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이 회귀함 30화
로마노프 공작가에서 군용 게이트의 사용을 승인한 것은 3일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실로 오랜만에 가동되는 군용 게이트의 외견은 마치 거대한 전신거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게이트의 앞에는 겨울 전쟁의 주역 중 하나인 군타낙스 기사단이 마치 전장으로 떠나는 듯 완전무장을 한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선 발타자르와 아그리파, 신시아가 게이트가 작동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하게.”
발타자르의 말이 떨어지자 마법사들이 게이트에 마석을 꽂아 넣었다. 그러자 불투명한 망막 같던 게이트의 중심이 서서히 일그러지더니 이내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렇게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게이트가 내뿜던 밝은 빛이 사라졌을 때 게이트에 비치는 것은 오슬로의 모습이었다.
“그럼 다녀오겠네.”
발타자르가 마중을 나온 이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트리스탄과 퍼시발을 비롯한 대다수의 기사들과 장교들은 발타자르가 지시한 임무를 수행하러 떠났기에 마중을 나온 이들은 대부분이 행정직 관리들이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밀튼이 깊이 허리 숙여 인사하자, 관리들과 병사들이 뒤따라 허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오슬로로 향하는 인원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렇게 발타자르를 배웅했다.
“가세.”
발타자르가 선두에 서서 게이트 안으로 진입하고 그 뒤를 이어 차례대로 게이트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 * *
게이트를 통과하자 발타자르의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환영 인파였다. 온두라스에 있는 게이트가 내성 안에 있다면 오슬로의 게이트는 도심의 중심에 있었는데 도시의 시민들이 모두 몰려나온 듯 수많은 사람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발타자르와 그 일행들을 반겨주었다.
높이 솟아오른 석조 건물들 사이로 꽃잎들이 흩날리고, 아리따운 처자들은 꽃다발이나 화관 등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었으며, 사내들은 양팔을 높이 치켜들고 연신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인파 사이로 나 있는 길에서 발타자르 일행을 마중 나온 듯 보이는 이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발타자르에게 다가왔다.
“오슬로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한 여인이 꽃다발을 발타자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한 떨기 청초한 꽃을 보는 듯 희고 고운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 바람결에 살랑이는 금빛 머리칼과 선명한 빛을 띠는 붉은 입술까지.
특히나 청순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풍만한 가슴이 한껏 드러난 깊게 파인 옷차림을 비롯한 한껏 치장한 그녀의 모습은 뭇 사내들의 마음을 쥐고 흔들 정도로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북부의 영웅을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애슐리 로마노프라고 합니다. 발타자르 후작 각하.”
발타자르는 말없이 그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애슐리 공녀를 바라보았다.
스르릉─
이내 청아한 검명劍鳴이 울려 퍼지며 어느샌가 칼집을 벗어난 발타자르의 검이 애슐리 공녀를 향해 겨누어졌다. 소란스럽던 거리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숨소리조차 사라진 거리에서 발타자르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공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애슐리 공녀가 떨리는 눈동자로 발타자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잘게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절로 안쓰러움이 일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지만, 그것이 발타자르에게까지 닿지는 못했다.
“내가 오슬로에 놀러 온 것처럼 보이는가?”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서슬 퍼런 기세를 내뿜는 발타자르의 모습에 애슐리 공녀는 애써 미소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힉-”
애슐리 공녀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발타자르의 검이 애슐리 공녀의 뺨을 툭 건드렸다. 단박에 애슐리 공녀의 얼굴이 파리해졌다.
발타자르가 조금만 손목에 힘을 준다면 그 아리따운 얼굴에 긴 검상을 입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내 누이를 핑계로 날 불러 냈으면 적어도 내 누이를 데려왔던가 혹은 이슈카 로마노프가 직접 마중을 나왔어야지.”
애슐리 공녀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이렇게나 무식한 자였다면 미리 보고를 했어야지!’
타고나기를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태어난 그녀는 자신의 미모에 자신감이 충만했다. 어릴 적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사근사근한 미소와 함께 부탁을 하면 거절하는 사내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미인계를 이용해 발타자르에게 미리 점수를 따 두려고 했던 그녀의 계획은 시작하기도 전에 수포로 돌아갔다.
애슐리 공녀가 애써 미소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후작 각하께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슈카 오라버니께서 워낙 바쁘신 분이다 보니 부득이하게 제가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여 제 어디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 것인지 말씀해 주신다면…….”
발타자르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말을 도중에 끊어내었다.
“하아. 공녀는 지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군.”
애슐리 공녀가 저도 모르게 발끈하여 발타자르를 바라보는데 일순간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자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 누이는 지금 어디 있는가.”
애슐리 공녀는 그제야 발타자르가 이리 행동하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말 속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를 받아들였으면 되었을 일이었다.
“아이린 영애는 본가의 별채에 계신답니다.”
“안내하게.”
발타자르의 말에 애슐리 공녀가 일순간 당황했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무식하게 행동하는 것에 정도가 있지.’
마중 나온 애슐리 공녀 자신에게 무안을 준 것도 그렇고 지금 본가에서 발타자르를 맞이할 준비를 끝마치고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전부 모여 있는데 그들을 내버려 두고 하려는 것이 고작 동생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니.
제법 높게 평가했던 발타자르에 대한 평가를 대폭 낮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애슐리 공녀가 말했다.
“후작 각하. 각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본가에서 후작 각하를 만나기 위해…….”
“두 번 말 않겠네. 안내하게.”
단호한 발타자르의 음성에 애슐리 공녀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애슐리 공녀가 그녀의 일행들을 이끌고 앞장서자 발타자르가 천천히 말을 몰아 그 뒤를 따라갔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환호성 대신 묘한 정적만이 맴돌았다.
* * *
발타자르는 앞서 걸어가는 애슐리 공녀를 바라보았다. 본래 로마노프 공작가의 대외적인 얼굴마담은 5공녀 세실 로마노프였다.
그리고 3공녀 애슐리 로마노프는 세실의 파벌로 그녀의 참모 역할을 도맡아 하던 이였다.
한데 세실이 아닌 애슐리가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니 세실 로마노프는 진작에 실각된 듯 보였다. 그 나서기 좋아하는 세실이 이런 자리를 마다할 리가 없으니 말이다.
회귀 전과는 확연히 다른 흐름이었다.
‘재밌네.’
발타자르의 기억으로 애슐리는 요부였다. 그녀의 치마폭에 놀아난 유력자들과 인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로마노프 공작가가 몰락한 이후에도 그녀는 활발히 활동하며 제도의 사교회에서 여왕으로 군림했었다.
애슐리 공녀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많았지만 지금은 머릿속 한구석에 조용히 미뤄두기로 했다.
그보다는 곧 만나게 될 아이린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발타자르는 그의 어린 누이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누이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그녀가 다섯 살 때였으니 거의 5년 만이었다. 아마도 아이린은 발타자르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잘 지냈냐고 물어볼까.
아니면 반갑다고 말해볼까.
여러 가지 인사말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나같이 발타자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많이 자랐겠지?’
아이린이 아이일 적과 성인일 적의 모습은 기억이 뚜렷하지만, 그사이의, 한참 사랑받으며 예쁠 시기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회귀전의 그는 종종 아이린과 편지를 주고받거나 가웨인을 통해 아이린의 소식을 접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기고 일에 빠져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못난 오라버니였다.
‘그래. 결정했다.’
일단 꼭 안아주자.
그리고 그동안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하자.
그렇게 회포를 풀고 나면 마지막엔 말해주자.
사랑한다고.
* * *
그렇게 발타자르가 고민하는 사이에 어느샌가 로마노프 공작가의 별채에 도착했다. 애슐리 공녀가 별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시간이면 아이린 영애는 별채 뒤편에 있는 정원에 계실 거예요. 제가 함께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것 같으니 전 여기서 기사분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을게요. 대신 되도록이면 최대한 빨리 와주셨으면 해요.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은연중 압박을 주는 그녀의 말에 발타자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러고는 신시아와 군타낙스 기사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들은 잠시 여기서 대기하고 있게.”
“아저씨. 힘내요!”
신시아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발타자르가 마주 웃어 보이곤 슬쩍 아그리파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그러자 아그리파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애슐리 공녀에게로 접근하는 것을 확인한 발타자르는 성큼성큼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인데도 별채로 향하는 길은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천년만년 같은 시간이 흐르고 별채의 앞에 도착했을 때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별채의 뒤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소리에 이끌리듯 별채의 뒤편으로 향하자 그곳에는 애슐리 공녀의 말대로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의 중심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아래에는 발타자르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사내가 자그마한 여자아이와 함께 웃으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번엔 가웨인 오라버니가 술래예요! 눈 꼭 감고 천천히 열까지 세셔야 해요?”
여자아이의 말에 가웨인은 웃으며 알겠노라 대답하곤 나무를 바라보고 제 눈을 두 손으로 가렸다.
“하나. 둘.”
가웨인이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아이는 숨을 곳을 찾는지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발타자르와 시선이 맞닿았다.
아이가 발타자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단순한 모습조차 발타자르에게는 몹시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였지만.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챘다.
“아이린.”
발타자르가 미소지었다.
때마침 아이린이 쪼르르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 아이린도 자신을 알아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발타자르가 달려오는 아이린을 향해 두 팔을 활짝 펼쳐 보였다.
“오랜만이구나. 나의 작은 종달새…… 야?”
발타자르를 향해 달려오던 아이린은 힐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발타자르를 바라보곤 그대로 그를 지나쳐 발타자르의 뒤편에 있던 나무 뒤로 숨었다.
“다 숨었어요!”
아이린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숫자를 세고 있던 가웨인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두 팔을 펼친 채로 굳어 있는 발타자르의 모습이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가웨인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장군? 왜 거기서 그러고 계십니까?”
피식-피식- 웃으며 묻는 가웨인에게 발타자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정말 간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