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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이 회귀함-29화 (29/183)

공작이 회귀함 29화

신시아가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떠난 덕분에 발타자르는 집무실에 홀로 남아 조용히 생각에 잠길 수 있게 되었다.

‘이슈카가 린과 가웨인을 데려간 것이 그의 단독 소행일 가능성은 낮다.’

비록 아이린이 오슬로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고는 해도 그녀에게 손을 뻗는 일은 발타자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로마노프 공작가가 건재했다면 모를까 내전으로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발타자르와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연일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이슈카의 행동이 그만의 생각이 아닌 로마노프 공작가의 총의總意라고 봐도 좋을 듯싶었다.

그동안 그들의 숱한 제의를 침묵으로 일관하였으니 이 기회에 발타자르를 불러 그의 심중을 파악하려는 뜻이 담겨 있으리라.

딱-딱-

발타자르는 검지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그렇다는 것은 로마노프 공작가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기 전에 선 가르기에 들어갔다는 소리인데.

‘어차피 로마노프 공작가는 붉은 십자가 혁명단의 민란과 가문의 내전으로 몰락하게 된다.’

그것은 구태여 누구의 편을 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경계심을 살 이유도 없지.’

발타자르가 온두라스를 점거한 전의에 대해 로마노프 공작가는 의구심을 품고 있을 것이었다. 그저 그런 영지도 아니고 북부 최대의 곡창지를 보유한 영지였다.

명분이 확실하다고는 해도 그런 영지를 발타자르가 점거하였으니 머리가 비어 있지 않고서야 의심을 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발타자르가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발타자르가 속내에 다른 뜻을 품고 있는 것이라 받아들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암투를 잠시 중단하고서 서로 손을 잡고 발타자르를 제거하려 들지도 몰랐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었다.

북부에 로마노프 공작가를 제외한 또 다른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그들은 원치 않을 테니까.

‘누가 좋을까…….’

발타자르는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현 상황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공작 후보는 셋이었다.

1공자 이슈카 로마노프.

2공자 빌로스 로마노프.

5공녀 세실 로마노프.

각자 능력도 출중하고 속에 품은 야심도 큰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휘하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즐비하고 뒷배 역시 탄탄했다.

누구 하나 어디 빠지지 않는 인물들로 도저히 그 무능했던 전대 로마노프 공작의 자식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한 인물들이었다.

‘……잠깐만.’

불현듯 한 가지 정보가 떠올랐다.

이 셋 중에 정말 로마노프 공작의 친자식이 아닌 이가 한 명 있었다. 이 사실은 로마노프 공작가가 몰락하고 난 이후에도 한참이 지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자가 좋겠군.’

표면적으로 밀어줄 만한 이를 선택한 발타자르는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슬로라…….”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하는 곳이었다.

북부의 지배자인 로마노프 공작가가 다스리는 도시답게 북부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로 전도유망한 인재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했다.

부모님의 사후에는 아이린을 만나는 일을 제외하면 최대한 방문하는 것을 자제하던 곳이었다. 인근에 부모님의 묘가 있기에 더욱더.

‘이참에 한번 뵙고 와야겠군.’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 너머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

발타자르의 대답에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목소리의 주인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아그리파였다.

“일단 앉게.”

발타자르가 자리를 권하자 아그리파는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발타자르 역시 아그리파의 맞은편에 앉아 그와 마주 보았다.

“준비는 다 끝마쳤는가?”

“예. 딱히 준비랄 것도 없지만요.”

문득 탁자 위에 올려진 담배가 발타자르의 눈에 들왔다.

“피우겠나?”

“예.”

발타자르가 담배를 권하자 아그리파가 담배를 받아 들고 담배를 한 대 태웠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담배 연기만 뿜어내던 아그리파가 입을 열었다.

“저를 왜 데려가시는 겁니까?”

아그리파의 물음에 담배는 태우지 않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발타자르가 대답했다.

“지난번 온두라스 백작의 일로 자네는 자네를 살려두어야 할 이유를 증명해 보였네. 그렇다면 이제는 자네의 가치를 증명해 보일 차례 아니겠는가?”

발타자르의 말에 아그리파는 고민에 빠졌다.

‘가치. 가치라…….’

온두라스 백작과 그의 수족들을 아그리파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였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말을 들어보니 그것은 자신의 숨을 붙여둘 이유밖에 되지 않았던 듯했다. 대체 자신에게 발타자르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무력?

그의 휘하에는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빼어난 기사들이 즐비했다. 아그리파가 로열 랭크라는 강자이기는 하지만 발타자르에게 그렇게까지 썩 매력적인 인재는 아니었다.

정치?

이것을 떠올리자마자 아그리파는 피식 웃고 말았다. 하려고 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발타자르의 마음에 들 정도는 아니리라.

그렇다면 남은 것은 인맥뿐인데.

‘어?’

아그리파는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빌로스 공자님의 일파와 관련된 인맥을 원하시는 겁니까?”

아그리파의 물음에 발타자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와 함께 오슬로에 도착하면 아마 자네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많을 걸세. 나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말이야. 그들 중에서 자네와 안면이 있거나 친분이 있는 이들은 대개 빌로스 공자의 파벌일 테지. 온두라스 백작이 그쪽 파벌의 거두었으니 말일세.”

발타자르가 만지작거리던 담배를 뚝 부러뜨렸다.

“그때 자네는 나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다니면 된다네. 가령…… 소문과는 달리 가까이서 지켜보니 사실은 우유부단하다거나. 새벽에 몰래 여자를 불러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든가. 쉽게 말해서 내 욕을 하면서 날 깎아내리고 다니면 된다. 이 뜻이네. 내가 이용해 먹기 좋은 녀석이라고 소문이 나도록 말이야.”

발타자르의 저의를 파악한 아그리파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발타자르의 진영에서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하하. 장군께선 실로 능구렁이 같으십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 일을 제대로 수행해 낸다면 제게 무엇을 줄 수 있으십니까?”

아그리파의 눈동자에 욕심이 서리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한 발타자르는 피식 웃었다. 잠시 풀어놓았더니 그새 또 기가 살았는지 주인을 향해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재차 그의 위치를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살려는 주지.”

발타자르의 말에 아그리파의 얼굴에 일순간 당혹감이 서렸다.

“……예? 그건 분명히 일전의 일로 무마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하나 그것은 내게 위해를 가했던 일을 없던 것으로 해주겠단 뜻이고. 현재 자넨 제 주군을 시해한 죄인 아닌가. 내가 자네를 계속 품에 안고 있을 이유가 없다면 내치는 것이 당연하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아그리파의 얼굴이 서서히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제 목에 목줄이 채워진 것을. 그리고 그 목줄을 쥔 자가 누구인지도.

“내게 끊임없이 증명해 보여야 할걸세. 자네의 가치를.”

발타자르의 말에 아그리파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한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더니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조금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듯하니 이만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발타자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게.”

아그리파가 사색이 된 얼굴로 집무실을 떠나갔고, 발타자르는 손에 쥐고 있던 바스러진 담배의 잔해들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 * *

로마노프 공작가의 연회장.

이례적으로 로마노프 공작가의 직계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말 속에는 날카로운 비수로 가득했다.

“형님. 발타자르 후작이 군용 게이트 사용을 요청했던데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사나운 인상의 사내. 빌로스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기품 있는 몸짓으로 와인을 마시고 있던 이슈카 로마노프가 그를 빤히 응시하며 대답했다.

“그걸 왜 내게 묻는 것이냐. 게이트 건은 네 소관이지 않느냐.”

“그렇습니까? 전 또 게이트 관리자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내려 두셨기에 형님 소관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그랬던가?”

이슈카가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빌로스는 포크로 스테이크 조각을 쿵- 소리 나게 찍으며 중얼거렸다.

“여우 같은 새끼.”

어디까지나 혼잣말이었지만 주변에 충분히 들릴 정도는 되었다. 이슈카는 빌로스의 중얼거림을 들었음에도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와인만 홀짝였다. 그 모습에 빌로스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자자. 그것보다 발타자르 후작이 이제야 움직일 마음이 생긴 것 같은데 다들 아시죠? 선의의 경쟁. 미리 이야기한 순서대로 그에게 접근하기에요?”

청순한 인상의 미인, 애슐리의 말에 식사를 하던 그녀의 형제자매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애슐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만에 모두의 마음이 일치하니 무척 보기가 좋네요. 호호.”

쾅-!

돌연 빌로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행동에 애슐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벌써 가시려구요?”

“애초에 우리가 웃으면서 함께 식사할 사이는 아니잖아? 저번에 협의한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모인 것인데 볼일 다 끝난 것 같으니 난 먼저 간다.”

빌로스가 성큼성큼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그의 파벌에 속한 이들까지 그를 따라나섰다. 애슐리가 제 뺨에 손을 대고선 중얼거렸다.

“둘째 오라버니도 참. 성격 급하시다니까.”

그런 그녀에게 이슈카가 물었다.

“그보다 손님들은 잘 계시느냐?”

손님들이란 가웨인과 아이린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것은 그들의 접대를 애슐리가 맡고 있기도 했고 혹여나 그들에게 수작질은 부리지 않았느냐 묻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요. 두 분 모두 무척 잘 계시답니다. 특히나 아이린 영애가 제가 가꾼 정원을 몹시도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더라구요.”

“잘 지내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이슈카가 애슐리를 향해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주고받던 그의 형제자매들에게 말했다.

“난 일이 밀려서 먼저 가보마. 식사 맛있게들 하거라.”

이슈카가 떠나가자 빌로스를 지지하던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슈카의 파벌들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연회장을 떠나갔다.

애슐리가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다들 공사가 다망하시다니까.”

그러곤 이내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자자. 우리는 계속 식사하도록 해요. 언제 또 이렇게 모일지 모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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