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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33화 (33/183)

공작이 회귀함 33화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적막이 내려앉았던 연회장이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연회장을 밝히는 화려한 샹들리에 식탁 위로 펼쳐지는 온갖 산해진미와 테이블 주위에 모여 담소를 나누는 이들. 발타자르에게 몹시도 익숙한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겉으로는 발타자르에게 관심이 없는 듯 행동하면서도 시기심과 질투심. 적의와 호의를 비롯한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가 담긴 시선들이 발타자르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마치 회귀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에게 집중된 시선에도 발타자르는 시종일관 여유를 잃지 않으며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걸이로 연회장의 중심을 향해 걸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후작 각하.”

발타자르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이슈카 로마노프였다. 제 파벌들을 이끌고 다가온 그는 명문 귀족 가의 자제답게 걸음걸이 하나에서도 기품이 넘쳐 흘렀다.

수려한 금발을 한껏 빗어넘긴 유순해 보이는 인상의 이슈카는 ‘명문 귀족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정치판에서 쉰내 나도록 구른 제도의 대신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에메랄드빛의 심유한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수고했다. 애슐리.”

이슈카의 말에 애슐리 공녀가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여기서부터는 이슈카 오라버니께서 에스코트하실 테니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럼 후작 각하. 나중에 또 뵈어요.”

애슐리가 생긋 눈웃음을 치며 물러가자 이슈카가 발타자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로마노프 공작 가의 자제답지 않게 발타자르를 향해 스스럼없이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에 발타자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본가를 방문하시게 되어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본가에서 워낙 후작 각하를 뵙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다 보니 부득이하게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용서하시지요.”

이슈카 로마노프.

로마노프 공작 가의 직계 중에서도 공작 위에 가장 근접했다고 평해지는 자.

5공녀 세실이 실각한 지금 공작 가 내에서 무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빌로스와 함께 양대 산맥을 이루는 거대 파벌의 수장.

문무가 모두 출중하고 권력욕이 강하던 전대 로마노프 공작이 후계자로 눈여겨볼 만큼 정치적 수완이 빼어난 인물이었다.

“사실.”

한동안 이슈카를 응시하던 발타자르가 입을 열었다.

“지금도 그다지 기분은 좋지 못하오. 하나. 이슈카 공자께서 이리 고개 숙여 사과하시니 공자께서 저지른 무례는 잊도록 하지요.”

‘네가 먼저 고개를 숙였으니 나도 이쯤 하겠다.’라는 뜻이 담긴 그 말에 이슈카가 발타자르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했다. 그러곤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하. 들었던 소문대로 아량이 넓고 관대하십니다. 자자. 이리로 오시지요. 제가 사죄의 의미로 술 한 잔 올리겠습니다.”

이슈카가 발타자르와 함께 그의 파벌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테이블로 이동하려는데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형님. 혼자서 후작 각하를 독차지하실 생각이십니까?”

유순한 인상의 이슈카와 대비되는 호탕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이슈카와 마찬가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끌고 왔는데 그의 파벌과 이슈카의 파벌이 서로 눈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그의 정체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빌로스.”

갑작스러운 사내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슈카는 웃으며 사내를 불렀다.

빌로스 로마노프.

발타자르가 실각시킨 온두라스 백작이 몸담고 있던 파벌의 주인이며, 공작위를 놓고 이슈카와 가장 치열한 정쟁을 벌이고 있는 인물이었다.

성질이 급한 것이 흠이기는 하나, 무에 대한 재능이 특출나고 호방한 성격으로 무가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순서를 지키기로 약조하지 않았던가?”

이슈카의 말에 빌로스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물론 약속은 지켜야지요. 하지만.”

돌연 빌로스가 웃는 낯을 지우곤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제 수족의 잘못을 대신 벌하여주신 후작 각하에게 감사의 인사라도 전하는 것이 예의 아니겠습니까?”

발타자르를 응시하던 빌로스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거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내부를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너무 앞만 보고 달린 탓인지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는데 말입니다.”

발타자르가 빌로스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웃어 보였다.

“그랬다면 다행이오. 내실이 튼튼해야 뭐든 할 수 있는 법 아니겠소?”

일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발타자르는 빌로스의 눈동자 안에 숨겨진 적의를 읽을 수 있었다. 제 나름대로는 감춘다고 감춘 것 같았지만 미미하게나마 티가 났다.

“뭐, 좋습니다. 인사도 했겠다. 불청객은 물러가지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후작 각하.”

빌로스가 까딱 고개를 숙여 보이곤 제 파벌들과 함께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슈카가 발타자르에게 말을 걸었다.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워낙 성격이 급한 녀석이라 후작 각하를 뵙고 싶은 마음에 무례를 저질렀나 봅니다.”

“괜찮소. 그보다 슬슬 배가 고프던 참이니 어서 자리로 갑시다.”

발타자르의 말에 이슈카가 그를 자리로 안내했다.

“이리로 오시지요.”

* * *

이슈카와의 대화는 제법 즐거운 편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사소한 일상 이야기들뿐이었지만 그 이야기들 속에서 무언가 정보가 될 만한 것은 없는지 탐색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는 이슈카의 모습이 제법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제 딴에는 표정 변화를 잘 조절해 가며 대화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아직은 조금 미숙했다.

하지만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제법 볼만한 정치가로 성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시시때때로 발타자르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은 제도의 대신들을 연상케 했다.

“그건 그렇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 때가 된 것 같아 발타자르가 운을 떼었다.

“요즘 공작가가 시끄럽다는 소문이 있던데 괜찮소이까?”

“소문이 후작 각하의 귀에까지 들어가다니. 부끄럽군요. 한참 북방을 지키셔야 할 후작 각하께 심려를 끼치게 한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이슈카가 부끄럽단 기색을 내비치며 말하자 발타자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대화를 요약하자면, 후계 싸움이 치열한데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냐는 발타자르의 물음을 이슈카가 에둘러 거절한 것이었다.

“무얼. 3군의 주 된 임무가 북방의 야만족으로부터 제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북부의 치안에도 힘을 써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북부의 기둥인 로마노프 공작가가 흔들린다는 것은 곧 북부의 치안 역시 흔들린다는 것. 3군의 지휘관으로서 당연히 신경 쓸 일이니 그리 미안해할 것 없소.”

발타자르가 재차 은연중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에 가담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자 이슈카가 웃으며 말했다.

“야만족과의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창 바쁘실 후작 각하께 심려를 끼칠 수야 있겠습니까? 그보다 후작 각하께옵선 보유하신 땅은 제법 되시는 것으로 압니다만 따로 다스리시는 영지는 없지 않으십니까?”

이슈카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어깨를 으쓱이며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나야 3군을 지휘하기에도 바쁜 몸이니 차라리 영지가 없는 편이 속 편하오.”

발타자르의 대답에 이슈카 역시 와인 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제도의 대신들께서 워낙 공사다망하시다 보니 미처 후작 각하께는 신경을 쓰시지 못하는 듯합니다. 세상에 후작 각하같이 제국과 황실의 안녕에 힘쓰시는 분이 영지 귀족이 아니라니요. 제가 조만간 제도에 상소를 올려 지금 관리하시고 계시는 온두라스가 후작 각하의 영지가 될 수 있도록 힘써 보겠습니다.”

현재 치안 유지의 명목으로 점거하고 있는 온두라스를 공식적으로 내어 줄 테니 로마노프 공작가의 후계다툼에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발타자르의 도움이 없더라도 차기 공작에 오르는 것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동시에 발타자르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더 이상 괜한 욕심 더 부리지 말고 자중하고 있으라는.

발타자르에게는 크게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온두라스가 정식으로 발타자르의 영지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발타자르가 마음만 먹는다면 여기서 더 얻어낼 수도 있었지만, 그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조만간 민란이 본격화되면 싫어도 재차 발타자르를 찾아와 더 많은 것을 내어주며 손을 빌려달라 애원할 것이 분명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양측이 서로의 조건을 내밀며 협상하는 것과 한쪽이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것의 차이였다.

“하긴. 현재 3군의 사정으론 북부의 치안에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긴 하지.”

발타자르가 이슈카의 와인 잔에 자신의 잔을 맞부딪치며 단숨에 잔을 비워내었다. 이슈카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잔을 비우곤 발타자르의 빈 잔에 와인을 따라주기 위해 와인 병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귀족 하나가 다가왔다.

“공자님.”

“오. 세뮨타 백작 아닌가. 어서 오게.”

세뮨타 백작은 온두라스와 함께 파판 영지를 사이에 두고 있는 영지의 주인이었다. 그가 발타자르에게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곤 이슈카에게 말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잠시 제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급한 일인가?”

발타자르를 의식한 것인지 세뮨타 백작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답은 충분했는지 이슈카가 발타자르에게 양해를 구하곤 조용한 곳으로 떠나갔다.

이슈카가 떠나가고 발타자르는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주위를 훑어보았다. 빌로스와 애슐리를 비롯해서 제법 큰 무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필시 무슨 일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자그맣게 들려오는 말들을 들어보니 그 일이란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민란의 규모가 더 커졌나 보군.’

발타자르가 오슬로를 향해 출발하기 전날 받은 보고에 의하면 발타자르가 표면적으로 인근의 세 남작령으로 보낸 군수품들을 붉은 십자가 혁명단에게 탈취당했다.

적어도 파판, 멜리우스, 리스펄. 이 세 남작령들은 민란에 의해 무너졌거나, 무너지는 중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민란이 북부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것도 순식간일 터.

후계다툼으로 정신없는 로마노프 공작가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일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무너질 그들이 아니었지만, 이 상황이 그들의 후계 구도에 큰 변화를 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것은 발타자르에게는 큰 호재였다.

분명, 이 일로 크게 위축되는 세력이 발생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줄어든 세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발타자르를 그들의 파벌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금보다 더 안달을 낼 것이었다.

‘재밌네.’

당혹감과 경악이 공존하는 분위기 속에 오직 발타자르와 그의 수행원들만이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척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들을 안주 삼아 발타자르가 와인을 마시려는 순간. 이제 막 이야기를 끝낸 듯 이슈카가 발타자르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심각한 듯 시종일관 여유롭던 그의 안색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겨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이오? 안색이 좋지 않소만.”

발타자르의 물음에 이슈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작 각하. 아무래도 각하의 영지가 좀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발타자르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답했다.

“그렇군. 한데 그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조금 이른 듯싶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이슈카가 발타자르를 바라보자 그가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이슈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만취 상태인 것으로 보이는 사내가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비틀거리며 발타자르와 이슈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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