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31화
“아가씨. 잠시 나와보세요.”
한동안 부끄러움에 마른세수만 반복하는 발타자르를 내버려 두고선 가웨인이 아이린을 불렀다.
하지만 아이린은 대답이 없었다. 아직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웨인이 작게 미소 지으며 재차 말했다.
“제가 졌습니다. 그러니 잠시 나와보시겠어요?”
그제야 아이린이 나무 뒤편에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며 가웨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아이린에게 가웨인이 손짓하며 말했다.
“약속대로 장군께 빨리 오시라고 전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리 오세요.”
가웨인의 말에 아이린이 한달음에 달려와 물었다.
“정말이죠?”
“그럼요. 정말이고 말고요.”
가웨인의 확답을 해주자 아이린이 배시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번에는 오라버니가 오시겠죠?”
그 말에 옆에서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발타자르가 몸을 움찔거렸다.
“물론이죠. 아가씨께서 이토록 보고 싶어 한다는 말씀을 전해드리면 한달음에 달려오실 겁니다.”
“피- 거짓말.”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가웨인의 물음에 아이린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번에도. 그 지난번에도. 오신다고 약속하셨는데 오지 않으셨는걸요. 오라버니는 제가 보고 싶지 않으신가 봐요.”
그녀의 대답에 가웨인이 쓰게 웃었다.
그러면서 떨리는 눈동자로 아이린을 바라보는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그러기에 진작 찾아뵈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눈빛으로 그리 말하자 발타자르가 슬쩍 가웨인의 시선을 회피했다. 가웨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쪼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아이린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런 생각 마세요. 장군께서 얼마나 린 아가씨를 아끼고 사랑하시는데요.”
“사랑하고 아끼는데 왜 만나러 오시지 않으시는 거예요?”
“그건…….”
말문이 막힌 가웨인이 슬쩍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이제 나서서 어떻게 해보라는 의미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동안 숫하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혹시나 아이린이 자신을 미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임이 생긴 발타자르가 재차 가웨인의 눈길을 피했다.
“일이 너무 바쁘셔서 그렇습니다. 장군께서는 린 아가씨 말고도 책임지셔야 할 분들이 무척이나 많거든요.”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은 단연 린 아가씨이고요.’ 하고 뒷말을 덧붙이며 가웨인이 말했다.
아이린을 달래려는 가웨인의 노력이 통했는지 그제야 아이린이 조금씩 미소를 보이기 시작했다.
“에휴. 가웨인 오라버니가 이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까. 그러면 이번 한 번만 더 믿어볼래요.”
조막만 한 아이가 허리춤에 척- 하고 손을 올리고서 작은 한숨과 함께 말하는 모양새가 퍽이나 우스웠지만 가웨인은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아내고 물었다.
“장군께서 밉지 않으십니까?”
“미워요.”
칼 같은 대답이었다.
발타자르가 흠칫거리며 힐끔힐끔 아이린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만나러 오신다는 약속도 매번 어기시고 지난번에는 제 생일도 잊으셨어요. 매일같이 편지를 보내도 답장은 가끔씩만 해주시고, 항상 짧은 편지만 보내주세요.”
발타자르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끄러움이 아닌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치만…….”
아이린이 가웨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사랑해요. 제 하나뿐인 오라버니인걸요.”
발타자르가 적잖이 감동한 얼굴로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본 가웨인이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아이린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가웨인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이에 가웨인이 끅끅거리며 웃음을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저분이 누구신 것 같아요?”
가웨인이 발타자르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제야 발타자르에게 시선을 준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고개를 내젓는 아이린을 내버려 두고서 가웨인은 이 사랑스러운 남매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쪼그렸던 두 다리를 펴곤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발타자르에게 이만큼 판을 깔아주었으니 이제 알아서 하라는 의미의 눈빛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시선을 마주한 발타자르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후우- 하고 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아이린에게로 다가갔다.
“누구세요? 혹시 가웨인 오라버니랑 아시는 분이세요?”
하고 묻는 아이린에게 발타자르는 쪼그려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미소지었다.
“오랜만이구나.”
생각했던 인사말은 많았지만, 이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린은 조금 더 빤히 발타자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라버니?”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발타자르가 어색한 미소와 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이린이 단박에 발타자르에게 안겨들었다.
덕분에 발라당 땅바닥에 주저앉은 발타자르는 그런 아이린을 마주 안아주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품 안에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아이의 따스한 온기도 함께.
“보고 싶었어요.”
“미안하구나.”
“오라버니가 절 미워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있겠니.”
“항상…… 항상 오라버니를 만나는 꿈을 꿨어요.”
“그렇구나.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구나.”
아이린이 발타자르의 품에서 얼굴을 떼고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빨갛게 상기된 얼굴이었지만 발타자르에겐 한없이 사랑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진짜 우리 오라버니 맞죠?”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아이린이 발타자르의 뺨을 매만졌다. 발타자르는 그런 아이린의 조막만 한 손을 꼭 잡아주며 웃어 보였다.
“그럼. 물론이지.”
말하며, 발타자르가 아이린을 품에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아이린이 발타자르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제 뺨을 그의 목에 비볐다.
아이의 보드라운 뺨이 느껴졌다.
발타자르가 그토록 원하던 온기였다.
그 온기에 용기를 얻어 이제는 고백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로. 난 많이 방황했단다.”
그것은 회귀 전의 발타자르의 이야기였다.
“제도의 수비대장직을 맡고 계시던 아버지는 무척이나 올곧은 성정으로 결코 부정을 저지르시는 법이 없으셨지. 넌 당시에 어려서 잘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어느 날 제도의 높으신 분의 자식이 죄 없는 시민을 거리 한복판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일이 벌어졌단다. 당연히 아버지께선 그를 잡아들이고 감옥에 투옥 시켰단다.”
발타자르의 이야기가 시작되자 아이린은 그의 목을 끌어안았던 손을 풀고선 발타자르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러자 그 높으신 분께선 아버지께 얼른 제 자식놈을 풀어주라 지시했지만, 아버지는 따르지 않았단다. 원칙대로 일을 처리하신 것이지. 하지만 이에 앙심을 품은 높으신 분이 아버지에게 누명을 씌워 파면시켰고 우리 가족은 본가가 있는 이곳 오슬로로 도망치듯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마치 아이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한없이 덤덤한 발타자르의 음성은 묘하게 이야기를 경청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단다. 그 높으신 분께서는 정말로 아버지가 미우셨던지 암살자들을 보내 아버지와 어머니를 살해했단다.”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해가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의 서늘한 공기.
정적을 깨는 어머니의 비명.
그리고 발타자르에게 아이린을 데리고 도망치라 소리치는 아버지까지.
그 모습들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졌다.
부모님과 당시 저택에 머물고 있던 식솔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도망친 발타자르가 오슬로의 치안대와 함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택의 사람들 모두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뒤였다.
이미 입을 맞춰 두었는지 치안대장은 별다른 조사도 하지 않고 저택을 한번 쭉 둘러보곤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그 처참한 현장에 발타자르와 아이린을 내버려 두곤 떠나갔다.
부모님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품에서 서럽게 우는 아이린과 부모님의 시신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발타자르에게 암살자들이 다가왔다.
“그래도 일말의 자비심은 있었던지 너와 나는 살려주더구나.”
그러나 그들은 발타자르 남매를 죽이지 않았다.
[어르신의 자비로 살아남은 것이니 복수 따윈 생각도 말고 쥐죽은 듯이 살아가거라.]
그저 이 한마디 말만 전하곤 그들은 떠나갔다.
“어처구니가 없었지.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가 버리곤 자비라니. 그는 내게 자비를 베푼 것이 아니었단다.”
이것은 가웨인에게 조차 말해주지 않았던 비사?事였다.
“이 일로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방황의 끝에 있던 것은 복수심뿐이었지.”
하지만 주변에 널리고 널린 몰락 귀족인 발타자르와 달리 상대는 제도에서도 손에 꼽히는 권력자였다.
당연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으니까.
해서 발타자르는 우선 출세하기로 결심했다.
크게 출세해서 기회를 노려보자고.
그렇게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후작위와 함께 3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지만, 그 자리에 오르고 보니 복수가 더 멀게만 느껴졌다.
고위 귀족이 되었다곤 해도 허울뿐인 작위였고, 3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은 제도의 대신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고 파면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복수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멀게만 느껴지게 되자 발타자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숨을 죽이고 살아갔다.
그러던 와중에 그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는데 그것은 바로 제국 내전이었다. 발타자르는 그의 원수가 지지하는 황족의 대척점에 있는 황족의 파벌에 투신하였고 결국 그가 지지하는 황족의 도움을 얻어 복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고마움에 발타자르는 이후 황위에 오른 황제에게 충성하며 그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고 그 결말은 반란과 제국의 몰락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복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단다.”
발타자르가 애정을 듬뿍 담아 아이린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게 뭔데요?”
아이린이 묻자 발타자르가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너란다.”
아이린은 아무 말 없이 발타자르를 빤히 바라보았다. 발타자르는 아이린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매번 약속을 어겨서 미안하구나.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하고, 오랜 시간을 혼자 두어 더 미안하구나.”
너무 뒤늦은 사과였지만 이제라도 말하고 싶었다.
정말 미안하다고. 미안했다고.
“으응…… 아니에요.”
아이린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러면 이제 그만 내게 웃어주지 않으련?”
발타자르의 말에 아이가 활짝 미소 지었다.
그 복사꽃 같은 미소에 차가웠던 그의 마음에도 드디어 봄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