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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34화 (34/183)

공작이 회귀함 34화

이미 이슈카와 함께 몇 잔의 술을 마셔 코끝에 술기운이 맴돌던 발타자르에게까지 술 냄새가 진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주향을 풍기는 사내가 다가왔다.

“웨즈.”

이슈카가 미간을 찌푸리며 사내를 불렀다.

사내, 웨즈는 후계 서열의 끝자락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는 자로 전대 로마노프 공작에게서 끝을 모르는 탐욕만큼은 아주 제대로 물려받았다고 평해지는 인물이었다.

그와 비슷한 서열의 형제들이 다른 유력 후보자들의 아래로 들어간 것과 달리 그는 분수에 맞지 않게 공작위에 욕심을 내었다.

그것만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는 공공연하게 다른 파벌에 속한 이들에게 접근하여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을 남발하며 그들의 회유를 시도했다.

처음에는 다들 헛수고라며 그를 비웃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를 비웃는 이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몇몇 기회주의자들과 파벌 내에서도 서열이 낮은 이들은 웨즈의 허언에 가까운 약속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이가 차기 공작이 되어 봐야 자신들에게 떨어질 이득이 작은 것에 비해 웨즈가 공작위에 올랐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막대했다. 때문에 도박을 거는 심정으로 그의 파벌로 이적하는 이들이 제법 되었다.

물론 그들 대부분이 하급 귀족들인지라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도 없는 것이 그 수가 불어나는 속도가 눈에 드러날 정도였다.

하여, 이슈카와 빌로스를 비롯한 거대 파벌들의 주인들은 조만간 웨즈를 치워 버려야겠다고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슈카 형님. 혼자서만 후작 각하를 독차지하지 마시고 제게도 좀 기회를 주시죠.”

웨즈가 히죽 웃으며 발타자르를 향해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들어 올리며 흔들어 대었다.

“후작 각하. 제가 술 한 잔 따라드리겠습니다.”

연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웨즈가 발타자르에게로 다가왔다.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술이 깨고 난 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겠군.”

발타자르의 말에 웨즈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감히.”

웨즈가 발타자르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주위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타자르는 순간 이건 대체 뭐 하는 놈인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 상황을 잘만 이용하면 장시간 연회장에 붙잡혀 있지 않고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웨즈, 취한 것 같은데…….”

이슈카가 다급히 나서 중재를 하려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웨즈는 이슈카의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제 영지도 없는 후작 나부랭이가 감히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가 내리는 술을 거부하겠다는 거냐! 네 녀석도 날 무시하는 거야!”

자격지심이 뚝뚝 묻어나는 외침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려니 웃음만 새어 나왔다.

발타자르는 제 멱살을 잡은 웨즈의 손을 가볍게 툭 쳐내곤 말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일세. 내 몸에 손대지 마시게.”

발타자르의 서슬 퍼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웨즈가 재차 그의 멱살을 잡았다.

“웨즈!”

이슈카가 언성을 높이며 웨즈를 불렀다.

하지만 웨즈는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발타자르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어쩌려고. 감히 이 몸에게 손이라도 대려고?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인 나를?”

이죽거리며 말하는 웨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간결한 발동작으로 웨즈의 발을 걸었다.

쿵-

단박에 웨즈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그의 손에 있던 술병이 깨지며 붉은 와인이 바닥을 적시고 파편 조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웨즈는 순간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멍하니 발타자르만 올려다보았다. 발타자르의 경멸 어린 눈빛이 그에게 내리꽂혔다.

“경고했을 텐데.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발타자르가 테이블 위에 있던 와인 병을 들고선 그대로 웨즈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주르륵─

와인이 천천히 웨즈의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며 순식간에 그의 몸을 적셨다.

“내게 할 말이 있거든 술이 깨고 난 이후에 찾아오게. 방금 전의 무례는 이것으로 참아줄 테니.”

고조 없는 음성으로 발타자르가 말했다.

“이익…….”

그제야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한 것인지 깨달은 웨즈가 자리에서 일어나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들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그가 움직이기 직전.

서릿발처럼 차가운 발타자르의 음성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내게 향한다면 자넨 죽어.”

일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내가 못할 것 같은가? 그럼 어디 한번 움직여 보게나.”

당장이라도 허리춤의 검을 뽑아낼 기세에 웨즈가 몸을 움츠렸다. 그 모습을 한심하단 듯이 지켜보던 발타자르가 이슈카를 바라보았다.

“공자. 더 이상 대화를 할 분위기가 아닌 듯하니 먼저 실례하겠소.”

이슈카는 제가 다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발타자르를 로마노프 공작가로 초대한 과정도 충분히 부끄러울 만한 일이었지만 그건 충분히 무마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예 대놓고 로마노프 공작가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죄송합니다. 이 일은 추후에 제가 따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럽시다. 그럼.”

발타자르가 이슈카와 웨즈를 뒤로하고 갤러해드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석고상이라도 된 것마냥 자리에 우뚝 서 있었는데 한 가지 우스운 점은 그의 주위에 영애들이 모여 그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건네보려 서로 눈치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갤러해드. 생각보다 인기가 많군그래.”

발타자르가 웃으며 다가가자 영애들이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이야기는 다 끝나신 겁니까?”

“보다시피. 한데 신시아와 아그리파는 어디 갔는가?”

“신시아 양은 저기 귀족가의 자제분들과 담화 중이시고, 아그리파 경은 연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사라져 버려서 잘 모르겠습니다.”

갤러해드의 말에 발타자르는 연회장을 쭉 둘러보았다. 귀족가의 자제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신시아는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아그리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빌로스 공자의 파벌 역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그들과 함께 연회장을 떠난 듯싶었다.

“연회장 입구에서 기다릴 테니 가서 신시아를 데리고 오게.”

“알겠습니다.”

갤러해드가 신시아를 향해 걸어가자, 발타자르 역시 걸음을 옮기며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이게 무슨 망신이냐!]

[으아아악! 감히! 감히이이!]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며 웨즈를 호통치는 이슈카의 목소리와 웨즈의 악에 찬 고함이 등 뒤로 들려오자 발타자르는 피식 웃으며 연회장을 떠나갔다.

이슈카와의 대화가 끝나는 대로 사전에 약속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발타자르에게 접근하려 했던 이들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의 뒤를 쫓았지만 차마 붙잡지는 못했다.

* * *

연회장을 나온 발타자르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자 연회장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재빠르게 다가와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며 내밀었다.

시종이 붙여준 불이 담배 끝에 닿자 발타자르는 담배를 깊게 빨았다. 그러자 담배 끝이 붉게 달아오르며 불이 붙었다.

후우- 하고 매캐한 담배 연기를 내뿜은 발타자르가 시종에게 눈인사를 하며 말했다.

“고맙네.”

“아닙니다. 그럼.”

시종이 발타자르에게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한 번 바라보곤 발타자르가 생각에 잠겼다.

‘이슈카와 빌로스. 세실은 실각 되었으니 논외로 치고 가장 유력한 후보들은 모두 만나봤으니 당분간은 오슬로에 머물면서 애간장을 좀 태우는 것이 좋겠군.’

어떻게 보면 웨즈가 발타자르를 도와준 격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언제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어볼까 눈치를 보던 이들에게 둘러싸여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만 주고받았을 것이었다.

이슈카와 빌로스 두 사람을 제외하면 뒷배의 세력이 크다고 해도 그들이 내거는 제안들은 모두 그들이 공작위에 올랐을 때라는 전제가 붙거나 별다른 실속이 없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이럴 땐 정보원이 절실하군.’

정보원이 없으니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회귀 전의 기억이 있다고는 해도 발타자르가 가진 정보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보인데 발타자르에겐 그것이 부족했다.

신시아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한참 배워야 할 단계이니 정보원으로 돌린다고 해도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었다.

물론 제 몫이야 금방 해내겠지만 회귀 전 만큼의 실력을 기대하기에는 솔직히 지금 당장은 무리가 있었다.

‘애슐리 공녀가 쓸 만해 보이기는 하던데…….’

로마노프 공작가가 몰락한 이후에도 사교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인물이었다. 확실히 매력적인 인물이니만큼 손을 잡아도 나쁠 것은 없어 보였다.

‘문제는 그녀가 공작위에 욕심이 있느냐인데. 그건 조만간 따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

발타자르가 생각을 정리했을 무렵 갤러해드와 신시아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주군.”

“아저씨.”

두 사람이 동시에 발타자르를 불렀다.

발타자르가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두 사람 다 피곤해 보이는군.”

발타자르의 말에 갤러해드는 쓴웃음을 지었고, 신시아는 쪼르르 발타자르의 곁에 다가와 자신이 모은 정보들을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대부분 누가 누굴 좋아하더라, 어디 가문의 부인이 어느 가문의 자제와 바람이 났더라 하는 별 영양가 없는 잡담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쓸 만한 정보도 있었다.

“웨즈 공자에게 제도에서 손님이 찾아왔다고?”

“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제 아버지가 웨즈 공자님의 파벌인데 제도의 높으신 분들이 웨즈 공자의 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면서 저보고 아저씨한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잘 설득해 보라고 하더라구요. 줄을 잘 잡아야 출세한다나 뭐라나. 수작이 빤히 보이는 말이기는 한데 참고 정도는 해볼 만한 이야기인 것 같았어요.”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다. 제도의 대신들 입장에서는 이슈카나 빌로스가 차기 로마노프 공작이 되는 것보다는 웨즈처럼 손에 넣고 다루기 쉬운 인물이 공작 위에 오르는 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웨즈의 파벌이 어느 정도 세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리기는 하지만.

“웨즈 공자에 대해 다른 이야기는 더 없던가?”

“있어요. 요즘 웨즈 공자님의 세력이 빠르게 불어나고 있다고 하더라구요. 대부분 하급 귀족들이기는 하지만요. 그리고 다들 쉬쉬하는 눈치기는 한데 요즘 오슬로에서 행방불명 되거나 사고를 당하는 귀족들이 부쩍 늘어났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신시아의 말에 발타자르가 기특하단 눈빛으로 신시아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새에 제법 쓸 만한 정보들을 여럿 물어왔으니 기특해할 만도 했다.

“그렇군. 수고했네.”

발타자르가 신시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에이. 별것 아니었는데요, 뭘.”

신시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얼른 가요. 동생분이 기다리신다고 했었잖아요.”

신시아의 말에 발타자르는 아이린과의 약속을 상기했다.

“그렇군. 나머지는 후에 듣기로 하고 그만 가세.”

발타자르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일도 좋지만, 지금은 아이린에게 집중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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