무 기쁜걸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린은 미처 보지 못했겠지만, 발타자르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기뻤길래 그러니.”
하고 내심 기대감을 가지고 묻자 아이린이 발타자르의 목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약속대로 일찍 돌아오셨잖아요. 그래서 너무 기뻐서 그랬어요.”
발타자르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찌도 이리 사랑스러운지.
발타자르가 아이린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그래도 다음부턴 조심하려무나. 크게 다칠뻔하지 않았니.”
다정한 발타자르의 목소리에 아이린이 그의 목에서 얼굴을 떼곤 배시시 웃었다.
“네, 조심할게요.”
발타자르가 그런 아이린의 뺨을 토닥여 주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니?”
“아니요. 오라버니 오시면 같이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어요.”
“많이 배고프겠구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자네들도 함께 식사하세나.”
발타자르가 아이린을 안아 든 채로 일행들과 함께 별채로 향했다.
* * *
실로 오랜만에 아이린과 함께 하는 저녁 시간은 발타자르에게 무척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대화 내용 자체야 소소한 일상 이야기들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이린이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주로 대화하는 쪽은 아이린과 신시아였지만 그저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즐거웠던 식사 시간이 끝이 나고 아이린이 잠에 드는 것까지 확인한 발타자르는 가웨인, 갤러해드와 함께 정원으로 나가 조촐한 술자리를 벌였다.
“간만에 아가씨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으시니 보기 좋더군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가웨인이 말했다.
“장군께서도 무척 즐거워 보이셨고요. 보기 좋더군요.”
가웨인의 말에 발타자르가 쓰게 웃으며 술잔을 단박에 비워내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조금만 더 빨리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가졌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갤러해드가 가웨인에게 물었다.
“한데. 가웨인 경께선 주군을 장군이라고 호칭하시던데 왜 그리 부르시는 겁니까?”
갤러해드의 질문에 발타자르와 가웨인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게 그렇게 궁금했던가?”
하고 발타자르가 묻자 갤러해드는 멋쩍은 표정으로 제 뒤통수만 긁적였다. 그 순박한 모습에 발타자르가 좀 더 큰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가웨인과 나는 오랜 지기라네. 함께한 세월이 10년 정도 되었을 걸세. 가웨인이 나를 장군이라 호칭하는 것은 첫 만남 때 내가 그리 불러 달라 요청했기 때문이라네.”
“한참 치기 어릴 때였죠.”
발타자르가 빈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믿기진 않겠지만 첫 만남 당시에 가웨인은 한참 이상한 망상에 빠져 있었지.”
발타자르가 옛이야기를 꺼낼 기미를 보이자 가웨인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거 저희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가웨인의 표정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발타자르는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옛 추억을 떠올려 보았다.
[전 제국 최강의 기사가 될 겁니다!]
발타자르와의 첫 만남 당시 가웨인은 발타자르에게 그리 말했다. 자기소개도, 인사말도 아닌 자신의 꿈을 외치는 가웨인에게 발타자르가 물었다.
[왜 최강의 기사가 되고 싶은데?]
[올리비에가 최강의 기사와 결혼하겠다고 말했거든요!]
올리비에는 딜런 백작가의 영애로 당시 제도에서 미모로 명성이 자자하던 미인이었다. 그리고 발타자르와 가웨인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발타자르는 자신이 남몰래 사모하던 올리비에를 가웨인 역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곤 치기 어린 마음에 소리쳤다.
[그래? 그러면 나는 제국 최고의 장군이 될 테다! 그리고 올리비에와 혼인할 거야!]
[흥! 올리비에와 결혼하는 것은 저예요!]
[아니야! 나거든?]
최고의 기사와 최고의 장군.
두 사람은 올리비에를 사이에 두고 누가 먼저 꿈을 이루는가에 대해 서로 경쟁하며 성장해 갔다. 계기는 조금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두 사람은 꿈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뭐. 중간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다 보니 발타자르는 그냥 꿈으로 남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 뒤로 가웨인은 날 부를 때 장군이라 칭하게 되었고. 나는 가웨인을 가웨인 경이라고 칭하곤 했었지. 그게 굳어져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고 말이야.”
발타자르의 이야기를 술안주 삼아 술을 마시던 갤러해드가 물었다.
“그래서 그 올리비에란 분은 어찌 되셨습니까?”
그의 질문에 막 술잔을 들어 올리던 두 사람이 몸을 멈칫거렸다. 그러곤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느 돈 많은 부잣집 도련님에게 시집을 가버렸지요.”
“결국 돈이었지.”
두 사내가 축 처진 어깨로 술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곤 갤러해드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발타자르는 그답지 않게 감정을 쉽게 내비쳤다. 무척 보기가 좋았다.
“그건 그렇고. 누가 나서시겠습니까? 이 정도면 제법 오래 기다려 준 것 같은데요.”
뜬금없는 가웨인의 말에 답한 것은 갤러해드였다.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그는 몸이 근질거린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발타자르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갈 기세였다.
경비를 서고 있는 기사들은 여태껏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발타자르와 가웨인, 그리고 갤러해드는 이 조촐한 술자리가 시작될 때부터 별채 주변을 둘러싼 기척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들이 감시역인지 혹은 암살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아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은근슬쩍 빈틈을 보일 때마다 움직이려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 단순히 감시하기 위해서 보낸 이들은 아닌 듯했다.
“첫날부터 환영 인사가 거칠군.”
말하며 발타자르가 두 사람에게 눈짓하자 가웨인과 갤러해드가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눈치챘다! 쳐라!”
그러자 숨어 있던 암살자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내며 암습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제법 실력은 있어 보이는 이들이었지만 정체를 들킨 암살자가 정면대결에서 기사들을 이길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숫자는 제법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온갖 암기를 뿌려대고, 연막으로 시야를 가리는 등 그들 나름대로 제법 수를 내어가며 기사들을 상대로 치열한 접전을 벌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가 줄어드는 쪽은 암살자 측이었다.
특히 압권은 다가오는 공세를 무시하며 거대한 클레이모어를 폭풍처럼 휘두르는 갤러해드와 기민한 움직임으로 일검에 한 명의 적을 차근차근 쓰러뜨리는 가웨인이었다.
두 기사의 활약 덕분에 암살자들의 숫자는 빠른 속도로 줄어갔고, 그럴수록 별채 주변으로 붉은 피들이 안개처럼 퍼져 나갔다.
‘빌로스는 뒷공작을 싫어하니 아닐 테고. 이슈카는 이런 무리수를 감행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으니 가장 유력한 범인은 웨즈 공자인가? 이유는 원한 정도겠군.’
연회장에서 보았던 그 열등감 강해 보이던 모습을 떠올린다면 이런 일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도의 대신에게 지원을 받아 한창 기세등등하던 차에 발타자르에게 치욕을 당했으니 그 일에 대한 앙갚음으로 이런 일을 벌인 것 같았다.
‘가급적이면 조용히 지내다 이득만 취하고 떠나려 했더니 자꾸 내게 명분을 쥐여주는군.’
비록 온두라스 때와는 달리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3군 총사령관 살해미수라는 명분만으로는 3군을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정치적으로 압박하기에는 충분한 명분이었다.
‘날이 밝아 왔을 때 이슈카의 표정이 궁금하군.’
주변 정리가 끝나가자 발타자르가 마지막 남은 술잔을 단숨에 비워내었다.
암살자들의 저항이 제법 격렬해서인지 몇몇 기사들이 부상을 입었지만 중상 혹은 사망에 이른 기사는 전무했다.
발타자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로잡은 암살자들에게 다가갔다.
“어찌할까요? 문초를 해볼까요?”
한바탕 날뛴 덕분인지 얼굴이 피범벅이 된 가웨인이 피로 얼룩진 칼날을 암살자의 목에 겨누며 물었다.
“되었네. 그런다고 정보가 나올 것 같지는 않으니 모두 죽이게.”
발타자르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군타낙스 기사들의 검이 일제히 움직이며 암살자들의 목이 달아났다.
* * *
“어머. 벌써 끝난 것 같네요.”
일이 마무리 될 무렵.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이것 참. 서둘러서 온다고 온 것인데 너무 늦었나 보네요.”
애슐리가 부채를 접으며 생긋- 미소 지었다.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온 그녀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암살자들의 시신들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지나치며 발타자르에게로 걸어갔다.
“공녀.”
발타자르가 애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어머. 그렇게 보지 말아주세요. 전 이번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답니다. 오히려 보시다시피 전 후작 각하를 도와드리려고 온 것이랍니다.”
정말로 발타자르가 걱정되어 온 것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애슐리를 보며 발타자르는 그녀가 마치 여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데없이 그녀가 나타난 것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의도는 충분히 짐작이 되었다.
‘날 옭아매려고 하는군.’
낯의 언행들도 그렇고 지금 이러한 움직임은 자칫 발타자르와 애슐리가 손을 잡은 것이라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것까지 생각하고 움직인 것 같았다.
“공녀는 이 일의 범인을 알고 있는 눈치인 것 같소만.”
“글쎄요.”
그녀가 의뭉스레 주위를 둘러보더니 발타자르를 향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 그런지 요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분명 후작 각하께서 좋아하실 만한 이야기를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오고 보니 생각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리고 상대가 발타자르가 아니었다면 몹시도 사랑스럽게 보일 만한 모습이었다.
말끝을 흐리는 애슐리를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피식 웃었다.
“증거도 확보한 것 같고.”
“글쎄요?”
애슐리가 접었던 부채를 촥- 하고 펼쳐 보이며 제 얼굴을 가렸다. 부채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푸른 사파이어 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말했다.
“되었네. 공작가에 그리 오래 머물 생각이 없으니 이번 일은 없던 일로 하면 될 일이네.”
물론 정말로 없던 일로 할 생각은 없었다.
발타자르가 더 이상 그녀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별채로 돌아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애슐리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이슈카 오라버니와 웨즈가 밀회를 가지는 모습을 본 것도 같기도 한데…….”
그녀의 중얼거림에 발타자르는 순간 연회장에서 있었던 이슈카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이슈카가 온두라스의 통치권을 제안했을 때만 해도 단순히 발타자르 자신을 경계하여 그런 제안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각을 잘못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안 자체나, 그런 제안을 한 의도가 아니라 이슈카가 발타자르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개차반 같은 웨즈 공자를 왜 그냥 내버려 두었는지 의문이었는데 이제야 알겠군.’
그는 버린 패였던 것이다.
제도에 있는 대신의 지지를 받고 있는 웨즈가 급성장을 거듭함에도 별다른 견제를 받지 않은 것 같아 수상쩍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었다.
‘로마노프 공작가가 혼란스럽고, 또한 웨즈 공자가 대신의 지원을 받는다고 해도 외부의 지원만으로는 성장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그러니 웨즈 공자가 아무리 세력을 키워봐야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제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겠지.’
이제 보니 웨즈의 뒤에는 제도의 대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슈카 로마노프. 그 능구렁이가 웨즈의 머리 꼭대기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린 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서둘러야겠군.’
더 이상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렇다면 해가 뜨기 전에 모든 일을 속전속결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공녀.”
발타자르가 애슐리를 불렀다.
그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후작 각하.”
“혹시 뱀 좋아하시오?”
발타자르의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뱀…… 말인가요?”
“그렇소. 내가 이번에 뱀을 한 마리 잡아볼까 하는데. 공녀가 원한다면 요리해 드리겠소.”
발타자르가 말하는 의도를 알아차린 애슐리가 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이거 혼자 먹다 배가 터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부담스럽다면 다른 이와 나눠도 좋소. 가령…… 빌로스 공자라거나. 이번에 보니 대식가 같던데 빌로스 공자와 함께라면 충분히 다 먹을 수 있을 것이오.”
발타자르의 말에 애슐리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나쁘지 않네요. 기대할게요. 후작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