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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32화 (32/183)

공작이 회귀함 32화

한참 남매간의 우애를 만끽하던 두 사람에게 가웨인이 말을 걸어왔다.

“흠흠.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손님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가웨인의 말에 아이린을 끌어안고 가만히 눈을 감고 이 시간을 만끽하고 있던 발타자르가 고개를 들어 가웨인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애슐리 공녀를 비롯한 발타자르의 수행원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타자르 남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았다. 물론 한동안은 이대로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더 이상 로마노프 공작가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린.”

발타자르가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린을 불렀다. 그러자 아이린이 발타자르를 올려다보며 그의 옷소매를 꼭 쥐었다.

“벌써 가시는 거예요?”

아쉬움과 애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그 목소리에 발타자르는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금방 다녀오마.”

“언제 오시는데요? 몇 밤만 자면 또 오세요?”

무척이나 아쉬워하면서도 가지 말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는 아이린을 바라보며 발타자르가 조심스레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다. 약속하마.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정말요?”

기쁘다는 감정이 한껏 드러나는 얼굴로 아이린이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정말 빨리 오시는 거죠?”

되묻는 그녀에게 발타자르가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물론이지. 그냥 기다리기는 적적할 테니 내일 나와 함께 나들이 갈 곳을 생각해 보려무나. 오랜만에 함께 나들이라도 다녀오자꾸나.”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대답했다.

“좋아요! 제가 오슬로에서 가장 멋진 곳을 안내해 드릴게요. 저만 믿으세요!”

아이린이 제 가슴을 통통 두드리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발타자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녀를 한번 꼭 안아준 후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았다.

“다녀오마.”

“다녀오세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드는 그녀를 바라보던 발타자르가 가웨인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린을 부탁하네.”

“아무렴요. 공녀께서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얼른 다녀오세요.”

발타자르가 애슐리 공녀에게로 걸어가며 군타낙스 기사단장 갤러해드를 불렀다.

“갤러해드.”

발타자르의 부름에 갤러해드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예. 주군.”

갤러해드는 장신의 발타자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키와 그에 걸맞은 장대한 체구의 사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용감무쌍해 보이는 인상의 이 사내는 트리스탄과 마찬가지로 야만족 출신으로 발타자르 휘하의 기사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 중의 강자였다.

특히 그 충직한 성격은 발타자르의 지시라면 불구덩이에도 웃으며 뛰어들 정도였다.

“자네를 포함한 10명의 기사들은 날 수행하도록 하게. 그리고 남은 기사들은 이곳을 지키도록 하고. 또한 그 누구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하네. 그것이 설령 로마노프 공작가의 인사라고 해도 말이야.”

“알겠습니다.”

갤러해드가 군타낙스 기사단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빠른 발걸음으로 떠나가자 발타자르가 이번에는 신시아와 아그리파에게 말했다.

“자네들 역시 갤러해드와 동일하게 날 수행하게.”

그러곤 시종일관 미소를 유지한 채 발타자르를 바라보는 애슐리 공녀에게 말했다.

“안내하시오.”

“따라오세요.”

* * *

로마노프 공작가가 다스리는 오슬로는 먼 옛날 한 왕국의 수도라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크고 웅장했다.

비록 제도에는 비할 바가 되지는 못하지만, 오슬로의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내성은 북부의 도시 그 어느 곳보다 화려하고 거대했다.

경비를 서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은 군기가 바짝 들어 있으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메이드들 역시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흘러넘쳤다.

연회장으로 향하기 직전. 애슐리 공녀가 발타자르와 그의 수행원들을 바라보곤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가 보면 어디 전장에라도 가시는 줄 알겠어요. 다들 옷을 조금 갈아입으셔야 할 것 같네요.”

그녀의 말대로 갤러해드와 아그리파를 비롯한 군타낙스 기사들은 완전무장을 한 상태였고 발타자르는 지휘관 예복 차림이었다.

그나마 신시아가 나름대로 차려입기는 하였지만, 로마노프 공작가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할 만한 차림은 아니었다.

“난 괜찮으니 이 사람들이나 어울릴 만한 복장으로 갈아입혀 주게.”

발타자르가 그의 뒤를 따라오던 아그리파와 갤러해드 그리고 신시아를 쭉 둘러보며 말했다. 군타낙스 기사들이야 연회장 안에는 출입이 불가하니 논외였다.

“후작 각하는…… 음. 이것도 나름대로 나쁘진 않네요.”

발타자르의 옷차림을 쭉 훑어본 애슐리 공녀가 짧은 평을 내렸다. 그러곤 이내 손뼉을 짝짝- 하고 두어 번 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메이드들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두 기사분은 후작 각하와 동일하게 기사용 예복이 좋을 것 같고. 이쪽 아가씨는 드레스가 좋을 것 같네요. 중요한 분들이니 한껏 치장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공녀님.]

애슐리 공녀의 지시에 메이드들이 합장하듯 한목소리로 대답하며 세 사람을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세 사람이 떠나가자 애슐리 공녀가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방긋 웃으며 말했다.

“후작 각하. 잠시만 제게 대화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며 우아하게 무릎을 굽히는 그녀의 몸짓에 유독 깊게 파인 가슴골이 강조되었지만, 그것은 천박하기보다는 요염함을 부각시켰다.

어찌 보면 유혹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의 몸짓에 발타자르가 피식 웃으며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잠시 공녀와 대화를 나누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기사들은 대답 대신 제 가슴팍을 주먹으로 쿵쿵 두드리는 것으로 답하고는 다시 차려자세를 유지했다.

* * *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군타낙스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는 복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자그마한 미로 정원이었다.

정교하게 다듬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은 잠시 몸을 숨기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기에 알맞았다.

주변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도착하자 발타자르가 걸음을 멈추고선 물었다.

“그래.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오?”

애슐리 공녀가 살살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이참. 성급하시기는.”

그 모습에 발타자르는 아그리파가 일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명 미리 아그리파에게 언질을 받았겠지.

“풍문에 듣기로는 각하께서 풍류를 즐기시는 호걸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실인지요?”

교태로운 몸짓과 함께 미소 짓는 그녀를 보곤 발타자르가 코웃음을 쳤다.

“난 가시 돋친 꽃은 품지 않는 주의라서.”

“그거야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니겠어요? 오히려 그런 꽃이 주변에 널린 꽃보다 아름다운 법이랍니다?”

발타자르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 그녀가 제 검지로 발타자르의 가슴팍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한 꽃일수록 주변에 탐하는 이가 많답니다. 쉬이 만질 수 없기에 더 안달 내는 것이지요.”

애슐리 공녀는 발타자르의 가슴을 쓸어내리던 손가락을 빙글빙글 움직이며 그의 가슴팍을 살살 더듬었다. 발타자르는 시종일관 무표정을 고수하며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말하는 저의가 무엇이오?”

하고 묻자 애슐리 공녀가 그의 품에서 떨어지며, 팔짱을 꼈다. 그 풍만한 가슴을 부각시키는 행동에도 발타자르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쉽진 않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애슐리 공녀가 처량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가문에서 쉬쉬하는 통에 소문이 나지 않아 잘 모르시겠지만 요즘 가문 내에서 흉흉한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답니다. 최근에는 제 동생인 세실이 영지 시찰을 나갔다가 괴한들에게 간살 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졌답니다.”

‘이러다 저도 혹시 그런 흉한 일을 당할까 너무 두렵네요.’하고 애슐리 공녀가 중얼거렸다.

‘세실 공녀가 실각된 것은 이것으로 확정되었군. 누구의 소행일까?’

뒷공작을 탐탁잖게 여기는 빌로스는 분명 아닐 테고 이런 일을 벌일 만한 유력한 후보는 이슈카 였지만 혹시 몰랐다.

발타자르의 눈앞에서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애슐리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그대를 지켜달라?”

“설마요. 제가 각하에게 그런 무리한 부탁을 할 리가 있나요. 그저…….”

재차 그녀가 발타자르에게로 다가왔다.

돌연 그녀가 발타자르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러곤 그의 가슴에 제 뺨을 대었다.

발타자르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가는 길에 눈길이라도 조금씩 주시어요. 그리만 해주신다면 제게 음험한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이 각하의 위엄에 지레 겁먹고 몸을 움츠리지 않겠어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었다.

이야기만 놓고 보자면 별다른 부담 없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자칫 발타자르가 애슐리의 손을 들어주려 한다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발타자르가 부정적인 기색을 내비치자 애슐리 공녀가 호호-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거야 방정맞은 영애들이나 그런 생각을 하겠지요. 그분들이야 자기네들이 흥미로워하는 소재로 소설을 쓰는 것이 특기 아니겠어요? 용맹무쌍 하신 북부의 영웅께서 신경 쓰실 만 한 일은 없을 것이랍니다. 그리고…….”

애슐리 공녀가 애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해가 사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 * *

발타자르가 애슐리 공녀와 밀회 아닌 밀회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옷을 갈아입기 위해 떠났던 이들이 돌아와 발타자르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기사는 큰 연례행사 때나 입을 법한 기사용 예복을 차려입고 머리도 한껏 치장하여 멋을 뽐내었는데 특히 압권은 신시아였다.

그녀는 땋아 틀어 올려 묶은 머리에 색이 연한 화장을 하고 나타났는데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드레스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고위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그녀는 제 모습이 어색한지 연신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다들 잘 어울리는군.”

발타자르가 감탄하듯 말하자 애슐리 공녀가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그러게요. 다들 몰라볼 정도로 달라지셨네요. 특히 숙녀분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정말 아름답네요.”

신시아는 그 칭찬들이 부끄러웠는지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느, 늦었다고 하셨잖아요. 어서 가요.”

화제를 돌리려는 듯 애쓰는 그녀의 행동에 주변인들이 웃음을 터뜨리곤 연회장을 향해 이동했다.

* * *

연회장의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은 저 멀리 애슐리 공녀와 함께 다가오는 발타자르와 그 일행들을 발견하곤 서둘러 연회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곤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위대한 프락시온 제국의 북방을 수호하시며 겨울 전쟁을 승리로 이끄신 북부의 영웅. 3군 총사령관 알레한드로 발타자르 후작 각하와 그 일행분들이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외침에 소란스럽던 연회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이윽고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발타자르에게 모든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차기 공작위를 노리는 로마노프 공작가 직계들의 간절한 구애들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화제의 인물이 드디어 로마노프 공작가의 연회장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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